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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n 18. 2021

권금성과 신흥사

조선시대부터 무너진 권금성, 군사분계선이 무너지길 원하는 신흥사

속초 서쪽 편에는 설악산이 높이 솟아있다. 워낙 경관이 빼어나서 1970년에 우리나라 다섯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유네스코로부터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세 번째로 높은 산이기도 하다. 특히 가을 단풍철에는 그야말로 절경이라 이를 보려는 산악인들로 가득하다. 산악인들은 다양한 등산로를 활용하여 대청봉 꼭대기에 다다르려 한다.


그런데 등산을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바로 설악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는 권금성과 케이블카 승강장 옆에 있는 신흥사가 있다. 권금성은 고려 말 권 씨와 김 씨가 피란하여 지은 성곽이다. 아무래도 몽골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 바위로 가득한 험준한 곳에 짓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 겨울에 아버지 따라 아이젠을 차고 갔던 기억이 있었는데, 거의 30년이 지나서 권 씨와 김 씨의 역사를 보기 위해 다시 찾았다.


신흥사는 신라시대부터 전통을 이어오는 사찰이다. 오늘날에 있는 건물들은 조선 후기에 재건하였는데, 사찰 경내에는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구원하는 아미타불이 모셔진 극락보전과 지옥에서도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이 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 최근에 지은 대형 청동불상과 오층석탑도 있다.


권 씨와 김 씨 가문이 몽골에 항전했던 권금성과 신라시대부터 전통을 이어오는 신흥사로 가보자.

     

권금성 케이블카 타러 가는 길


속초 시내에서 권금성을 가는 길은 다음과 같다. 온천로를 타고 청초천을 따라서 길을 가면 척산온천 휴양촌이 나온다. 그때 왼쪽으로 꺾으면 언덕길로 올라가는 데, 끝부분에 목우재터널이 있다. 터널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쭉 가면 설악산소공원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국립공원으로 들어갈 때 입장료가 있는데 성인 1명당 3,500원이다. 입구를 들어가면 반달곰상이 나를 반겨준다.


반달곰상을 지나 좌우로 반은 푸른 산, 반은 바위산인 설악산 자락을 볼 수 있다. 워낙 바위가 많아 험준하지만 신령한 기운이 있는 산이라서 그런지, 조선 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雪嶽。在府西北五十里。鎭山。極高峻,仲秋始雪,至夏而消,故名。


설악(雪嶽). (양양도호)부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이며 매우 높고 가파르다.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진산(鎭山)이라는 말은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을 말한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속초시 서쪽이지만, 조선시대 당시 속초는 양양도호부 관할이었다. 양양군내 기준으로 보면 북쪽이라 북서풍을 막아주는 중요한 산이다. 그리고 각 고을별로 진산으로 선정되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웅장한 바위 자락에서 마을 제사를 지낼 때 이를 주관하는 이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국립공원 입구에서 나를 맞아주는 반달곰상


입구에서 바라본 설악산 자락


그리고 조선시대는 현재보다 추워서 그런지 꼭대기가 사실상 만년설이나 다름없었나 보다. 오늘날에는 11월 되어야 눈이 내리고 3~4월이 되면 눈이 다 녹는데,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기후변화는 설악산은 피할 수 없나 보다. 직경 5cm 분비나무들이 감소하고 꽃가루 날림 시기도 보름 이상 빨라졌다고. 유네스코 생물권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설악산이라 산자락 생태변화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곰이 있는 동상에서 좀 더 걸어가면 거대한 오층석탑이 뒤쪽에 있는 소나무 둘과 위용 있게 서 있다. 받침돌에는 팔부신중, 그 위 몸돌에 사불상이 있는 형태인데, 비천상을 뺀 진전사지 삼층석탑과 매우 유사하다. 비교적 근래에 지어졌는데,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석탑이다. 하긴 속초는 한국 전쟁 이전에는 북한에 속했다가 우리가 수복한 땅이기도 하니까. 석탑 왼쪽으로는 1951년 5월~6월 동안 설악산에서 전투를 치른 영령들을 기념한 설악산지구 전적비가 있다.


탑 오른쪽 편으로는 낙산사에서 본 부도, 동글동글한 신줏단지 같이 생긴 것들 그리고 비석들이 한 데 모여 있다. 조선 인조 22년(1644)에 신흥사가 중건된 이후 역대 고승들의 부도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무려 19개의 부도와 6개의 비석이 같이 모여 있다. 비석은 신흥사의 유래를 알 수 있는 신흥사사적비(新興寺事蹟碑) 등이 있는데, 조선시대 이후 신흥사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잘 말해주는 사료인 것 같다.


신흥사에서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오층석탑


설악산지구 전적비


신흥사 부도군


부도군을 지나니 권금성 케이블카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 앞에는 노란색 케이블카가 하나 보이는데, 2002년 스위스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전자동 시스템을 구축하기 전에 운행했다. 나도 90년 겨울인가 어린 나이에 노르딕을 신고 옛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때 케이블카는 좀 천천히 올라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날 케이블카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11,000원인데 이전과 달리 상당히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케이블카를 출발했던 곳을 바라보니 선착장 왼쪽에 신흥사, 오른쪽에는 소공원이 훤히 보인다. 그리고 케이블카 오른쪽 편으로 바라보니 두 산 자락 사이로 흐르는 쌍천을 볼 수 있다. 한 5분 정도 지나서 인가. 권금성 선착장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들린다. 어릴 때 왔을 때보다는 상당히 빠르게 올라간 느낌이다.


옛 권금성 케이블카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골짜기 전경. 왼쪽에 신흥사가 보인다.


권금성 이야기


케이블카 선착장에서 내려서 등산로를 따라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권금성이 위용을 드러낸다. 원래 케이블카가 있기 전에는 주변으로 나무가 듬성듬성 있었는데, 관광객의 증가로 주변이 다 바위로 변했다. 그리고 말이 권금성이지 성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권금성은 옹금산 석성(擁金山石城)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둘레가 약 1,980보이고, 비가 오면 바위 새에 물이 솟아 흘러서 샘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래도 세종 시절에는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權金城。在雪嶽頂。石築。周一千一百十二尺,高四尺。今半頹落。俗傳昔有權、金二家避亂于此,故名。《洛山寺記》所云“天兵闌入我疆,是州於雪嶽山築城守禦”,疑卽此。

     

“권금성(權金城). 설악산 꼭대기에 있으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1백 12척이고 높이는 4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예전에 권 씨 김 씨 두 집이 여기에 피란한 까닭으로 이름하였다.'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방어하였다.' 한 곳이 이곳인 듯하다.


즉 세종 이후 조선시대에 강원도 양양 산악지역이 안정되면서 성은 버려진 듯하다. 전략상 필요성이 떨어지기도 했고. 그런데 왜 권 씨와 김 씨가 이 험난한 설악산 자락 정상 능선에서 방어해야만 했을까? 권금성이 구축되었던 시절은 몽골 6차 전쟁 때다. 몽골은 오늘날 미국의 위치와 비슷하게 군사 강대국이었다.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폴란드 지역까지 가볍게 무장한 기병으로 정복전쟁을 유라시아 지역에 걸쳐 이어갔으니까. 이미 금나라와 싸우면서 공성전 기술도 갖췄다. 그런 몽골군을 5번이나 꾸역꾸역 막은 것이 고려였다.


권금성 봉화대. 가운데 솟아오른 바위를 말한다.


봉화대 올라가는 길 왼편으로 바라본 설악산 자락


하지만 6차 전쟁 때 몽골은 파종시기와 추수 이전시기 등 다양한 시일에 침략했다. 게다가 수군까지 동원해서 무려 1년 동안 고려의 전 국토를 유린했다. 5차 침입 때까지는 오늘날 평안도 지방에서 전쟁을 시작해서 개경을 거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주로 전투를 벌였는데, 6차 침입 때는 강원도에서도 전투가 이뤄질 정도였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침략을 하니 평지에서 농사를 짓지 못해 식량공급에 차질을 받았다. 그래서 평지 대신 험산에서 성곽을 크게 키워 방어하는 입보용산성(入保用山城)을 전국으로 확대 축조한다. 암석이 많은 산악지대는 화살과 투석에 필요한 석재 이용이 용이한 데다 몽골 기마병의 침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2000년대 속초시가 강원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권금성 지표조사를 실시했는데, 권금성은 내가 서있는 봉화대 주변 둘레 1,329m의 내성뿐만 아니라 둘레 4,112m에 이르는 외성도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게다가 외성에는 건물터, 문지, 감시초소, 수구와 순찰로까지 발견되었다고. 또한 주변에 진전사지와 낙산사에서 발견된 고려 시기 물고기 문양의 기와류가 출토되어 주민들이 몽골에 대항하여 농성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자료가 되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봉화대 앞으로는 내성 북벽이 있었다.


봉화대 가까이...


바위로 가득한 권금성


그러면 바위로 가득한 이곳에서 성 안에 있던 주민들은 어떻게 생존했을까? 평지에서 이전에 추수한 곡식을 험준한 이곳으로 옮겼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곡식이 떨어져서 산에 있는 풀뿌리를 먹으며 최선을 다해 몽골과 싸웠던 것인지? 이곳에서 방어하던 권 씨와 김 씨 일족들은 몽골의 동태를 방어하는데 낮밤을 가리지 않고 경계를 실시했을 것이다. 마치 휴전선 GOP 소초와 GP에서 북한군의 동태를 지켜보는 것 이상으로 더 촉각을 세우지 않았을까?  


몽골이 물러가고 평화가 깃든 오늘날의 관광객들은 좌우로 보이는 권금성 주변의 산세와 속초시 전경을 감상하고 있다. 특히 왼쪽으로 영랑호, 오른쪽으로 청초호 그리고 중간에 속초 시가지가 산자락을 넘어 한눈에 들어온다. 청초호 오른쪽 산자락을 넘어서 설악산에서 흘러나오는 쌍천도 함께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람쥐가 카메라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롭게 돌아다닌다.


해발 700m 언저리에 있는 권금성은 관광객들이 접근할 수 없는 군데군데에 성벽만 남고 조선 초기부터 쇠락해갔다. 주변에 험준한 산자락만 있던 곳에서 식량을 아껴가며 산 아래 모인 적군들을 상대하며 생존해야 했던 권 씨와 김 씨 가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찌 보면 이들과 설악산 전투에 진지하게 임했던 영령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설악산 산자락과 속초 도시 전경을 우리가 평화롭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권금성에 다시 성곽이 세워지지 않기를 바라며 케이블카 선착장으로 하산했다.  


권금성에서 바라본 속초시 전경. 왼쪽으로 보이는 호수는 영랑호, 오른쪽 호수는 청초호다.
하산하는 길에서 바라본 쌍천


설악산을 대표하는 사찰 신흥사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내려간 다음 다시 왼쪽으로 향하면 신흥사로 갈 수 있다. 일주문을 지나고 오른쪽 편을 보면 거대한 청동불상이 하나 보이는데, 입구의 석탑과 같이 통일을 기원하며 만든 대형 석가모니불이다. 1987년 8월에 조성하여 1997년 점안식을 가졌다는 걸 보면 무려 10년에 걸친 역사라고 해야 할까나. 석가모니불 앞에 복전함이 하나 보이는데, 복전함 위로 특이하게 생긴 향로가 보인다. 아무래도 백제 금동대향로를 복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난번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사건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아직까지 냉각기인데, 다시금 교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형 석가모니불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신흥사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역사 절에 들어가기 전에는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문이 있다. 그런데 낙산사의 그것보다 건물이 훨씬 오래되어 보인다. 하긴 인조 때 재건한 절이니 상당히 낡아 보이는 건 당연한 터이다. 하지만 원래 신흥사의 역사는 신라 진덕여왕(652) 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창건을 한 사람은 자장이고 당시 절의 이름은 향성사였다. 이후 불타버린 뒤 701년에 의상이 자리를 능인암터로 옮겨서 절을 중건하여 선정사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몽골의 침입과 임진왜란까지 이겨내며 1,000여 년 동안 역사를 지켰으나, 안타깝게도 인조 20년(1642)에 화재로 완전히 전소되어 버린다. 오늘날 보이는 사찰 건물은 이 이후에 바로 재건되었다고 보면 된다. 신라 때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은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로 들어가기 전 볼 수 있는 보물 제443호 향성사지 삼층석탑이 증명해준다.


신흥사가 신라시대부터 이어왔음을 증명하는 보물 제443호 향성사지 삼층석탑. 설악산 소공원 들어가는 길에 있다.


신흥사의 대형 청동 석가모니불


사천왕문. 낡은 기둥들과 벽면은 적어도 몇 백 년 전에 지은 사찰임을 암시한다.


사천왕문을 지나가면 낙산사에서 본 빈일루의 횡형태로 이뤄진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신흥사 보제루다. 무려 조선 영조 때(1770)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원래는 사방이 개방된 누각이었는데, 1971년 문을 설치하면서 다시 폐쇄했다고 한다. 내부에는 불교의식 때 쓰이는 악기들인 법고, 용머리 장식 목어 그리고 범종이 있다고 한다.


보제루를 아래를 지나니 머리 위로 연등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정면으로 인조 25년(1647)에 처음 지어진 극락보전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 지어져서 그런지 공포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 여러 개 있는 다포양식의 사찰인데, 지붕 정면 양쪽으로 긴 기둥이 세워져 있다. 아무래도 350년의 세월을 버틴 지붕의 침하를 막기 위해서 설치한 것 같다. 지붕 아래 단청은 다채로운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극락보전 안에는 나무 불상이 셋 보이는데 바로 보물 제1721호인 속초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중앙에 있는 아미타불의 손 모양을 보면 오른손은 들어서, 왼손은 무릎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에 고리를 만드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를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이라고 한다. 아 아미타여래는 불국사 극락전에서도 본 기억이 있다. 고통에 빠진 모든 중생들을 극락으로 이끈 다음 모든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게 도와주는 이다. 그리고 그는 우주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열반에 드는 이다. 아미타불 좌우로는 아미타의 자비문을 관장하는 관세음보살과 지혜문을 관장하는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신흥사 범종각(좌)과 보제루(우)


신흥사 극락보전.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세월의 흔적 때문이어서 그런지 긴 지붕 네 귀퉁이에 철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다.


보물 제1721호 속초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극락보전 왼쪽으로도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영조 13년(1737)에 창건한 명부전이다. 명부전 가운데 문이 양쪽 문보다 훨씬 큰데 부처와 스님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양쪽문은 높이가 상당히 낮은데 재가불자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게 설계를 한 것이다. 즉 성스러운 곳이니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라는 의미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불전이다. 지장보살도 아미타여래와 같이 석가여래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인데, 아미타불이 극락을 관할한다면, 지장보살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자신도 성불하지 않는 존재인데, 사실상 성불을 포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지옥문을 지켜서 지옥에 들어가는 중생들도 막는다고. 명부전 안에도 역시 보물 제1749호인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신흥사 명부전


보물 제1749호 속초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신흥사에 극락보전과 명부전을 주건물로 세운 이유는 아무래도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아미타여래와 지장보살을 내세워 글자를 모르는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양양 낙산사처럼 조선시대에도 후원받은 몇 안 되는 사찰이었기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해가 이제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 되어 이제 신흥사를 뒤로 하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설악산 소공원은 두 가지 역사가 담겨 있다. 하나가 권 씨와 김 씨가 몽골 침입에 맞서서 항전했던 권금성, 다른 하나는 신라시대부터 오랜 역사를 이어온 신흥사가 있다. 권금성은 적들의 침입이 줄어들면서 오늘날 성곽은 등산객들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만 남았다. 반면 신흥사는 조선시대 인조 시절 화재를 겪었긴 했지만 오늘날까지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사찰로 남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신흥사에서 통일을 기원하고 지은 오층석탑과 거대 청동불상처럼 남북평화와 통일이 이뤄져 휴전선을 옛 권금성처럼 허물어뜨리는 일만이 남았다. 언제쯤 우리 세대나 후손들이 군사분계선을 아래처럼 쓸 수 있을까?  


“구 군사분계선. 1953년 7월 27부터 21세기 초까지 남북 분단으로 인해 한반도 허리 부분에 걸쳐 있던 248km 철책인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군사분계선 남북 2km는 비무장지대였지만 남북이 감시초소들을 쌓아서 방어했던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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