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강릉 대도호부의 관청은 어떤 구조로 이뤄졌을까?
옛 동아시아 행정단위 중에는 도호부(都護府)라는 곳이 있다. 도호부는 원래 당나라 시절 새로 정복한 이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군사 성격의 행정기구였다. 세계사 수업에 관심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당나라 실크로드의 통로였던 안서도호부가 떠오를 것이다. 안서도호부에서 일어난 안사의 난도 유명하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지배를 위해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해서 신라가 이에 반발에 전쟁에 돌입한 나당전쟁도 있다.
신라와 당과 악연이 있었긴 했지만 당나라 도호부제가 좋은 행정사례였는지, 고려도 이를 적극 도입해 군사 요충지에 설치했다. 이후 점차 일반행정기구로 변화하면서 5도호부 체제를 유지하다가 조선시대에는 1,000호 이상의 군을 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강릉은 고려시대 후기부터 왜구침입에 시달려서 일찍부터 군사기능을 강화했다. 그래서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대도호부로 특별히 관리한다. 같은 대도호부인 경상도 안동과 창원, 함경도 영흥, 평안도 영변과 더불어 오늘날 특례시처럼 관리된 셈이다. 오늘날 광역시에 대응하는 부(府)보다는 지위가 낮았지만 조선시대 특례도시답게 이율곡과 허균과 같은 유명문사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날에도 강릉은 강원도 3대 도시 중 하나다.
조선시대 대도호부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강릉 대도호부관아다. 원래는 객관인 임영관이 고려시대에 최초로 건립된 후 1,000년의 역사를 잇다가 일제에 의해 임영관 삼문과 칠사당을 제외하고 1920년대 말에 철거된다. 삼척도호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강릉의 옛 행정역사를 통째로 유린당한 역사를 회복하기 시작한 때는 21세기가 시작하면서다.
옛 대도호부를 복원하는 것은 강릉의 뿌리를 다시 찾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옛 강릉의 행정역사와 전통 건축을 연구할 때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복원된 건물들이 옛날에 어떻게 쓰였는지 강릉대도호부 관아로 가보자.
임영관 객사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강릉 시내버스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혹시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한다면, 출발하는 곳에서 ‘용강동 서부시장’이나 ‘강릉대도호부관아’ 정류장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서 타고 가면 된다. 나는 용강동 서부시장에서 내려서 강릉 임영관을 먼저 보기로 했다. 임영관으로 가다보면 건너편에 상당히 이목을 끄는 성당이 있는데 강릉 임당동 성당이다. 무려 100년의 역사가 깃든 성당이다. 성당 건물은 1955년에 완공했는데, 건립되기 이전에는 금광리와 주문진에 있었다고 한다. 성당이 건립되기 전 건너편에 있던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무시무시한 장소였는데,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로 순교를 당한 사람이 많아서 그렇다. 오늘날 관아는 천주교 신자라도 나들이 장소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예전 알뜰신잡 전주편에서 유시민 씨가 전동성당을 보며 “과거 천주교를 믿다가 박해받은 이들이 꿈꿨던 세상에 가까워졌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임영관 삼문에 도착했다. 임영관 삼문은 무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건물이다.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요소는 죽서루에서 봤던 주심포 양식과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기둥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에도 있는 기둥양식인데, 기둥의 중앙부가 얇아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하여 건물의 안정감을 주기위해 만든 양식이다. 재미있게도 배흘림기둥 양식은 동아시아의 전유물이 아니다.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옛 그리스 건물과 일부 르네상스 시대 건물에도 있어서 배흘림기둥은 동서양 문화구분을 초월하여 사용한 기법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내가 계속 봤던 고택들의 팔작지붕이 아닌, 옆에서 볼 때 ㅅ자형으로 이뤄진 맞배지붕이다. 영동지방에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고려시대 목조 건축 양식이어서 국보 제51로로 지정되었다.
임영관 삼문 뒤에 상당히 커다란 규모의 건물이 있다. 바로 중앙정부의 요인들과 사신이 머물렀던 임영관 객사 건물이다. 객사가 설립된 시기도 삼문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로 추정되는데 1997년에 발굴조사를 실시했을 때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연꽃무늬 수막새와 암막새와 기와조각들이 증거다. 고려 초기에 설립되었다고 하면 무려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객사였는데(물론 화재로 재건한 적도 있다), 일제가 강릉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한다는 이유로 1929년에 마음대로 철거해 버렸다. 심지어 삼문 앞에 오늘날 KBS강릉방송국 자리에 있었던 일본식 신사(神社)로 접근하는 도로를 만들어서 훼손시켰다. 게다가 그곳에 설치한 신사는 강릉단오제의 중심지인 대성황사를 헐고 만든 것이다.
안타깝게도 강릉대도호부도 죽서루만 남은 삼척도호부와 같은 운명을 겪은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으면 수많은 지역 관아들이 유럽 옛 영주들의 고성(古城)들처럼 한국 관광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하고 도시를 확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의 옛 뿌리들을 헐어버렸음을 생각하면 그들의 만행에 분노치 않을 수 없다.
광복 후에는 여기에 강릉경찰서가 들어섰다. 강릉경찰서를 이전한 후 1993년 이곳에서 강릉시청 신축기공식을 열었는데, 관상수를 옮겨심기 위해 땅을 파던 중 임영관 유구가 노출된다. 이후 발굴작업에 착수하여 사적 제388호로 지정하고 복원계획을 수립해서 2006년에 임영관을 우리 손으로 재건할 수 있었다(강릉시청은 이후 홍제동에 새로 자리 잡아 2001년에 이전했다). 만약 임영관 유구를 무시하고 시청을 여기에 그대로 지었으면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이었을 것이다. 임영관 앞자리에 자리 잡은 건물은 중대청(中大廳)인데 고려시대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주심포 양식과 이에 따른 맞배지붕 그리고 배흘림기둥이 이를 잘 보여준다. 객사에 중대청이 있는 건 강릉대도호부의 독특한 양식이라고 한다. 용도는 강원도 관찰사의 감찰을 위한 장소로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뒷자리에 임영관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 양날개에 대청마루가 있는 별채가 이어져 있다. 중앙에 있는 건물은 전대청(殿大廳)이다. 전대청에는 임영관 글자가 써져있는 현판이 있다. 원래 1366년 고려 공민왕이 낙산사를 가다 길이 막혀 강릉에 머물렀을 때 글씨를 써 현판을 하사했는데, 여기에 있는 건 1970년대에 원본을 베껴 써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임영관이 복원되기 전까지 현판은 삼문에 걸려 있었다. 전대청은 객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인데, 바로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음력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한 건물이다. 낮에 오면 어떻게 의례를 행했는지를 잘 볼 수 있다. 역시 중대청과 삼문처럼 맞배지붕 구조다.
전대청 우측에 있는 건물은 동대청(東大廳)이다. 중앙관료의 숙식과 연회, 재판, 국가 경사와 애사시 망곡과 같은 의전 역할도 했다. 온돌방과 마루가 있는 것을 보니 중앙관료들이 출장할 때 머물렀던 숙소이기도 했고. 수교집록에 의하면 문무관 상관없이 품계가 2품 이상인 사람이 이용했다고 한다. 좌측에 있는 건물은 서헌(西軒)인데 역시 중앙파견 관리와 사신이 숙식했던 곳이었다. 다만 정3품 관료들이 이용한 것을 보아서 동대청보다는 급이 낮다. 그래서인지 규모도 작다고. 동대청과 서헌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이뤄져 있다.
이전에 내가 삼척도호부를 설명할 때 왕의 전패를 모셔놓은 객관이 지방관의 근무공간인 동헌보다도 훨씬 더 크다고 언급했는데, 강릉대도호부를 보니 실제로 그러했다. 객관은 왕조시대 중앙집권이 무엇인지 제대로 말해준다. 중앙에서 관리가 왕명을 전달하는 일이 있으면 관아에 있던 관료들이 긴장한 마음으로 준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방문한 중앙관리의 계급이 상당히 높으면 도호부 실무자들이 오늘날 군사령관이나 사단장을 맞이하는 장병들처럼 의전과 연회를 준비하느라 상당히 고생하지 않았을까?
동헌과 칠사당
임영관을 나서면 정자가 하나 보이는데 2012년에 복원된 의운루(倚雲樓)다. 아무래도 삼척 죽서루와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의운루 주변에는 높은 건물이 많이 들어서서 뭔가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만, 옛날 단층 초가집들로 가득했던 시절에는 저 멀리 강릉을 관통하는 남대천을 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의운루는 작년 11월에 열린 강릉 문화재 야행 축제 때 가장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강릉 문화재 야행 행사는 2016년부터 매년 펼쳐왔는데 8~9월 즈음에 날짜를 확인해보고 참여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독특한 전통복장 퍼레이드, 전통공연과 전통문화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 용강동 서부시장에서 대도호부 관아까지 이어지는 야시장도 즐길 수 있다.
의운루를 나서 내리막길을 걸으면 또 다른 건물이 하나 보이는데, 바로 강릉대도호부사의 정무장소인 동헌(東軒)이다. 동헌도 의운루와 함께 2012년에 함께 복원되었다. 동헌이라고 하는 이유는 지방관이 근무하는 장소가 객관에서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강릉대도호부의 동헌은 객사 남쪽에 위치하지만, ‘동헌’이라는 말이 고유명사로 되어서 그대로 쓴 것이다. 낮에 가면 동헌 건물 안에 강릉부사와 지방관들이 어떻게 일을 했는지를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동헌 서쪽에 별채가 하나 있는데, 관아에 마련한 작은 도서관이다. 바닥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구조고 민속, 향토, 어린이를 위한 자료들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는데, 옛 관아 시절 서재가 있던 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동헌을 지나 출입문을 정면으로 하여 동쪽으로 가면 고택과 같은 건물이 하나있다. 옛 강릉부사의 숙소였던 곳처럼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 바로 7가지의 지방행정 업무를 맡았던 칠사당(七事堂)이다. 7가지 업무는 호구조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단속인데, 오늘날로 치면 시청의 국(局)에 호응한다. 언제 지어진지는 알 수 없지만 인조 10 년(1632)에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확장 중수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다가 고종 4년(1867)에 화재로 소실되어 부사 조명하가 다시 중수한 후 오늘날까지 쭉 이어져 오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로 칠사당은 부침을 겪었다. 먼저 일본 수비대가 사용하다 강릉군수 관사로 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미국민사원조단이 임시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8년 5월부터 1971년까지 지방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될 때까지 다시 강릉시장 관사로 사용했다. 당시 강릉시청은 칠사당 담장 너머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너무 많은 변형이 생겨 1980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즉 칠사당은 임영관 삼문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칠사당 왼쪽편을 보면 누각이 있는데 다른 곳과 달리 상당히 튀어 보인다. 예전에는 대청마루에서 목제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1980년 중수를 하면서 오늘날에는 사다리로 연결해야만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익공양식의 건물이고 중앙부 세 칸에는 대청마루가 오른쪽 두 칸에는 온돌방을 볼 수 있다. 칠사당 앞에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명이 무려 56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칠사당을 마지막으로 대도호부관아를 나섰다. 으리으리한 객관과 그보다 좀 초라해 보이는 동헌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중앙집권 전제정치체제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오늘날 자치를 실시할 수 있는 강릉시장과 달리 옛 강릉대도호부사는 왕의 어명과 중앙관리들의 방문에 항상 긴장했어야 함을 잘 보여주는 장소였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나 계속 유지했다면 유럽 영주들이 살았던 옛 성과 같은 위상을 보였을 건데 안타깝게도 일제가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을 잔인하게 허물어 버린 아픔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객관과 동헌 건물들이 서서히 복원되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관아의 복원 기간이 2025년까지라고 하는데, 어떤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설지 궁금해진다. KBS강릉방송국을 유천동으로 이전한 후 강릉단오제의 제의 공간인 대성황사도 복원한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방송국은 그대로 있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지만 복원을 꼼꼼히 하기 위해서라는 걸로 이해해야지. 이번 가을에는 강릉 문화재 야행을 위해 2025년에는 또다른 복원을 기대하며 이곳을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어렵게 건물들을 복원해 민족문화를 이어가기에 관아 건물의 보존은 우리에게 맡겨진 숙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