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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May 04. 2021

두타산 무릉계곡

무릉반석, 삼화사, 쌍폭포와 용추폭포

동해시의 유명한 산이라면 두타산(頭陀山)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두타는 팔리어 ‘Dhuta(धुत)'의 소리를 한자로 적은 것인데, 원래 의미는 ‘떨쳐버린다’는 뜻으로, 번뇌와 티끌을 없애고 몸과 마음을 닦고 고행을 행하는 불교수행법이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자연비경을 담고 있어서 바쁜 일상을 내려놓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명승 제37호 무릉계곡을 감상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고, 아예 1,353m 산정상까지 등정하는 사람도 있다.


두타산 무릉계곡은 명승 제37호로서 계곡과 계곡 주변의 바위 경관이 매우 빼어나다. 뿐만 아니라 매년 10월 국행수륙제를 거행하는 삼화사, 1박 2일 연예인들이 방문했던 쌍폭포, 쌍폭포 위에는 용추폭포가 있다. 삼화사 입구에는 수많은 한자들이 새겨있는 무릉반석이 있는데 이곳이 고려시대부터 유서 깊은 명승지임을 말하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나는 두타산을 등정하기보다 4km인 무릉계곡의 역사를 좀 더 관찰하는 데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42번 국도를 타고 무릉계곡으로 향했다.


무릉반석 


동해고속도로 동해 나들목에서 7번 국도로 나올 때 삼척방향으로 가자. 직진하다보면 정선으로 향하는 42번 국도가 나오는데 우회전하자. 쭉 가다가 원평교차로에서 무릉계곡으로 빠지는 길로 나간 다음 좌회전하여 삼화동으로 가자. 삼화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하천을 따라 쭉 가면 무릉계곡 입구에 도착한다. 무릉계곡 입장료는 성인 1인 기준 2,000원이다.


입구인 신선교에서 계곡물을 계속 따라가면 왼쪽에 상당히 크고 인상적인 글씨가 새겨진 모형석각이 있다. 석각에는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고 적혀 있는데, ‘신선이 노닐던 이세상의 별천지 무릉, 너른 암만 샘이 솟는 바위에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이 열리네’ 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 도교와 불교사상이 결합되었다고 해야 하나. 


무릉계곡으로 가는 길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모형석각


모형석각 뒤로는 금란정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삼척지방 향교가 폐쇄되어 이에 분개한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다가, 해방 후 후배들이 이를 기념하여 1947년 북평동에 설립했다. 이후 1958년에 무릉계곡에 이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금란정 뒤로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무릉반석이 보인다.


무릉반석을 내려가 보니 한자로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이 보인다. 금란계원 40명의 명단과 금원갑원 25명의 명단이 보인다. 이 밖에도 수많은 계원과 갑원들의 명단들이 보인다. 금란계와 강희계 같은 유교강학 모임도 있지만, 대다수는 친목을 위한 동갑계 모임이라고. 주로 대한제국 시대 1900년대 이후 모임이고, 1960년에 새긴 향란계원의 명단도 있다고 한다. 


무릉반석 옆 금란정
무릉반석에 새겨진 금란계원 40명의 명단들과 수많은 이름들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의 원래 석각도 있다. 아직 무릉반석에 글자가 선명히 남아있지만 계속되는 침식으로 인해 글자가 마모되어서 금란정 앞에 모형석각을 만들었다. 무릉반석 전체를 볼 때 다른 글자들을 압도한다. 이 글자 밑에는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고 적혀 있는데 신미년 옥호거사가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옥호거사의 정체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가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에 재직할 때 이곳을 방문하여 썼다는 설, 다른 하나는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에 재직할 때(1751) 썼다는 설이다. 양사언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릉반석은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 초기까지 방문한 사람들의 명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릉계곡이라는 명칭은 조선 선조 삼척부사 김효원이 신선이 사는 곳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붙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두타산일기>라는 유람기도 남겼다. 하지만 무릉계곡 방문은 조선시대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고려 때 이승휴는 보광정기에 두타산을 여행한 기록을, 성류굴을 방문했던 이곡은 <진주 중대사 늙은 장로와 이별하다>는 시를 남겨 두타산과 중대사를 방문했음을 암시했다. 게다가 이승휴는 인생 말년 두타산에 거주했다. 그러면 두타산 계곡은 고려시대부터 명성이 이어진 걸까? 


무릉반석 위 옥호거사가 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


삼화사


무릉반석을 뒤로 하면 일주문이 하나 보인다. 두타산삼화사(頭陀山三和寺)라고 써져 있다. 다리를 지나니 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삼화사의 설립연도는 선덕여왕 때 자장이 7세기에 창건했다는 설과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8세기에 개창했다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무릉계곡과 두타산의 역사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범일국사가 개창했을 때 이름은 삼공사(三公寺)였는데, 이후 고려 태조 왕건 때 후삼국통일을 기리기 위해 삼화사로 고쳤다고 한다.


절에 들어가보니 옛 건물이 아닌 느낌이 확 들었다. 그 이유는 이전에 무릉계곡 입구에 있었던 옛 삼화사가 쌍용양회의 채광권에 편입이 되어 1977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고 보니 무릉계곡을 오기 전 쌍용양회 동해공장이 있었다. 하지만 삼화사의 옛 흔적이 남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적광전 앞에 있는 보물 제1277호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이다. 무릉계곡으로 삼화사가 이전될 때 석탑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석축 위 좁은 화단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1997년 5월에 오늘날 널찍한 마당으로 해체 복원하여 이전했는데, 해체복원 당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한다. 삼층석탑 양식을 분석하면 신라 하대인 9세기 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타산삼화사 일주문


보물 제1277호 동해 삼화사 삼층석탑. 뒤로 보이는 건물은 삼불상이 있는 적광전이다.


적광전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으로 세 가지의 불상이 있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것이 특이한데 철불이다. 보물 제1292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이다(이하 철불로 서술). 노사나불이면 이전에 불국사에서 봤던 비로자나불과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싸쥔 지권인(智拳印)이 아니다. 왼손은 무릎 위에서 하늘방향으로 손바닥을 펼치고 있고, 오른손은 우리에게 손바닥을 펼쳐서 뭔가 다르다. 철불도 위치를 이전하면서 작은 단칸 건물에 임시로 모셔지다가 석탑과 함께 1997년에 적광전으로 모셔졌는데, 모시기 1년 전 철불을 정밀조사하면서 뒷면에 많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고. 문자를 해석해보니 불상이 노사나불이고 주조연대를 860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고. 역시 통일신라의 유산이다. 


철불과 석탑외에도 삼화사에 매우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조선 태조 때부터 30년 간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거행했던 역사다. 조선시대 동해는 당시 삼척에 소속되어 있었다. 삼척과 조선 태조하면 기억나는 역사가…… 그렇다 삼척에서 공양왕 삼부자가 이성계의 개성 왕씨 몰살의 일환으로 교살된 것. 그래서 민심은 고려 왕씨 일원들을 죽인 이성계를 곱게 봐주지 않았다. 조선왕실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불교에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 그리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 빠짐없이 제도(普度)하는 수륙재를 활용했는데, 국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이뤄졌다고 해서 국행수륙재가 된 것이다. 즉 삼화사에서 공양왕 삼부자를 위로하는 수륙재를 열어 아직까지 불교를 믿던 당시 삼척사람들을 수습하려는 의도였던 것. 전통이 오늘날가지 600년 동안 이어져서 그런지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최근 심승구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후원으로 삼화사에서 국행수륙재가 거행된 것은 1395년부터 불과 6년 간 이라고 한다. 이후 오대산 상원사로 이전해서 24년 동안 지속하다가 1425년 상원사 화재로 폐지되었다고. 즉 공양왕을 위로하기 위해 조선왕조가 공식 후원하여 수륙재를 거행한 기간은 30년이었다는 것. 30년이 지나서야 삼척에서 공양왕의 비극이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고 조선 조정에서 판단했나보다. 이후 민간으로 전승되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국행수륙재는 10월 말에 거행한다. 단풍으로 물든 무릉계곡을 보는 겸해서 국행수륙재를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어떨까? 수륙재를 보기 전 삼척 공양왕릉을 먼저 보고 오는 것도 추천한다.


적광전의 삼불상. 가운데 불상은 보물 제1292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이다.
삼화사 적광전에서 바라본 두타산 줄기 산자락


쌍폭포와 용추폭포


삼화사를 나서고 계곡길을 다시 따라가기 시작했다. 계곡길 끝에 쌍폭포와 용추폭포가 있기 때문이다. 계곡을 계속 따라가보니 오른쪽으로 기암괴석이 장관인 곳이 나온다. 이름하여 학소대(鶴巢臺). 학소대라고 지은 이유는 상류의 동굴에서 시원하게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날씨가 건조한 겨울이라서 그런지 시원한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더운 여름날에 다시 와야 할까나?


학소대를 지나면 이제 20~30분 정도 더 가야 폭포가 나온다. 너무 빨리 폭포를 가려고 하지는 말자. 계곡 바위들을 보니 김효원이 이곳을 무릉도원과 같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병풍처럼 생긴 바위도 있고, 장군처럼 생긴 바위도 있다. 바위를 자연이 아닌 장인들이 10,000년의 전통을 이어 새긴 것 같은 기분이다. 아름다운 자연을 남기기 위해 단원 김홍도도 무릉계곡을 찾아 그림을 남겼다. 


학소대. 여름에 시원한 물줄기를 볼 수 있을까?
무릉계곡 병풍바위


이제 거의 다왔다는 푯말이 보인다. 동시에 이곳은 선녀탕이라고. 그런데 선녀들이 여기에서 내려와서 목욕할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바닥이 온통 나뭇잎으로 덮여 있다. 아무래도 날이 따뜻하고 나무에 잎이 돋아야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목욕하기에는 물이 아직까지는 차갑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폭포를 보기 위해 나섰다. 먼저 더 높은 곳에 있는 용추폭포를 보기로 했다. 여기는 과거에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폭포 이상으로 뭔가 영험한 기운이 있던 곳이 아니었을까? 사진에 나와 있는 물보다는 좀 적은 양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주위 바위와 함께 멋진 절경을 자랑한다. 


폭포를 바라볼 수 있는 다리에는 바위가 있는데, 역시 이곳을 방문한 사람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중 ‘순사 이광정, 부백 이인원’이 크게 새겨져 있는데. 순사는 관찰사를 뜻하고 부백은 삼척부사를 뜻한다. 예전에 성류굴에서 본 현령 이희호가 기억난다. 조선 후기 지역에 높은 사람이 명소를 방문할 때는 글자를 크고 깊게 새기는 게 유행이었나 보다. 폭포 앞 왼쪽 절벽에도 이름이 새겨 있는데, 동해시에서 3D로 분석한 결과 겸재 정선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냥 이곳을 유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릉계곡 용추폭포
용추폭포 앞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 '순사 이광정, 부백 이인원'이 또렷이 보인다.


용추폭포를 나와 사진작가들이 좋아하는 쌍폭포로 내려갔다. 쌍폭포가 유명해진 이유는 1박2일 폭포 특집 때 이승기가 이곳을 방문했기 때문.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져서 두 폭포를 만드는데, 이 폭포수는 선녀탕으로 이어져 동해시를 관통하는 전천으로 흐르게 된다. 아직 겨울이라서 그런지 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두타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아직까지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청옥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그래도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폭포수의 시원함을 느끼기 힘든 겨울이었지만 무릉계곡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명승지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무릉반석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계곡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름들이 한가득 새겨 있었다. 40여 년 전 무릉계곡으로 이전한 삼화사는 신라시대의 예술과 조선시대 공양왕의 원한을 풀어주는 국행수륙재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계곡 끝과 등정로가 시작하는 곳에는 용추폭포와 쌍폭포가 있는데 여름에는 시원함을 가을에는 단풍과 물의 조화로움을 선사한다.


올해 가을에는 코로나19가 좀 진정되길 기원하며 국행수륙재를 단풍과 함께 마스크 없이 봤으면 좋겠다. 10월 말이면 백신접종이 거의 완료되는 시점이다. 수륙재는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뿐만 아니라 산 사람들의 업장이 소멸되어 행복을 누리게 되는 중요 불교의례다. 기나긴 코로나19로 인내했던 이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10월 가을의 무릉계곡이 되길 바라며 계곡을 나섰다. 나도 여건이 되면 그 때 다시 찾아가고 싶다.


두타산과 청옥산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 쌍폭포. 왼쪽 두타산 물줄기는 얼어있고 오른쪽 청옥산 물줄기는 힘차게 흐르고 있다. 여름에 다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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