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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Feb 19. 2021

불국사 : 세 번째 여행

극락세계와 화장장엄세계로 가는 길


불국사.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중학교 수학여행 때로 기억하고, 두 번째는 12년 전 일본 친구와 같이 왔다. 두 번째까지 경이로운 건축물만 보기 위한 관광객으로 가서 그런지 좀 진지하지 못했다는 감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불국사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며 홀로 천천히 진지하게 살펴봤다. 지난 주 감은사지를 보고 불국사를 보니 연결고리가 어렴풋이 보인다.


부산포항고속도로를 타고 동경주 나들목에서 왼쪽으로 나온 후 불국사 표지판이 보일 때까지 쭉 가자. 표지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돌려서 계속 가면 불국사 관광안내소가 나온다. 불국사 입장료는 성인 1명 기준으로 6,000원이다.

     

청운교와 백운교

     

불국사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대성이다. 가난한 아이로 살다 죽었지만 부잣집 김문량의 아들로 환생한 아이, 사냥하다 죽은 곰을 위해 세운 절 장수사와 현세의 부모를 우해 지은 불국사. 일연 스님도 여러 사료를 보고 전설을 들어 김대성을 저술하는데 최선을 다했을 터.


하지만 불국사 규모를 보면, 삼국유사 이야기 이상으로 무언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김대성이 불국사를 지었을 때는 경덕왕 시절, 신라 문화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경덕왕 때 활동했던 스님은 표훈대사. 학자들은 불국사가 경덕왕, 표훈대사 그리고 김대성이 주관한 국가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하긴 불국(佛國)이라는 의미가 ‘부처의 나라’라는 의미니, 통일신라를 화엄정토로 구현하여 강력한 왕권을 과시한 경덕왕의 정치행위라고 하는 이도 있다. 혹은 삼국유사에서 나오듯이 후계자로 고민하던 경덕왕이 아들을 기원하기 위해 신라 전체를 부처께 나라를 바친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 두 가지 다 일수도 있다.


경덕왕이 절을 왜 지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불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자 읽지 못하는 신라인마저도 부처의 세계로 인도할 필요가 있었다. 학자들은 삼국유사에서 경덕왕의 아들을 상제께 기원했던 표훈대사가 경전을 바탕으로 절을 설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고 본다. 또한 표훈대사는 김대성에게 불경의 중요 내용들을 자세히 가르쳐 건물, 계단, 탑 등으로 연출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래야 글을 모르는 신라인이라도 불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니까. 김대성이 연출한 불국사의 흔적은 어찌 보면 서양 대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쓰임새와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불국사로 올라가는 계단들이 다시금 인상 깊게 보인다. 계단은 중앙에 하나, 왼쪽에 하나가 있는데, 중앙에 있는 계단이 청운교와 백운교다. 아래는 백운교 18계단, 위에는 청운교 16계단이 있다. 34단 계단에서 계단 하나를 제외하고 33개로 보는 이도 있는데, 이는 샤크로데반드라[모든 데바의 주인 샤크라라는 의미임. 우리말로는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함]가 사는 아마라바티(선견성:善見城)와 그 주위 동서남북 각 8개의 천성(天城)을 합친 33천, 즉 도리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도리천은 수미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를 연출한것이 자하문 왼쪽에 있는 수미범종각이다. 오늘날은 법고가 있는 범영루로 복원했는데, 학자들은 범종이 있었던 본래의 화려한 수미산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복원되지 않아 매우 안타까워하고 있다.

부처세계로 가는 길인 백운교와 청운교. 그 위 자하문
범영루. 원래는 수미범종각이다. 번뇌를 안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108명이 앉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만약 범종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걸려있었다면 어땠을까?
무지개문

그리고 청운교와 백운교 사이 왼쪽 아래를 보면, 무지개문이 있다. 무지개문은 백운, 청운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는 구름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길을 표현한 것.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면 자하문이 있는데, ‘자하(紫霞)’란 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자줏빛 안개라는 의미다. 자줏빛 안개 뒤로는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있다. 즉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은 세속세계에서 화장장엄세계, 즉 부처의 세계로 올라가는 길을 김대성이 신라 중생들을 위해 연출한 것.


청운교 백운교 양쪽에는 약 92m의 석축이 있는데, 바로 보물 제1745호 경주불국사 가구식 석축이다. 이전에는 이것의 가치를 몰라서 모른 채 지나갔지만, 이것도 신라시대의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서 이번에는 자세히 살펴봤다. 석축은 산지의 경사진 지형을 극복하고 평평한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지었다.


먼저 경사지를 두 개의 단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아랫단은 제각각 다른 크기의 자연석으로 꽉 채웠다. 그런데 그 위에 직사각형 구조인 장대석을 보면 놀라운데, 장대석을 위해 자연석을 깎은 게 아니라 오히려 장대석을 자연석에 맞추어 깎았다. 목조건축에서는 이를 그렝이 기법이라고 하는데 다른 나라 건축에서 찾기 매우 힘들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 구조가 지진과 같은 외부 충격을 완화시킨다고. 신라 시대에도 내진설계를 적용한 걸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기술과 예술의 조화다. 아래 불규칙하게 놓여져 있는 자연석과 달리 장대석 윗단은 돌을 다듬어서 가지런히 쌓았다. 자연미에서 인공미로 변화해서 그런지 석축을 볼 때 체계있고 지루하지가 않다. 어떤 이는 자연석과 인공석을 층별로 구성한 이유가 번뇌로 가득한 세속 세계와 완전한 부처 세계를 대조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백운교 청운교 주변 가구식 석축.


극락전으로 가는 길


그러면 서쪽의 극락전은 무엇일까? 이는 정토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한자를 몰랐던 신라 중생들은 불경을 읽고 수도하는 것이 불가했을 것이다. 한국사 시간에 우리는 원효가 신라 불교를 대중화하는데 어마어마한 역할을 했다고 배운다. 바로 한자를 몰랐던 중생들에게 나무아비타불을 외우고 부처님 믿으면 즐거움이 가득한 서방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표현 한 것이 연화교와 칠보교고 바로 극락정토로 가는 길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서쪽에 계단이 있는 것이다.


연화교는 10단이고 위에 연꽃잎을 새겼다. 연꽃잎은 아미타불의 전생 법장보살이 일체중생을 모두 성불시키겠다는 각오를 세웠던 48개 서원 중 제18원과 관련이 있다. 제18원은 바로, “어떤 중생이든지 지극한 마음으로 내 불국토를 믿고 좋아하여 와서 태어나려는 이는 내 이름을 열 번만 불러도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는 내용. 이에 따라 염불을 하면 연꽃 속에 품어져 극락으로 간다.


극락으로 갈 때 연못을 건너는데, 여기에 있는 연못은 일곱 보석으로 이뤄져 있다. 한자 칠보(七寶)의 의미다. 이 연못은 8가지 공덕을 갖춘 물로 차 있다. 바로 이를 표현하기 위해 칠보교가 8단으로 되어 있다. 이곳을 거치면 안양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안양(安養)은 극락의 산스크리트어인 수카바티(सुखावती)의 또 다른 한자 번역말이다. 아, 그리고 연화교와 칠보교 사이에도 문이 있다. 하지만 청운교, 백운교와 달리 무지개가 없다. 그 이유는 극락은 부처가 있는 세계와 달리 하늘을 거치지 않는 서쪽멀리 있는 정토이기 때문. 그래서 그런지 수미산 종각 왼쪽부터는 연화교 칠보교 주변의 석축과 달리 모두 가지런히 쌓여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 안양문 주변 석축을 자세히 보면 백운교, 청운교 것과는 다른 구조다
안양교 아래 문. 무지개문 구조와 달리 직사각형에 가깝다.

연화교와 칠보교 사이의 네모난 문과 백운교와 청운교 사이의 무지개문 사이에는 물이 흘렀다고 한다. 18세기까지 백운교와 청운교 앞마당에 연못이 있었다. 이름은 구품연지. 원래 토함산 정상에서 발원한 지하수가 무설전 옹벽에서 솟아 대웅전 아래로 물이 흘러 구품연지에 다다랐다고. 하지만 불국사가 쇠락하며 연못에 퇴적물이 쌓여서 크기가 작아졌고, 1972년 불국사 복원 때는 관광객 동선이 방해된다는 이유로 연지의 복원이 무산되었다. 구품연지는 수미범종각과 함께 부처의 세계와 극락정토를 구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불국사 무대 장치인데 당시 정부가 이를 무시한 걸 보면 안타깝다.


불자가 아닌 사람인지라, 나는 당시 신라의 일반중생들의 마음으로 극락전으로 먼저 향했다.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750년에 다시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에서 국보 제27호인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불상을 봤을 때 이런 느낌이 들었다. 자비로운 얼굴로 왼손바닥을 보이며 부처의 세계로 가고 싶은 중생들을 내가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설법하는 것이 아닐지? 한자를 읽지 못했던 신라인들이 아미타불을 봤을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 삶이 힘들긴 하지만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착하게만 살면 극락으로 가서 아미타불에도움을 받아서 부처에게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불국사 극락전. 극락전 오른쪽에 보이는 계단이 화장장엄세계와 연결된 48대원교다.
국보 제27호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 또 계단이 나오는데, 16계단이 3열로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이름은 48대원교. 위에 있는 법장보살의 48개 서원과 관계가 있다. 계단의 3열은 삼배중생을 말하는데, 극락에서 왕생하는 사람을 상중하로 나눈 것. 즉 서방정토 극락은 중생들의 종착점이 아니다. 여기서 또 수행하고 정진해야 부처님이 계시는 화장장엄세계로 갈 수 있다.


화장장엄세계에서 보는 다보탑과 석가탑


48대원교의 도움을 받아 부처님이 계신 화장장엄세계로 향했다. 화장장엄세계 중앙에는 석가여래부처를 모신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탑이 두 개 놓여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걸 기준으로 왼쪽으로 다보탑, 오른쪽으로 석가탑이 있다. 아 감은사지가 생각난다. 감은사지 앞에는 쌍탑이 있고, 쌍탑 뒤 가운데에 석등이 놓여 있다. 석등 뒤에는 금당터, 금당터 뒤에는 강당터가 있다.


불국사 본당 구조도 비슷하다. 자하문을 지나면 석가탑과 다보탑, 두 탑 뒤 가운데에 석등이 있다. 석등 뒤는 석가모니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 대웅전 바로 뒤에는 무설전이 마주하고 있다. 바로 설법을 전파하는 강당이다. 나처럼 불교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삼국시대 사찰구조를 책으로 공부하려면 머리가 복잡해져서 손이 안 간다. 하지만 감은사지와 비교해보니 이전보다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신라 폐사지터들을 눈으로 본 다음, 관련 책을 읽어서 신라 사찰구조와 신라인들의 불교신앙을 더 공부해야겠다.


불국사 대웅전. 대웅전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765년에 재건되었다.


하지만, 감은사지와 중요하게 차이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다보탑과 석가탑. 현진건의 <불국사 기행> 문구가 생각난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 미인(盛裝美人)(진한 화장을 한 미인)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 미인(淡粧美人)(소박한 화장을 한 미인)이라 할까?”


김대성은 불국사의 쌍탑가람 구조를 법화경에 맞춰서 설계했다. 석가탑은 말 그대로 ‘현재의 부처’인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다보탑은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를 상징한다. 그럼 다보탑과 석가탑이 말해주려고 하는 건 무엇일까? 묘법연화경 제4권 11 견보탑품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그 때 부처님 앞에 일곱 가지 보물로 이뤄진 탑이 하나 있었으니, 높이는 5백 유순이요 너비는 250유순으로, 이 탑은 땅으로부터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가지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으며, 5천의 난간과 천만의 방이 있으며, 한량 없이 많은 당번을 장엄하게 꾸미고, 보배 영락을 드리우고 보배 방울을 또 그 위에 수없이 달았으며, 그 사면에는 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栴檀香)을 피워 향기가 세계에 가득하고, 모든 번개(幡蓋)는 금ㆍ은ㆍ유리ㆍ차거ㆍ마노ㆍ진주ㆍ매괴 등 일곱가지 보물을 모아 이루니, 그 탑의 꼭대기는 사천왕궁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일곱 가지 보물로 이뤄진 탑이 큰 음성으로 석가모니께서 하시는 설은 모두 진실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요설이라는 보살이 부처님께 왜 탑이 솟아났고 그와 같은 음성이 나오는지 물었는데, 석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보배탑 가운데는 여래의 전신이 계심과 같나니, 오랜 과거에 동방으로 한량없는 천 만억 아승기 세계를 지나서 보정(寶淨)이라 하는 나라가 있었으며 그 나라에 부처님께서 계셨으니, 그 이름이 다보(多寶)였느니라. 그 부처님께서 보살도를 행하실 때 큰 서원을 세우셨느니라.”


즉 석가가 영축산에서 묘법법화경을 설하고 있을 때, 과거의 부처인 다보여래가 이를 듣고 일곱가지 보물로 된 탑으로 분했다. 그리고 다보여래가 석가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응답한 것. 다보탑은 묘법연화경에서 나오는 일곱 가지 보석으로 이뤄진 탑과 다보여래를 김대성이 한자를 모르는 신라 중생들을 위해 화려하게 연출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묘법연화경을 설하고 있는 석가를 석가탑으로 연출했다. 성장미인의 다보여래와 담장미인의 석가가 영축산에서 함께 있는 장면이다.


다보탑과 석가탑: 과거의 부처와 현재의 부처
다보탑
석가탑

하지만 화려했던 다보탑은 일제강점기 때 심하게 수난을 당했다. 1925년 일본인들이 탑을 해체하고 보수할 때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또한 돌사자 세 마리와 탑 안에 있던 사리정엄구가 일제에 의해 약탈당하는 수난을 당했다. 현진건은 사자상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에 손에 들어갔는데 숨기지 않고 내어놓지 않아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영국 런던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단서를 가지고도 오늘날까지 돌사자들을 찾지 못했으니 너무나 통탄스럽다.


석가탑도 광복이후 도굴꾼에 의해 수난을 당할 뻔했다. 1966년 도굴꾼들이 탑 안에 있는 사리장엄구를 훔치려고 했던 것. 이에 따라 정부에서 해체, 보수작업을 진행했는데, 2층 지붕돌을 들어 올리다가, 아래에 있던 3층 지붕돌 위에 비스듬히 떨어지며 큰 상처를 내고 말았다. 깨진 이유는 석가탑을 해체할 때 쓴 도구가 고작 썩은 나무 전봇대와 장대였기 때문이다. 도굴꾼이 사용했던 장비인 10톤짜리 잭과 비교하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 뿐만 아니라 사리장엄구에 있던 사리병이 한 스님의 실수로 깨진 것. 이는 다시 간신히 붙여진 채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김대성이 하늘에서 이를 보고 있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묘법연화경을 쉽게 중생들에게 말해주기 위해 어렵게 만든 두 탑이다. 신라가 경계했던 일본에게 임진왜란과 국권강탈이라는 수난을 당한 것도 모자라, 1,200년 후 자신들의 후손들이 재물에 눈이 먼 모습을 보고 눈이 여러 번 뒤집혔을 거다. 게다가 정부에서는 구품연지를 관광객 동선 편의라는 이유로 정부 멋대로 복원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김대성의 뜻을 크게 망가뜨린 잘못을 저지른 채로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그의 흔적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불국사 석축,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 다보탑, 석가탑, 불국사 기존 건물들의 주춧돌, 극락전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강당 뒤편비로전에 있는 국보 제26호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그리고 사찰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 신라 수세식 화장실유구 등이다.


수많은 국난 속에서 하늘은 김대성과 신라인들의 불심을 생각해서라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불국사의 뼈대를 남겨주었다. 불국사 재건과 석탑의 보수는 실수투성이로 가득했지만, 어쩌면 김대성의 헌신으로 남긴 뼈대로 인해 불국사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신라 중생들을 생불시키기 위해 연출했던 불국토를 우리가 수호해야 할 것이다. 극락에서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남은 금동아미타여래를 위해서라도.


국보 제26호 금동비로나자불좌상
신라시대 화장실 유구와 석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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