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지. 오늘날 이곳에는 쌍탑, 주춧돌, 금당 돌마루, 그리고 회랑만이 남아있다. 근처에는 이견대와 문무대왕릉이 있어, 다들 문무왕의 유지가 깃든 곳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감은사로 신라 왕실과 우리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왜 동해 용왕이 되어 신라를 지키려고 했을까? 오늘날까지 감은사에 남은 흔적들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문무대왕의 흔적을 찾기 위해 나는 부산포항고속도로를 타고 감은사지로 향했다.
감은사지
부산포항고속도로에서 동경주 나들목에서 내린 다음 14번 국도에서 오른쪽으로 쭉 가자. 그러면 929번 지방도가 나오는데, 계속 곧장 가면 감은사지 표지판이 나온다. 예전에 감은사지 기행문들을 보면 경주 토함산에서 고불고불한 언덕길을 넘어야 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장대터널로 길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더 다가가기 쉬워졌다.
감은사지에 도착하면 거대한 두 탑이 나를 반겨준다. 바로 국보 112호 감은사지 3층 석탑이다. 눈앞에서 보니 사진과 달리 상당히 거대한 규모였다. 내가 봤던 석가탑보다도 규모가 커 스스로 압도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뭔가 투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석가탑이 8세기 중반에 완공되었다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고, 감은사는 삼국유사에서 신문왕 원년(681)에 창건되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럼 감은사 쌍탑은 석가탑의 120년 전 시제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쌍탑이 도굴당하지 않고 사리장엄구를 오늘날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오래된 석탑은 사리장엄구가 도굴되어 파괴된 것이 많은데, 이 쌍탑은 해를 입지 않은 그대로 오늘날까지 1,300년 동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석탑 윗부분에 철 막대기만 남고 장식 돌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로 갈라져서 살아진 것이 아쉬울 뿐이다.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국보 제112호
그럼 문무왕이 왜 감은사를 착공한 것인가? 대다수 학자들은 삼국통일 후 고구려, 백제, 신라 유민들을 통합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한다. 특히 백제는 건축과 석조 기술이 뛰어났는데, 이는 선덕여왕 시절 황룡사 9층 목탑을 지은 사람 중 아비지라는 백제의 장인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감은사지 삼층석탑도 백제 석공의 영향이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삼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5층 석탑에서 발견된 돌못이 비슷해서다.
두 탑을 뒤로하면 금당이 나온다.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부처님을 모신 곳이 아니었나는 추측을 해본다. 그런데 금당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바로 돌마루 아래에 기초가 있고, 기초 아래에는 공간이 있다는 것. 왜 공간이 있을까? 삼국유사 기이 제2 만파식적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며,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聖考)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으로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와서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했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하였다)."
즉 금당 아래의 공간은 죽어서 동해 용왕이 된 문무왕이 머물 수 있게 만든 곳이다. 삼국사기에서 통일 전 신라가 왜군 침입에 계속 시달렸다는 기록들이 수없이 나온다. 통일 후 신라의 평화를 위해서인가. 문무왕은 유언으로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 용왕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죽어서도 용왕으로 분해 금당 용마루 아래로 내려와 이전에 섬겼던 부처님께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감은사 금당터. 돌마루 아래에 동해용왕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었다.
감은사 회랑 흔적
그리고 삼국유사에서 왜 대왕암과 이견대를 감은사와 같이 언급했을까? 감은사지 앞은 현재 논밭으로 이뤄져 있는데, 해당 지역에서 토양을 분석한 결과 감은사 바로 앞까지 동해바다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서히 감은사지 앞에 흙이 쌓이면서 동해가 점점 멀어져 오늘처럼 되었다고. 즉 신라시절 대왕암, 이견대, 감은사는 동해로 연결되어 있었고, 셋 다 동해용 문무대왕이 자유롭게 다니게 하기 위한, 좀 더 이성적으로 말하면 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한 국가 특수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감은사에 회랑 흔적이 남아있었다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등급이 높은 절에만 회랑을 설치했으니까.
이런 사실을 알고 보니 감은사가 더 놀랍게 느껴진다. 백제, 고구려, 당나라와의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던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오늘날까지 감은사지에 남았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감은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문무왕의 호국정신은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고려를 지킨 강감찬, 900여 년 후 왜군으로부터 조선을 지킨 이순신, 권율, 김시민과 의병들, 일제 지배에서 벗어나 대한독립을 외친 3·1운동의 만세꾼들과 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4·19혁명을 일으킨 고등학생들을 거쳐 오늘날 코로나19를 막으려는 시민들로 이어졌다. 나라가 어려울 때 이웃과 서로 힘을 합쳐서 이겨내라는 말씀이 문무왕이 감은사를 통해 남기고 싶은 말씀이었으리라.
이견대
감은사지에서 929번 지방도로 돌아가자.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이견대, 오른쪽으로 가면 문무대왕릉이 나온다. 먼저 이견대로 갔다. 여기에서 신문왕이 동해 용왕이 된 문무왕을 봤다고 한다. 누각에서 정면을 향하면, 문무대왕릉이 보인다. 완전히 푸른 하늘은 아니었지만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 자주 와서 아버지를 기리고 어떻게 유지를 받들지 고민을 많이 했을 터.
그런데 오늘날 지어진 이견대는 신라시대 건물이 아니다. 1970년 이곳을 발굴지로 추정한 후 197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당시 이견대를 조사한 황수영 박사는 여기서 500m 떨어진 산 중턱에 이견대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 박사는 폐교 건물(전 대본초등학교) 뒤 산 중턱에서 신라 시대 기왓조각과 축성 흔적을 발견했다. 오늘날 이견대가 세워진 곳은 축성 흔적이 없어서 조선시대 역원(驛院)터로 추정할 수 있는데 당시 박사가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다고. 안타깝게도 황 박사는 2011년 타계했는데, 황 박사의 주장이 옳다면 학자들과 지역사학자들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견대
이견대 앞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삼국유사에 신문왕 2년(682) 5월 7일에 이견대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신을 보내 살펴보니 그는 이견대가 있는 산은 거북 머리처럼 생겼고, 거북 머리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고 말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7일 동안 날이 어두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파도가 잠잠해졌는데, 용 한 마리가 나타나 "대나무를 베어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고 했다. 궁궐로 돌아가 피리를 만들어 보관했는데, 모든 국가의 근심이 사라져서 피리를 국보 삼아 만파식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만파식적 이야기. 이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유지를 이어가는 일이 아들 신문왕에게는 쉽지 않았을 터. 아버지를 이어 왕권을 강화하여 통일신라의 행정 기틀을 마련하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통합해야 했는데, 하필 왕위에 오르자마자 장인 김흠돌이 모반을 일으킨다(681년 8월). 최측근의 반란으로 신문왕의 머리가 상당히 복잡했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장인과 그 세력을 숙청했는지는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반란을 진압한 후 궁궐과 관리들의 기강을 잡고 9주 5소경을 완성하여 지방행정을 강화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만파식적이 말하는 게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내용이 모두 옳다면, 신문왕은 장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아버지의 흔적이 남은 대왕암을 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전 업적을 다시금 생각하며, 어떻게 아버지처럼 통치를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으리라. 만파식적은 신문왕이 이를 고민하다 얻은 답이 아닐까? 동해 용왕의 바람과 신문왕의 깨달음이 통해서인지, 신라는 신문왕 손자 경덕왕이 승하하는 760년까지 전성기를 구가한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불국사, 석굴암을 경덕왕 때 완성했으니까. 게다가 국어시간에 배운 월명사, 충담사의 향가도 이때 등장한다.
요즘 코로나19로 내가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작년에 요르단에서 돌아온 후 이 난리 중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으니까. 하지만 신문왕과 달리 부모님 두 분 모두 살아계셔서 어려운 와중에 내게 용기를 주셔서 감사했다. 그래서 코로나19 와중에 한국사능력시험 1급도 따고, 관광통역안내사 시험도 합격했다. 관광업이 아직까지 어렵긴 하지만 신문왕처럼 마음을 잡고 코로나19가 끝나면 어떻게 좋은 관광안내사가 될지 항상 생각해봐야겠다. 코로나19가 끝날 때까지 우리나라 관광지를 방역수칙을 지키며 탐사하고 관광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문무대왕릉
이견대에서 왼쪽으로 나와 곧장 가면, 봉길해수욕장이 나온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 바로 문무대왕릉이 있다. 큰 바위들로 가득한 울산 대왕암 공원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다. 하지만 규모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법.
원래 문무대왕릉은 오래전부터 신성했던 지역이라 해녀들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해수욕장과 상점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데, 동해 용왕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평화로운 우리들을 보고 반가워하실까? 아니면 신성한 공간을 우리가 마음대로 개발해서 노하셨을까? 아니면 근처에 월성원전이 있어서 동해 용왕이 방사선 사고도 막고 계신건 아닐지?
문무대왕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해방 후, 1967년에 정영호 교수 일행이 대왕암을 조사했다. 조사한 후 일행은 바위 아래에 문무대왕 유골과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긴 삼국유사에 왕의 유언에 따라 대왕암에 뼈를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하지만 34년 후에 다시 조사해보니 그런 공간조차 없었다. 다만 <삼국사기> 문무왕 하에 다음과 같이 써 있다.
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내가)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인도)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
즉 왕의 분부대로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뼈를 간 후 가족들이 유골을 어디선가 뿌렸을 것이다. 그다음 문무대왕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대왕릉을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신라 왕실이 문무대왕릉이 정비되기 전 바위에 올라 대왕의 유골을 뿌려 장례를 치르고 장인들이 바위를 정비하여 추모공간으로 남겨놓았을 수도 있다. 대왕의 장례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무왕은 스스로 화장을 이행하여 백성들 앞에서 불교신앙의 모범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문무왕 이후 7명의 왕이 화장을 했고 귀족들도 이를 따랐다는 내용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문무왕은 계속된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의 어려움을 줄이고자 간소한 장례를 원했을 것이다.
대왕릉을 위에서 바라본 사진을 보니 중간 돌 위아래로 십자형의 물길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서쪽 수로를 깎은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바닷물이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흐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감은사지처럼 동해 용이 동에서 잘 들어와서 서로 빠져나가게끔 설계했을 수도 있겠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바위에도 옛사람이 정으로 깎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다수 학자들이 여기가 바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대왕암으로 인정한다.
봉길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무속인들이 기도하는 곳
월성원전으로 더 가다 보면 또 다른 바위들이 있는 곳이 나온다. 바위 주변을 보니 어떤 절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사람들을 데려온 것 같다. 그리고 무속인이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예부터 문무대왕릉은 속된 말로 기도발이 잘 먹히는 곳이라고 하더라. 실제로 무당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돗자리를 깔고 의식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밤에는 용왕제를 지낸다고도 한다. 정월대보름에는 전국 무당들이 이곳에 다 모여 굿판으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현대 문명이 발전하더라도, 확실하지 않은 내일로 인해 우리 마음이 불안한 것은 신문왕이 장인의 반란을 진압한 후 여기를 찾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같으리라.
문무대왕이 나라와 백성을 사랑했던 마음과 신라 왕실의 깊은 불심을 다시금 볼 수 있었던 대왕릉이었다. 동해 용은 오늘까지도 대왕암, 이견대와 감은사를 자유롭게 돌아다녀 나라를 지키며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을지? 문무대왕암을 떠나면서 이렇게 기원해본다. 우리 국민들이 코로나19에서 벗어나 만파식적 피리소리와 같은 평화를 얻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