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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an 29. 2021

울기등대와 대왕암공원

염포, 울기등대, 현대중공업과 대왕암

대왕암으로 가는 길 - 염포와 울기등대

     

태화강 국가정원에서 태화루 혹은 동강병원 방향으로 나와 104번 버스를 타면 대왕암공원으로 갈 수 있다. 중간에 동천교를 건너면 염포(鹽浦)라는 비석이 보인다. 염포하면 세종대왕이 1426년 일본에 개방한 세 항구 중 하나다. 그 세 항구는 부산포, 염포, 제포. 국사수업을 잘 들었으면 익숙한 이름이다. 일본인 무역업자들이 머물 왜관도 조선 조정에서 설치했다. 1510년 삼포왜란이 발생해 왜관이 폐쇄될 때까지 염포에 약 15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태화루가 삼국시대, 염포는 조선 초기 울산의 대외무역을 상징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염포는 한자이름 그대로 염전이 가득한 포구였다. 소금 생산은 울산이 본격적으로 공업도시로 변하기 전까지도 주요산업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공업화 이전까지 영남지방 전체를 책임졌던 소금이라 울산에 소금 거상들과 염전부자들이 여럿 있었다고. 공업화 이후로 염포 일대 염전들이 사라졌지만, 이곳에 새로 들어선 현대자동차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그리고 일산해수욕장을 지나 버스가 대왕암공원으로 향한다. 버스에서 내려 입구로 향하니 HI 2021이라는 문구와 No코로나 마스크를 쓴 용이 나를 맞아준다. 통로로 향하면 겨울이어서 그런지 앙상한 가지들로 이뤄진 나무들 밖에 없다. 하지만 4월 초봄에는 울산의 벚꽃명소가 된다. 작년에는 코로나19로 전국의 벚꽃축제가 중단되었는데, 올해는 다시 열 수 있을지? 용이 쓴 마스크 문구 그대로 올 봄에는 모든 국민들이 No코로나로 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NO코로나 마스크를 쓴 용
울기등대 구 등탑
울기등대 신 등탑. 주변 소나무를 압도한다.

입구에서 큰 길을 따라 들어가면 두 하얀 기둥을 볼 수가 있다. 바로 울기등대다.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 때 수 만km를 달려오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침하기 위해 이곳에 목조로 만든 등간을 세우게 된다. 실제로 등대의 효과가 탁월했는지, 일본군은 러시아 발틱함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일본의 전쟁 승리로 1905년 을사늑약이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에 등대를 바라보면 마음이 안타깝다. 이후 1910년에 등간을 철거하고 콘크리트형 등대를 설립한 게 울기등대 구 등탑이다. 아쉽게도 입장시간이 시간이 지나 울기등대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없었다. 다음에 오기로 다짐하고 사진을 남겼다.


울기등대 주변에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어 울산 주민들의 휴식처가 된다. 하지만 100년 전에는 역할이 달랐다. 바로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등대주변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며 소나무를 심은 것. 소나무는 당시 방어진 주민들로부터 자신의 군사기밀을 보호하기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일제 만행에 대한 하늘의 벌인가, 해방 후에는 오히려 나무가 자라서 일본이 만든 구 등대를 가려버렸다. 그래서 1987년에 대한민국의 손으로 24m의 새로운 등대를 세웠다. 울기등대와 소나무숲은 울산 방어진의 굴곡진 근현대사를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왕암의 진실


울기등대를 지나서 대왕암공원으로 향했다. 문무대왕비가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기 위해, 바위섬 주변에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하지만 경주 문무대왕릉과 달리 울산 대왕암은 말 그대로 ‘구전’로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경주 문무대왕릉은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7 문무왕 하에 기록이 되어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된다. 게다가 오늘날 문무대왕암 주변에 삼국유사에 나오는 감은사지와 이견대 터가 남아있다는 것도 기록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문무대왕비의 최후에 관한 기록은 아쉽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여기를 ‘댕바위’라고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는 용이 승천하다가 그 바위에 떨어져 죽어서 붙여진 이름인 ‘용추암(龍墜岩)’이라고도 하는데, 용이 죽어 피를 남겨서 바위가 붉은 색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용, 대왕, 바다와의 관계로 볼 때, 이곳은 문무대왕비와 관련된 유적이 아니라 동해의 바다신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동해 바다신을 기리는 지명이라면 이곳에서 용왕님께 제를 지내는 의식이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더 일리가 있다. 즉 원래 우리전통인 대왕신앙의 현장을 누군가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나오는 문무왕의 최후 이야기를 문무왕비로 변형하여 혼합했다.


그래서 대왕암공원을 감상할 때에는 역사적인 요소로 깊게 들어가지 않고 신비로운 풍경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모양새가 특이하여 댕바위 뿐만 아니라 넙디기, 사근방, 고이, 탕건암, 할미바위 등이 이곳에 있으니까. 각 바위에 대한 전설도 있는데 역시 재미있는 구전으로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지리학자들이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지형이 형성되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흥미로운 주제일 것 같다. 만약 기존 지리학 연구결과가 있다면 그에 대한 설명을 관광표지에 붙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또한 몇 백 년 후 후손들도 아름다운 풍경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대왕암공원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대왕암 깊은 곳까지 다가가고 싶었지만 차가운 겨울기온과 심한 바람으로 인해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 대왕암공원을 방문하고 싶다면 벚꽃이 피는 4월 초 혹은 여름철 밤 해질녘에 오는 것을 추천한다. 오후 5~6시쯤 해가 지는 풍경을 본 다음 공원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7~8시쯤에 다시 와서 야경을 보면 금상첨화다. 특히 여름철 짜증나는 열대야를 해소하는 데 대왕암공원만한 곳이 없다. 게다가 8월 1일부터 새로 생기는 출렁다리도 즐길 수 있으니.

대왕암 바위와 다리들
넙디기. 오른쪽 멀리 현대중공업이 보인다
거북바위

대왕암을 나서 넙디기 쪽을 바라보니 건너편에 불빛이 가득했다. 바로 현대중공업이다. 현대중공업을 보며 울기등대 주변의 역사를 다시 짚어보았다. 울기등대 남서쪽에는 방어진(方魚津)이 있는데 방어가 많이 잡히는 고장이라는 곳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방어진과 대왕암공원 일대에는 방어를 잡는 어민 뿐만 아니라 말 목장도 있었다. 이 목장은 조정에서 군마확보를 위해 운영한 곳이었다. 대왕암 서쪽편 남목동(南牧洞)이라는 지명이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 칙령에 따라 말목장이 문을 닫았다. 목장이 있었다는 흔적은 조선 시절 말이 도망가는 것을 방지했던 울산 마성유적과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나오는 <부산염포지도>로 증명할 수 있다.


이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와서 대왕암 일대에 울기등대를 설치하고 해군기지를 조성한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 게다가 일본인 어부들이 방어진에 거주하여 어업권을 장악한 슬픈 역사가 있다. 광복 후에는 다시 우리 손으로 대왕암 일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먼저 장생포와 함께 고래잡이에 나섰다. 그러다가 현대가 대왕암 건너 조선업을, 조선시대 일본인들이 거류했던 염포에서 자동차 생산을 시작했다. 현대가 들어오며 고래잡이가 중단되었지만, 방어진은 오늘날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공업지역이 되었다. 현대중공업이 세워지고 대왕암 주변 소나무가 자란 후, 우리기술로 새로운 울기등대를 세우고 대왕암을 울산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대왕암 문무왕비 전설은 사실 와전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울산방어진 사람들의 세월 풍파를 간직한 채 기암괴석의 있는 모습 그대로 오늘날 시민들에게 다가왔다고. 큰 바위 사이로 다리로 연결했다고 자연미가 떨어졌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래도 방어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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