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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an 23. 2021

태화강 - 어제와 오늘

울산 역사를 간직한 태화루와 십리대숲

태화강은 울산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오늘날 울산시민들과 기업들의 생명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태화강은 학자들과 문인들의 찬사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울산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수질오염이 심해졌고, 90년대 들어서 태화강 물고기의 떼죽음을 지역 아니 전국뉴스에서 자주 보도했다.


오늘날 태화강은 울산시민들의 주요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했다. 201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국가정원으로 선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울산광역시와 환경단체들의 정책개발과 지속적인 노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굴곡진 역사가 있는 태화강의 발자취를 알아보기 위해 노포동역에서 울산 1147번 버스를 타고 태화강 국가정원으로 향했다.

     

태화루

     

요즘 7번 국도가 노포동터미널부터 울산 문수경기장까지 자동차 전용도로여서, 1147번 버스로 터미널에서 울산시내까지 가기가 쉬워졌다. 50분 정도 지나 태화루 앞에서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누각에 올라갔는데, 때가 덜 탄 걸로 보아 최근에 지어진 것 같았다. 신발을 벗고 태화루에 올라가면 강 전경을 볼 수 있는데, 한파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강이 얼어있었다. 또한 겨울철이라 노란색 갈대들로 가득했는데, 꽃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려면 5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늘날 태화루는 2011년 9월에 착공하여 2014년에 복원하였다. 복원하는데 든 비용은 모두 507억원이고, S-OIL이 누각건립비 100억원을 사회공헌사업으로 기부했다. 복원하기 전에는 로얄예식장이 있었다고 한다. 전통기와와 근대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건물이었는데, 절경이 좋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당시 울산 신랑신부들의 소원이었다고. 울산시의 부지보상절차가 진행된 이후, 21년의 역사를 가진 예식장은 결혼식을 올렸던 부부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럼 복원 전 역사는 어땠을까? 태화루의 유래는 신라 선덕여왕(642)까지 올라가야 한다. 주인공은 당시 고승이었던 자장율사. 자장이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 중국 산둥반도 오대산 주변 태화지를 지났다. 그 때 어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국에 어떤 어려움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장은 “북쪽의 말갈, 남쪽의 왜국 그리고 고구려, 백제가 끊임없이 침범해서 백성들의 근심거리가 되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어떻게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신인은 “황룡사로 가서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이 항복하여 나라가 태평할 것이고, 경주 남쪽에 절을 지으면 내가 덕을 갚겠다”고 말한 후 사라졌다. 자장은 태화지에서 만났던 신인을 위해 경주 남쪽 오늘날 울산 중구 황모산일대에 절을 지었는데, 이것이 태화사다. 그리고 절 내에 설립된 누각이 태화루다. 자장이 덕을 쌓아서 그런지, 절을 설립한지 30여년이 지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황금기를 맞이한다. 통일 후에도 신인의 축복이 계속되었는지, 울산은 아랍세계까지 교류하는 국제항으로도 명성을 누렸다. 신라의 국제관문인 태화루를 보고 지나간 아랍상인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2010년 태화루 복원을 후원한 사람도 나세르 알 마하셔 S-OIL 사장이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다. 1,000년을 뛰어넘어 조상과 인연을 이어 간 게 아닐지?


복원된 태화루

이후 태화사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화루는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명성을 이어갔다. 먼저 고려 제6대 임금 성종이 재위 마지막 해인 997년 9월에 울산 태화루를 방문하여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었다. 고려 성종은 수능 한국사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단골로 출제된다. 기억나는 키워드는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그에 따른 10도와 12목 설치. 10도와 12목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고려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호족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행정조직이다. 당시 울산은 영동도에 속했다. 성종은 영동도의 주요지역인 옛 수도 경주와 울산지역 호족의 충성을 확인하기 위해 태화루를 방문한 것이다. 이는 옛 신라 중심지가 고려에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성종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과 학자들이 임진왜란 전까지 태화루를 방문했다. 고려시대에는 핍박받는 농민들을 시로 표현한 김극기, 울주에 유배되었던 정포가, 조선시대에는 초기개국공신인 권근과 수양대군의 측근이자 경국대전 및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에 참여한 서거정이 방문하였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방문했는데, 이들이 태화루에서 남긴 시는 무려 107편이나 된다고.


고려와 조선 문인들이 사랑했던 태화루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산은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장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을 일본군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했기 때문. 함경도까지 진격했던 가토는 조·명 연합군의 반격으로 인해 다시금 울산에 고립되는데, 1598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의 교두보를 제거하고자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울산성 전투. 처음에는 조·명 연합군이 우세를 점하다가 일본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격파당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패배한 전투지만 조선, 명, 일본 군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줬다.


하지만 전쟁의 수난에서 가장 고통받은 이들은 울산의 평민들이었다. 일본군이 평민들을 강제로 왜성건축 노역에 투입했을 뿐만 아니라, 평민들이 생산한 식량 및 군수품도 일본군에게 다 바쳐야 했을 터. 기술이 좋은 장인들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겠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태화루는 치열한 전장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피폐했던 평민들을 대변해주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전쟁은 끝났지만 울산 평민들에게 후유증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100여 년 전에는 일제강점기였고, 70년 전에는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인가, 태화루가 복원되는 데는 무려 400년의 세월이 걸렸다.


화려한 영광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복원된 태화루는 21세기 울산 시민들의 문화공간이다. 태화루를 나와 국가정원으로 향하면 자장법사가 용의 복을 빌고 신라의 번창을 기원한 용금소가 나오는데, 거기서 태화루를 바라보면 상당히 운치있다. 다만 꽁꽁 언 태화강만 봐서 아쉬움이 있었다. 올 늦봄이나 초가을 밤 다시 태화루에 올라가서 울산 시내 야경을 감상한 다음, 용금소에서 태화루가 화장한 모습을 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태화루가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인들에게 좋은 작품을 선사해줬듯이, 앞으로 울산 작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무한히 남겨주는 공간이 되기를 기원한다.+


십리대숲


용금소를 지나 강어귀를 따라 계속 걸어가다 보면 거대한 숲이 보인다. 숲을 자세히 보면 대나무로 가득한데, 기울어진 나무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여름에 분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으로 인한 후유증인 것으로 보인다. 나의 예측이 맞는다면, 울산시에서 기울어진 대나무를 잘 정비해야 한다.


입구를 들어가니, 끝이 없는 대나무 길이었다. 삼림욕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숲에 들어가니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나. 반대로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넘치는 세상에서 벗어나 깊은 생각을 하기에 좋은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 그런지 중간에 대나무실로폰을 두드릴 수 있고, 추억의 글을 대나무에 남길 수도 있다. 또한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공간도 잘 마련되어 있다.


숲의 중간쯤에 은하수길이 있는데, 길 좌우에 조명기구들이 촘촘히 있어서 밤이 되어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십리대숲도 시일을 잘못 결정하고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평상시보다 적기 때문에 대나무숲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데다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찾았다. 또한 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고.

밖에서 바라본 십리대 숲
안으로 들어가 봤다

울산 시민들을 이 숲을 ‘십리대밭’이라고도 부른다. 왜 밭이라고도 부를까. 사람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 것일까? 아직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울산문화원이 펴낸 <울산지명사(1986)>에서 이곳의 옛 명칭인 오산대밭(鰲山竹林)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이 일대가 백사장으로 되어 있을 때 일본인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래도 홍수로부터 백사장이 유실되는 것을 막고 숲 북쪽의 들판을 경작지로 활용하려는 목적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곳은 ‘대밭’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한자를 보면 ‘죽림(竹林)’이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숲이 자생하고 있다가 일본인이 심어서 숲을 확대한 것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조상들이 남긴 문헌에서 태화강 대나무 숲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울산 최초의 인문지리지인 <학성지> 형승(形勝)조, 내오산(內鰲山)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在太和津西數十里許 小丘臨江 景致幽妙 有晩悔亭 故府使朴就文所築 亭前有脩竹數畝 下有釣磯刻觀魚臺三字


“태화진의 서쪽 몇 리(里)쯤에 있다. 작은 언덕이 강에 닿아 있고, 경치가 그윽하여 묘하다. 만회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부사 박취문이 지은 것이다. 정자 앞에는 가늘고 긴 대숲 몇 이랑이 있고, 정자 아래에는 낚시터가 있는데, ‘관어대’라는 세 글자를 새겨 놓았다.”


2km에 가까운 숲을 지난 마지막 지점에서 두 가지 길로 갈린다. 하나는 강 쪽으로, 하나는 마지막 숲이 있는 공간으로 갈리는데, 강 쪽으로 가면 학성지가 기록한대로 관어대(觀漁臺)가 새겨진 바위가 나온다. 관어대 주변 바위에는 자라그림과 학 암각화를 볼 수 있다. 학 암각화는 원래 내가 서있는 곳에서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하천정비공사 때 소실되어 이곳으로 이전해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암각화에서 좀 더 앞으로 가면 자라그림이 앙증맞게 새겨져 있다.

관어대 자라그림
복원된 만회정

마지막 숲이 있는 공간으로 가면 만회정을 볼 수 있다. 박취문이 살았던 시기는 17세기, 즉 임진왜란 직후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정자를 세운 이유는 정계은퇴 후 말년에 휴식을 취하고 남은 인생을 친구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은퇴하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 이런 마음을 가지나보다. 오늘날 지은 만회정은 2011년 울산광역시가 새로 중건했다.


만회정과 관어대에 대한 내용은 조선 말기 다른 지리서에서도 언급된다. 또한 주위에 일정면적으로 대나무숲이 있었다는 내용도 반복해서 나온다. 심지어 위에서 언급한 고려시대 정포도 벽과정이라는 시에서 대나무 가지를 언급했고. 오늘날까지 전해진 옛 문헌들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태화강변에는 예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대나무 숲이 오랫동안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이 경작하기 위해 추가로 심어서 오늘날 십리대숲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태화루가 울산의 정치문화사를 설명해준다면, 십리대숲은 울산 태화강의 지리 역사를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의 강에서 태화강 국가정원으로 탈바꿈하기까지

     

십리대숲을 지나면, 태화강 관광센터가 나온다. 관광센터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과 빨간색 나뭇가지들을 볼 수가 있다. 아직 겨울이라 사진에서 보는 태화강의 모습을 체험할 수 없다. 하지만 5월이나 10월에 꽃들이 만개하니, 다시 한 번 찾아와 국가정원의 본 모습을 만끽하고 싶다. 무엇보다 꽃들이 만개할 때 코로나19가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원해 본다.


태화강 국가정원 - 오산못
태화강 국가정원 - 작가정원

하지만 60년대부터 2000년까지 울산 태화강은 구제불능의 오염하천이었다. 당시에는 가난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던 국가 과제였으니 환경오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경제성장의 과실을 맛보는 동안 태화강은 점점 병들어갔다. 특히 90년대 태화강 뉴스를 보면, ‘숭어들의 떼죽음’, ‘오염하천의 물고기에서 다량의 중금속 검출’, ‘울산연안 물고기 기형화’, '울산은 환경자정력 잃었다.’등의 제목으로 가득했다. 태화강이 그야말로 환경뉴스의 단골소재로 전락했던 것이다.


90년대 태화강은 또한 오늘날 개발도상국 수도들의 오염된 강들과도 비슷하다. 내가 필리핀에서 KOICA봉사단원으로 있을 때, 마닐라를 관통하는 파식 강(Pasig River)을 봤다. 강 근처에서 버스 창문을 열면 역한 냄새가 가득했다. 더 끔찍했던 것은 그 주변에 판자집을 짓고 사는 빈민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필리핀방송에서 파식 강 수질오염 기사를 계속 보도하는 데, 정부에서 손을 쓰지 못한 채 오염이 방치되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몇 십 년 전 주요하천과 19세기 영국 템즈강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서든 공업화가 시작할 때 지역하천의 수질오염을 피할 방법을 찾는 것은 오늘날에도 어려운가 보다.


결국 새천년이 접어들어서야 울산시에서 태화강을 생태복원하기 시작했다. 들어간 예산은 무려 6,000여 억 원. 거기다 울산 대기업들의 후원금까지 더하면 규모는 더 늘어난다.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돌리기 위해 울산시에서 어마어마한 환경비용을 투입했다. 생활폐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15년 동안 무려 47,000여개의 가정오수관을 설치했다고 한다. 또한 오수처리를 위한 수질개선사업소를 무려 3군데에 건설했다. 수질개선을 위해 울산시가 제안하고 시행한 사업만 해도 70가지가 넘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일까? 태화강은 2019년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국가정원으로 지정되었다. 30~40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강에 연어가 돌아오고, 둔치에는 수달이나 야생동물을 이전보다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간에 아름다운 조형으로 가득한 공간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태화강 복원 사업의 노하우를 파식강처럼 국가하천 수질오염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에 전수해 주는 것은 어떨지.


태화루와 십리대숲을 걸을 때는 그 동안 울산의 과거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태화강 국가정원은 앞으로 우리가 태화강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생태복원의 경험을 다른 나라에 공유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태화강의 현재와 미래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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