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서우 Jan 16. 2021

외고산 옹기마을과 옹기장

격동의 60년 동안 전통을 유지해온 외고산 옹기마을의 비결

1980년대까지 옹기는 곡식, 물, 장, 김치 등을 보관했던 생필품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독 안에 든 쥐’,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 등 옹기와 관련된 속담은 수 백 가지가 넘는다. 그만큼 80년대까지 옹기는 서민들의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플라스틱 용기, 90년대 김치냉장고 보급과 아파트 가구의 급속한 증가로, 우리 생활 속에서 큰 옹기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이제는 마당이 있는 넓은 시골집, 아니면 자연발효를 중시하는 김치, 막걸리 공장 등을 가야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다.


변화무쌍했던 현대 옹기 역사 가운데서 60년 이상이나 꿋꿋이 버틴 한 마을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옹기 생산의 50%를 차지하는 울산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 전통을 어떻게 간직했는지 궁금해서 나는 동해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남창역으로 향했다.  


옹기골 도예에서 만난 최정순 여사

     

부전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50분 정도 지나면 남창역에 도착한다. 요즘 동해선 광역전철 마무리 공사로 분주한데, 새로 지은 전철역도 거의 완공되었다. 부전역 출발 무궁화호가 약 2시간 간격으로 운행하지만, 올해 9월에 광역전철이 개통되면 배차간격이 줄어든다. 코로나19를 극복하면, 옹기마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


남창역 출구에서 오른쪽으로 쭉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표지판 내용대로 외고산 옹기마을길로 향하자. 마을로 다가갈 때마다 ‘바보 옹기장사 이야기’, ‘옹기와 가마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는 대형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계속 가다 보면 Onggi라고 써져 있는 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가 바로 외고산 옹기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다리 아래에는 옛 동해남부선 철도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있는데, 승강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리를 건너면, 수백 가지의 옹기와 작업장들이 나를 반겨준다. 이 작업장들은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오늘날에도 운영을 하고 있다. 안내소를 거쳐 올라가니, ‘옹기골 도예’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옹기골 도예’는 허진규 옹기장이 운영하는데, 옹기장은 후학 양성을 위해 대학 강의 및 산악 협력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안에 상점이 있어 궁금해서 들어 가봤다. 상점 옹기들을 보니 오늘날 아파트 및 다가구 주택에서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들로 가득했다. 역시 장인들은 시대의 요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구경하는 도중, 나를 반겨주신 분이 계셨다. 인사드린 후 내 이름을 소개하니까 같은 최가라고 반가워하신다. 옹기장 부인인 최정순 여사다. 허진규 옹기장은 밖에 일이 있어서 부재중이라고. 작업장에 들어갈 수 있냐고 여쭈어보니까 흔쾌히 허락하셨다. 안에 들어가 보니 길게 생긴 어두운 색의 볼펜통과 병 모양의 옹기가 있었다.

생옹기 건조과정. 원통형 옹기에 소금을 바른 후 800℃로 구우면, 옹기 안에 덩이 소금이 생성된다
옹기골 도예에서 제작하는 작은 옹기. 위 원통형 옹기 안에 생성된 덩이 소금을 잘게 부숴서, 여기에 보관한다. 옹기와 소금과는 궁합이 좋다.


아무래도 구워지기 전의 생옹기인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한 내용은, 원통형 생옹기에 소금을 바른 후 800℃에 구우면, 옹기 안에 소금 덩이들이 생성된다는 것이었다. 생성된 소금 덩이들을 다시 잘게 가공한 후, 제작하신 작은 옹기에 소금을 담아 판매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예부터 소금과 옹기는 궁합이 좋다고 말씀하셨고.


내가 요르단에서 1년 간 체류해서 그런지, 말씀을 듣고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요르단은 중동 국가답게 향신료의 천국인 나라다. 만약 중동에서 사용하는 향신료들과 옹기가 잘 어울린다면, 수출도 할 수 있겠다는 상상을 해봤다. 아직 검증이 필요한 사안이지만, 한국에 있는 중동 친구들을 대상으로 혹은 코로나19가 끝나고 중동 현지로 가서 반응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하긴 아마존에서 영주 대장간 호미가 대박 난 사례도 있으니까.


갑자기 찾아온 나에게 시간 내주신 사모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올해 21주년 축제가 가능하면, 축제 때 허진규 옹기장께도 인사드려야겠다.


울산 옹기박물관과 외고산 옹기마을의 역사


외고산 옹기장인들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울산광역시에서 이곳에 설립한 것이 울산 옹기박물관이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신일성 옹기장 주관하에 제작된 세계 최대의 기네스 옹기가 나온다. 최대 옹기를 보니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최대 옹기 제작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무려 5번의 실패 끝에 이루어진 성과라서. 대형 옹기라 생옹기 제작, 굽는 과정, 식히는 과정 등의 모든 것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실패한 이유를 파악한 후, 외고산 장인들이 축적한 모든 기술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최대 옹기를 뒤로 하면, 우리나라 옹기 역사에 대해 나온다. 옹기는 토기니까 토기가 시작한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밑이 둥근 토기의 형태가 등장하였고, 시대 상황에 맞게 진화하였다. 우리가 도자기의 역사를 배울 때, 신석기 빗살무늬토기, 청동기 민무늬토기, 고려청자,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걸로 배우는데, 옹기 역시 서민토기 역사의 연속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서민들이 사용한 생필품이어서, 종류가 다양했다. 농어업 때 활용한 옹기, 술독, 소금 옹기, 장을 담던 옹기, 식재료를 보관했던 옹기들. 플라스틱 시대가 열리기 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그럼 현대 옹기의 상징인 외고산 옹기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울산 옹기 박물관
기네스 인증 세계 최대 옹기

외고산은 원래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의 허덕만(1914~1972)이 이곳에 정착하여 옹기점을 이루면서 시작하였다. 이후 그와 인연이 있었던 영덕 옹기장이들이 이주해 와서 사업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왜 영덕에 옹기 장인들이 많았을까?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를 피해온 천주교 신자들이 영덕으로 피신했는데, 이들의 생계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옹기제작이었다.


허덕만의 외고산 이주는 그에게 큰 기회였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외고산은 겨울에도 기후가 온화해서 사계절 내내 옹기 생산이 가능했다. 장인들에 의하면 가까운 경주로 올라가도 영하로 내려가는 겨울로 인해 사계절 옹기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12월부터 3월까지 장인들의 휴식기가 있다고 한다. 둘째는 당시 외고산 옹기 흙이 매우 질이 좋았다. 셋째로는 6.25 전쟁으로 부산으로 오는 피난민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외고산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옛 동해남부선은 부산 피난민들의 생필품인 옹기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요인들로 70년대까지 외고산 옹기마을은 그야말로 호황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옹기대장이 박봉인 지역 공무원들에게 자주 식사대접을 했을 정도였다고. 오늘날 청년들이 공무원이 되려고 경쟁이 치열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게다가 하와이 교포들에게 옹기를 수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 플라스틱 용기의 보급과 90년대 김치냉장고 시대의 개막은 옹기산업의 침체기를 불러왔다. 90년대 옹기 생산량이 무려 30~40%가 감소해서, 외고산을 떠나 다른 사업을 시도했던 장인들도 있었다.


다행히 21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참살이(well-being) 열풍으로 인해 숨 쉬는 옹기가 재평가받기 시작한다. 또한 무형문화재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장인들의 전통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울산광역시가 고안한 축제가 외고산 옹기문화 축제인데, 작년에 20주년을 맞이하였다. 또한 광역시에서 외고산 마을 옹기장 8명을 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로 단체 지정하였다. 이들이 운영하는 옹기점들이 오늘날 외고산 옹기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성창요업과 조희만 옹기장

     

박물관을 나서고 다른 상점들도 구경하기 시작했다. 먼저 간 곳은 장성우 옹기장이 운영하는 가야신라요다. 옹기들을 보니 다른 곳과 달리 회색 빛이 강했다. 또한 가야 전통을 살린 도기 기마 인물형 뿔잔, 바퀴장식 뿔잔, 신라 기마인물형 토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옹기장은 왜 회색 옹기와 가야토기를 제작하였을까? 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산림보호를 위해 벌목을 제한했다. 이는 옹기공장들에게 큰 타격이었는데, 나무는 가마에서 옹기를 구울 때와 잿물을 만들 때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 바로 잿물에 광명단을 섞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광명단은 전통 잿물을 대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옹기의 굽는 온도를 낮출 수 있어서 매우 효율적이다. 하지만 광명단에 포함된 납이 건강을 해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옹기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장성우 옹기장은 이에 대한 해법으로 유약을 쓰지 않는 토기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옹기 제작 경력이 15년이 넘었음에도 무유토기를 제작하던 장인을 만나서 이를 기존의 옹기 기술과 결합시킨다. 그 결과 본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옹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위기가 올 때, 겸손한 자세로 끊임없이 배움에 임하면 남들과는 독특한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장성우 옹기장의 인생을 통해 알 수 있다.


장성우 옹기장이 운영하는 가야신라요. 회색 빛 옹기가 인상적이다.

가야신라요에서 좀 더 가면 성창요업이 나온다. 성창요업은 조희만 옹기장이 운영하는데, 마침 옹기장인께 직접 인사할 수 있었다. 무형문화재 장인들을 텔레비전에서만 봤지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었다.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성창요업 입구에는 ‘매주 일요일은 휴무’라고 적혀있다. 조희만 옹기장도 허덕만 아래서 옹기 일을 배웠다. 허덕만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여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과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출석했다고 한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당시 옹기공장 입장에서 보면 상당한 혁신이었다고 한다. 옹기제작은 매우 고된 작업이다. 쉼 없이 일하면 수요일이나 목요일 쯤되면 코피가 터지기는 일상이었다고. 그래서 고된 일을 한 후 휴식시간에 술에 빠져 산 옹기대장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허덕만은 절제된 생활을 바탕으로 효율적으로 옹기를 제작할 것을 격려했다. 조희만 옹기장도 당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 6일 업무로 바뀌면서 다른 옹기대장과 달리 어떻게 효율적으로 옹기를 제작할지를 많이 고민했었다고 한다. 이는 허덕만과 그 제자들의 벙커C유를 활용한 가마 기술의 혁신 및 작업별 분업화로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외고산 옹기가 유지해올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조희만 옹기장의 일요 휴무 전통은 종교를 떠나 주 40시간과 같은 근무 단축이 오히려 유럽 선진국처럼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창요업 제2공장
성창요업 전통가마시설

안타깝게도 허덕만은 197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외고산에 남긴 유산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희만 옹기장은 허덕만과 추억이 깃든 사진들을 잘 간직했다가 옹기박물관에 전부 기능했다고. 사진들은 60-70년대의 옹기마을 그 자체라서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허덕만의 자녀와도 인연을 잇고 있다. 허덕만의 자녀는 라오스에서 사업을 운영하는데, 2016년에 외고산 옹기장인들을 초청했었다고. 6월에 로고스 컬리지에서 옹기 제작 시연을 했다고 하는데, 제작 장비들을 모두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7시간 동안 차를 타고 루앙프라방에 가서도 하셨다고 하고. 장비까지 가지고 장거리 여행을 한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라오스 현지인들의 높은 관심과 응원으로 제작 시연회를 잘 끝낼 수 있었다고 했다.


올해 옹기 장사가 어땠냐고 여쭈어보니, 코로나 19로 안 힘든 사람 없지 않냐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작년이 외고산 옹기축제 20주년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온라인으로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통 행사를 5월 어린이날 전후로 했었는데, 올해도 힘들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셨다. 그래도 코로나19를 극복하면 9월부터 동해남부선 전철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다고 내가 말씀드리니까, 옹기 제작에 집중하느라 소식을 몰랐다고 하셨다. 하지만 부산사람들도 쉽게 올 수 있어 매우 기대가 된다고. 옹기를 구경하고 상점을 나서는 길에 음료수 챙겨가라면서 콩두유 하나를 주셨다. 바쁜 시간 중에 도움을 주신 조희만 옹기장께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오늘날까지 외고산 옹기마을이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옹기장들의 끊임없이 시대를 연구하는 정신과 기술혁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플라스틱 용기와 김치냉장고가 넘치는 시대에도 옹기장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나도 시대의 풍파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한 자세와 겸손히 배우는 마음을 유지한다면, 나만의 전문적인 분야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외고산 옹기장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코로나19가 끝나서 작년에 못한 축제를 올해 더 성대히 진행하기를 기원하며 마을을 나섰다. 축제가 열리면 오늘 내가 만나지 못했던 옹기장들께도 직접 인사드려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