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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an 05. 2021

울주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

선사시대부터 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진 울산 언양의 역사

중학교 때인가. 세계사 시간인지 미술시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알타미라 벽화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스페인에 살았던 구석기시대 인류가 동굴 천정에 그린 들소들. 들소가 잘 번식하여 인류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술적 의미에서 그렸다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만약 우리나라 선사시대에 관심이 있다면, 울산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각석을 꼭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


먼저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 선사인류의 포경을 잘 묘사한 벽화로 국보 제285호이다. 비록 알타미라 벽화보다는 10,000년 후에 그려졌지만, 고래를 주제로 새겼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알타미라와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는 우리 선사 조상들이 고래가 풍성하게 번식하여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 천지신명께 자주 기도했을 것이다. 조상들의 기도를 천지신명께서 들어주셨는지, 울산은 1985년 포경업이 금지될 때까지 한반도 고래잡이의 중심지였다.


암각화를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나는 울산 언양으로 출발했다.


35번 국도 반구대로에서 울산 암각화 박물관까지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산 나들목에서 내리면 35번 국도 반구대로가 나오는데, 언양방향으로 우회전하자. 우회전을 하고 10여 분 정도 직진하면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이 보인다. 표지판이 보이는 대로 우회전 하자. 이후 길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울산 암각화 박물관이 나온다.


암각화를 직접 보기 전에 박물관은 꼭 들러서 가자. 관광지를 갈 때는 배경을 어느 정도 알고 가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천전리 각석 발견 40주년을 기념해서 ‘바위의 기억, 염원의 기록’을 2021년 4월까지 전시하고 있다. 암각화 발견이 겨우 40년밖에 안 되었다니! 그러고 보니 알타미라 벽화도 발견된 게 1879년이다. 서양이 우리보다 약 100년 빠르다. 하지만 서양에서 선사시대 벽화 및 암각화 연구가 본격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세고고학 연구 발전에 힘입어서다.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천전리 각석의 바위 문양 및 신라시대에 새겨진 기록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어서 벽화를 감상할 때 도움이 되었다. 특히 마름모, 원형 기하학 문양의 의미를 알기 위해 학자들이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주로 한반도 및 유라시아 다른 지역의 소규모 암각화 및 신석기, 청동기 시대 공예품에 나타난 문양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 탐사진의 1970년 천전리 각석 발견, 이듬반구대 암각화 발견은 우리나라 암각화 연구의 시작점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21세기에 들어서야 활성화가 되어서, 천전리 각석의 수수께끼를 알아내는 데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가 활성화되어서 각종 기하 문양의 수수께끼가 언젠가 풀리기를 기원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울산 암각화 박물관 1층 전경

1층에는 세계의 암각화 속에서 반구대 암각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와 포경 모습만 새겨진 것으로 알았는데,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육식 동물들도 선사 조상들의 주요 테마였다. 즉 선사시대 조상들의 채집 및 사냥 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층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울산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유적을 전시하였는데, 이 유적들은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유추할 때 필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제작시기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계속되는 발굴 및 탐사로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다면 언젠가 제작시기가 국사 교과서에 당당히 실릴 날이 오지 않을까?


박물관의 도움을 받은 나는 반구대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겸재 정선이 머문 집청정, 포은 정몽주를 배향한 반구서원

     

암각화 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로 가려면 걸어서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가기 전 의미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박물관에서 10분 정도 지나면 집청정이라는 곳이 나온다. 집청정(集淸亭)은 경주 최 씨 정무공파의 최신기(崔信基 1673~1737)가 세운 정자다. 의미는 한자 뜻 그대로 ‘맑음을 모은다’는 의미. 이 곳에서 겸재 정선이 ‘반구’라는 작품을 남겼. 겸재하면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를 주요 작품으로 국사시간에 배운 것 같은데, 언양과도 인연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겸재 선생의 ‘반구’는 2008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인 윤진영 박사가 발견했으니,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집청정
겸재 정선이 그린 풍경


겸재 정선 '반구'(울산대곡박물관 소장)

집청정 뒤편에는 왼쪽으로 직각으로 길게 깎인 기암이 있는데, 모습이 제법 특이하여서 왜 이 곳을 정선이 창작 장소로 선정했는지 이해가 갔다. 겸재 외에도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까지 284명의 시인이 집청정에서 400여 편의 시를 남겼다고 하면, 이곳은 조선 언양 작가들의 창작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사 시험을 준비할 때 양반의 서자인 중인의 시사 활동이 조선 후기에 유행했다고 배웠는데, 어쩌면 집 청정도 그중 하나일 줄도 모르겠다.


겸재의 흔적을 지난 후 5분 정도 가면, 반구서원이라는 곳이 나온다. 밖에 정문이 닫혀있어서 직접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숙종 때 언양 유생들이 서원을 세워 성리학을 보급하고, 언양 어느 곳에서 1년 간 유배생활을 한 포은 정몽주께 배향했다고.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유생들을 개혁하기 위해 실시한 1871년의 서원 철폐령을 피하지는 못했다. 오늘날에 세워진 서원은 1965년에 재건된 거라고. 아 잠깐, 포은 정몽주? 후에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 앞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의 단심가로 답한 지은 포은 정몽주를 배향했다고? 그러면 반구대 진입로는 고려시대와도 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거잖아?


원래 반구대는 반구서원 맞은편 거북이가 물가를 향해 넙죽 엎드려 있는 산의 머릿 부분을 말한다. 머릿 부분에는 정몽주의 은덕을 추모한 포은대가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문인들로 가득했던 반구대의 명성을 1970년 이후 선사시대의 암각화로 넘겨준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원래 반구대였던 지역의 관광 콘텐츠를 보강하여 언양 시간 여행이라는 테마로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을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반구대는 선사시대 암각화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친 사연들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나타난 반구대 암각화 그러나...


드디어 반구대 암각화로 가는 길이 가까워진다. 대나무로 가득한 숲이 나를 반긴다. 숲을 지나면, 중간에 공룡 발자국 화석이 있다. 여긴 무려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흔적. 우리 조상뿐만 아니라 공룡들도 반구대를 사랑했던 것 같다. 반구대를 걸쳐 흐르는 대곡천에 여러 장소에서 공룡발자국이 확인된다고 하니까. 공룡발자국이 있는 곳에서 더 가면 곧 반구대 암각화를 볼 수가 있다.


암각화를 보면서 몇몇 관광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유적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있지만, 옛날에 여기에 소풍 와서 수영을 하곤 했었다고. 좀 더 확인해야 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흥미로웠다. 문화재청의 예산이 적었을 때는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1995년에 국보로 지정된 이후에는 관리가 철저해진 것 같다. 강가마저 접근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로 막아 놓았고, 벽화 건너편 멀리서 107배 확대까지 가능한 망원경으로만 볼 수 있다.


드디어 나의 순서가 다가와 망원경을 집었다. 107배까지 확대했지만, 암각화 중간에 세로로 깊이 새겨진 개, 표범처럼 점무늬가 새겨진 동물과 개 옆에 고래 하나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오른쪽으로 돌리니 고양이처럼 생긴 것 하나가 보였을 뿐이었다. 박물관에서 견본으로 봤던 오른편의 사슴과 멧돼지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 많던 고래들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선사시대의 장엄함을 이곳에서 결국 못 보고 돌아가는 건 아닌지. 혹은 코로나 때문에 쓴 마스크의 입김이 안경에 드리워져서 시야를 결정적으로 방해해서 다시 한번 봐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반구대 암각화 전경(붉은색 네모 부분에 암각들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107배 확대 카메라

하지만 다른 관광객들도 고래가 다들 안 보인다고 하셨다. 마침 관광해설사 한 분께서 이곳에 오셔서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원래 암각화를 잘 볼 수 있는 시간은 오후 3-4시쯤이라고 한다. 지금은 오후 1시다. 2시간을 기다려서 망원경으로 다시 보는 방법도 있지만, 천전리 각석을 다음에 감상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애매했다.


다시 나에게 망원경 순서가 돌아왔을 때, 최선을 다해서 바라보려고 했다. 몇몇 고래가 희미하게 보이긴 했다. 렌즈를 천천히 확대해서 뚜렷하게 보려고 했지만, 두껍게 선이 그려진 동물들만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동물들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새겨진 것이 아닐까. 그 이전에 새겨진 포경문화를 보려면 맑은 날씨, 오후 3~4시, 계절의 삼박자를 맞춰야 한다.


마지막 변수인 계절을 맞추는 것은 왜 중요할까? 반구대에서 하류로 좀 더 내려가면 1965년에 완공된 사연댐이 있다. 이 댐은 울산의 공업용수와 인근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데, 하필이면 댐이 지어진 시점이 암각화를 발견하기 전이었다. 늦가을 10월 말에서 초봄 3월 초까지는 갈수기여서 망원경으로나마 암각화를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갈수기가 지나면 강수량이 서서히 증가하여 사연댐 수위가 증가한다. 수위가 53m가 되면 암각화가 잠기기 시작한다. 57m가 되면 완전히 물속으로 사라진다. 즉 늦봄과 여름철에 암각화를 찾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문제는 물에 6~8개월 동안 잠기면서 선사 조상들이 새긴 동물들과 포경 활동이 침식된다는 것이다. 반구대는 퇴적암계, 즉 사암, 셰일 등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퇴적암은 화산암, 화성암질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물에 쉽게 침식된다. 또한 퇴적암의 주요 성분인 방해석에는 칼슘 성분이 있다. 칼슘과 물과의 화학반응하면 허연 침전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석회다. 몇 년 전 울산대학교박물관이 이곳을 실측 조사한 결과 암각화 표면이 하얗게 된 걸 봤다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울산시에서는 이제부터 사연댐 수문을 설치하여 수위를 조절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수위를 조절하면서 줄어드는 용수 공급량은 청도 운문댐에서 대체공급을 받는 방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이 정책으로 여름에도 가라앉지 않는 암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선사시대 조상들이 오늘날 우리들과 소통하려고 만든 고래와 사슴들 그리고 조상들이 고래를 잡았던 모습들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시간을 맞출 수 없어서 선사시대 조상들이 보여주고픈 고래, 사슴 그리고 포경 기술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반구대에서 향하는 길에서 배운 것은 암각화의 선사시대부터 집청정의 조선시대까지 사연을 가지고 오늘까지 언양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각각의 시대마다 전해준 사연들을 보존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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