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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an 08. 2021

천전리 각석 - 청동기부터 신라까지

기하무늬의 비밀과 진흥왕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생활상을 잘 담아낸 벽화로 국보 제147호다. 벽화 왼쪽 상단에는 선사시대의 수렵행태가 잘 나타나있고, 가운데, 오른쪽 상단에는 신비로운 기하무늬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가운데 하단에는 신라 왕족들이 다녀갔다고 적힌 기록이 있어서, 고대 시대까지 여기는 상당히 중요한 장소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천전리 각석 기하무늬가 말해주는 것


다시 반구대 암각화 박물관으로 나와 35번 국도로 돌아가자. 그리고 다음 길에서 바로 우회전하면 천전리 각석으로 향할 수 있다.


계속 가다보면, 다리와 요양병원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 요양병원 오른쪽에 난 길로 가 끝까지 걸으면 천전리 각석으로 향할 수 있다. 길 오른쪽에 하천이 보이는데, 바로 대곡천이다. 정면을 응시하면 셰일색으로 이뤄진 멋진 계곡을 볼 수 있다. 계곡으로 바로 가기 전 오른쪽 강 위로 포장된 길이 있는데 그 길로 가서 쭉 가면 천전리 각석을 만나볼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반구대 암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서 수몰위험이 극히 적다. 그래서 각석 앞에서 육안으로 바로 볼 수가 있다. 각석 좌측 상단에는 육지의 동물들이, 중앙부 및 우측 상단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동심원, 마름모, 나선무늬, 물결 무늬들이 반복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앙부 하단 직사각형으로 이뤄진 부분에는 의미심장한 한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좌측 상단 육지의 동물들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를 확대하면 일부 동물들만 희미하게 보이는데, 아무래도 바위에 가장 먼저 새겨진 그림으로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의 육상동물들과 비슷한 걸로 보아, 우리 선사시대 조상들이 풍성한 사냥과 채집이 이루어지도록 하늘에 기원하는 의미에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좌측 상단을 보며 종합적으로 느낀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는 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전리 각석 전경
천전리 각석의 기하문 - 각석에서 가장 깊게 새겨져 있다

중앙부 및 우측 상단의 문양들은 워낙 깊게 새겨져서 육안으로도 매우 잘 보인다. 어떻게 보면 선사 시대 조상들의 암호문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선사 시대에 새겨진 부적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의 부적들은 한글 및 한자를 활용하여 노란색 종이에 빨간색으로 문양을 새긴다. 그럼 선사시대에는 글자가 없었으니까, 문양으로 새겨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청동기 유물에 새겨진 문양들과 비교연구하는 방법을 활용하여, 문양의 의미를 연구하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우리가 키우는 곡식이 잘 자라게 해주세요.’, ‘남편이 사슴 잘 사냥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애기 잘 낳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등으로 문양의 의미를 추정하고 있다. 선사시대와는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상당히 달라진 오늘날이지만, 학부모들이 자녀들의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기원하고, 직장인들이 부자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인생의 불확실성을 해결하는 것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인간의 난제이기도 하다. 선사 조상들이 기원했던 것이 너무 절실해서인지 천전리 각석에서 문양들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매우 깊게 새겨졌을 지도 모르겠다.


사탁부 갈문왕과 심맥부지


중앙부 하단 직사각형 위의 한자들은 스마트폰 카메라를 확대해서 보니까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보았다. 오른쪽 부분의 한자는 이렇게 시작했다.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來始□□□

之古谷无□谷善石淂造□……


한자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데다가 한자를 많이 잊어버려 당장 서 있던 곳에서 알 수 있었던 건 ‘을사년 사□부갈문왕이…… 옛 골짜기에서…… 좋은 돌을…… 만들다…….’다. 그리고 왼쪽부분은 이렇게 시작했다.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沙喙

部徙夫知葛文王妹於史鄒女郞


‘과거 을사년 6월 18일 말 사탁부 종부지 갈문왕 누이 어사추여랑…….’ 여기까지 읽어보고 어떤 내용인지 자세히 알기 위해 앞에 전시된 천전리각석명문해설을 읽어봤다.


오른쪽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흥왕의 동생인 사탁부 갈문왕이 이 골짜기로 놀러왔다. 오래된 골짜기이긴 했지만 이름이 없어서, ‘서석곡’이라고 지었고, 갈문왕과 함께한 누이는 어사추여랑이라는 내용이었다. 왼쪽 내용은 사탁부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이 이곳을 방문한지 8년(538)이 지난 후에 쓰였는데, 사부지 갈문왕은 작년에 이미 고인이 된 몸이었다. 그래서 갈문왕의 부인인 지율시혜비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부즉지태왕비(법흥왕비) 부걸지비와 갈문왕 아들인 심맥부지가 함께 지금 내가 서 있는 서석곡을 방문했다는 내용이다. 


심맥부지는 바로 신라의 초기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이다. 진흥왕은 7살에 왕에 즉위했는데,당시 어린왕을 섭정한 이는 바로 지소부인, 즉 지율시혜비다. 어린 나이의 진흥왕은 1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선명히 기억했을까? 게다가 얼마 전에는 불교를 공인한 삼촌 법흥왕도 승하했다. 아버지와 왕실 조상들의 자취가 남은 곳을 직접 어린 심맥부지에게 보여주는 것이 지율시혜비가 어머니로서 행해야 할 의무였을 것이다. 신라 왕실가문의 정체성을 서석곡에서 어린 왕에게 교육했다고 해야 할까. 어머니의 바람이 통해서인가. 심맥부지, 즉 진흥왕은 한강유역과 함경도까지 영토를 확대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게 된다.


천전리 각석의 원명과 추명. 가운데 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써진 것이 사부지 갈문왕의 방문을 기록한 원명. 왼쪽이 심맥부지, 지율시혜비, 부걸지비의 방문을 기록한 추명.

잠시 각석 뒤를 돌아보았다. 왜 갈문왕이 이곳을 서석곡이라고 지었는지. 멋진 셰일 색깔로 이뤄진 암석들이 가득했다. 암석 앞으로 대곡천이 우렁차게 흐르고 있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서 서석곡은 신라 왕실 뿐만 아니라 화랑들에게도 사랑받던 곳이었다. 아름다운 암벽으로 인해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곳이었던 것 같다.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흠춘도 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천전리 각석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늘날의 서석곡

계곡을 뒤로 하고 나선 후,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만약 나의 아들이 혹은 나의 손자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는 어떻게 사셨나요?’라고 물어보면, 내 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손자에게 안내할 수 있을지?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동안 삶을 지켜보고 추억을 기록하며, 자녀들에게 우리 가족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주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지율시혜비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어 손자들에게 당당히 알릴 수 있는 나 자신이 되기를 바라며 천전리 각석과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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