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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Feb 12. 2021

양남면 주상절리와 신라 이야기

현무암 기둥들은 석탈해와 박제상을 기억하고 있을까?

박제상과 주상절리 

     

문무대왕릉을 나서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월성원전이 보안을 이유로 길을 막고 있었다. 원전에서 다시 돌아가 왼쪽으로 틀어 봉길터널을 통과한 후 계속 가다보면 하서항이 나온다. 여기가 바로 경주 양남면 주상절리의 남쪽 시작점이다.


하서항 옆을 보면 큰 열쇠가 하나 있다. 큰 열쇠 안에 하트 표시가 있는데, 아무래도 연인들을 위한 공간이겠지. 하지만 열쇠로 가기 전 두 안내판이 있는데, 박제상과 석탈해 이야기가 나온다. 박제상하면 실성 마립간 시절 나라의 안정을 위해 고구려에 복호, 왜에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다. 이후 눌지 마립간이 즉위하자 박제상에게 이 둘을 구출하도록 명한다. 그 이유는 복호와 미사흔이 눌지 마립간의 동생들이기 때문이다.   


먼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혔던 복호를 탈출시키는 것을 성공한 이후, 박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보지 않고 왜국으로 가서 왜왕에게 가짜 충성서약을 한다. 이 계략으로 미사흔을 구출하지만, 안타깝게도 왜왕에게 정체가 발각되어 사로잡히게 된다. 왜왕이 항복을 계속 권유했으나, 차라리 신라인의 개돼지로 남겠다고 거절하다가 결국 화형을 당하고 만다. 박제상의 죽음을 들은 눌지 마립간은 매우 슬퍼하며, 충신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종하였다. 또한 탈출한 미사흔과 박제상의 둘째 딸과 혼인시킨다. 아,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된 이야기도 유명하다. 울산 울주군 두동면에 가면 이를 기념한 박제상유적지가 있다.


왜 박제상 이야기가 하서항에 있지? 다시 들어가 하서항 안내판을 보니 ‘하서항(율포진리항)’이라고 적혀 있다. 아, 삼국사기에 박제상이 율포에서 왜국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박제상과 망부석 이야기의 무대라고 생각하고 하서항에 사랑의 열쇠를 만들어 놓았구나. (참고로 울산에서는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를 근거로 오늘날 정자항을 율포로 보고 있다. 정자항 뒤 편 유포석보에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 비석이 있다.) 석탈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겠다.

미사흔의 탈출과 박제상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망부석
하서항에 있는 사랑의 열쇠


다시 주상절리로 돌아가자. 고등학교 한국지리시간 때 얼핏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 잊어버려서 안내판을 봤다. 이렇게 쓰여 있다.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이상의 뜨거운 용암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과 접촉하는 하부와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에서부터 빠르게 냉각된다. 빠르게 냉각하는 용암은 빠르게 쪼그라들어 용암 표면에는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오각형 혹은 육각형 모양의 틈(절리)이 생긴다.”


땅 속에 있던 마그마는 화산폭발로 분출하면 용암이 된다. 용암이 밖으로 나와 갑자기 차가워지면. 돌로 변할 때 오각형이나 육각형 모양의 틈이 생긴다는 것이다. 틈이 갈라지면 수많은 오각형과 육각형 모양의 기둥들로 된다. 근데 고등학생이 주상절리라는 단어를 처음 들으면 어렵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냥 ‘현무암기둥군’처럼 쉽게 풀어서 쓰는 게 어떨까 싶다.


먼저 위로 솟은 주상절리가 나를 반긴다. 거북머리처럼 생긴 바위 뒤를 보면 솟은 기둥들을 볼 수 있다. 바위가 검은색인 것을 보니 제주도 바위와 같은 현무암이다. 어떻게 솟은 기둥이 되었는지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나보다. 안내판에도 두 가지 가설이 적혀 있으니. 땅위로 흐르던 용암이 굳어서 육각기둥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또는 땅 아래에 흐르던 마그마가 굳어 지표면이 깎이면서 육각기둥이 드러나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도 하고. 지리학에는 문외한이라 그냥 머리를 식히면서 주상절리의 아름다움만 봐야겠다.


좀 더 가면 기울어진 주상절리와 누워있는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마치 장작을 쌓아놓았다고 해야 할까. 주상절리 전체 풍경을 보니까 장관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아름다운 곳은 주상절리 전망대 근처에 있는 부채꼴로 된 주상절리다. 어떻게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만들었을까? 왼쪽 부채꼴 아래 솟아있는 바위들 때문에, 용이 물에서 숨어 있다가 머리를 내민 모습 같다.

위로 솟은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
누워있는 주상절리
부채꼴 주상절리


그런데 주상절리를 보면서 궁금한 게 있다. 신문왕을 비롯한 통일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여기까지 왔었는지? 신라 시대에는 월성원전이 없었으니까 대왕릉에서 해안선을 타고 바로 내려올 수 있었는데, 왜 주상절리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을까? 신생대 말기에 있었으면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기 전부터 있었을 텐데. 왕실에서 주상절리 절경을 소문내지 않기 위해 비밀에 부쳤을 수도 있다. 아니면 왕족, 귀족과 승려들이 주상절리를 보고 향가를 지었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긴 주상절리를 개방한 지도 불과 10년도 안 되었다. 그 전에는 부대가 주둔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군부대가 주둔해서 보존이 잘 되었겠구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새마을 운동 때 마을 주민들이 마을정비사업을 하며 주상절리 바위를 깨서 사용했기 때문. 오늘날 남은 주상절리는 새마을 운동 때의 20~30% 밖에 안 남았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이 주상절리의 가치를 몰라서 그랬다고. 새마을 운동 때 이곳 주민들처럼어쩌면 신라 사람들도 주상절리를 이상하게 생긴 바위로만 봤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록이 없는게 아닐까? 오히려 남아있는 주상절리가 신라왕의 명을 받아 목숨을 걸고 왜국으로 떠난 박제상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몇 십 년 전 개발이라는 이유랍시고 잔인하게 난도질당한 동료들 때문에 슬픔을 간직하고 있을 테고.


읍천항과 석탈해

     

부채꼴 주상절리를 지나면 항구가 또 보인다. 바로 작은 고깃배들이 가득한 읍천항이다. 이 마을에는 벽화들로 가득한데, 근처에 있는 월성원전에서 벽화공모전을 열면서 조성되었다고 한다. 벽화마을을 관리하지 않으면 색이 바라서 오히려 흉물이 되는데, 읍천항 벽화는 생생한 색감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래된 벽화를 계속 교체해줘서 가능하다고. 다음에 내가 여길 찾아오면 교체된 벽화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벽화를 지나다보면, 오른쪽 편에 한 여자가 배에 있는 궤짝의 아기를 보고 있다. 배 앞에는 새가 보인다. 석탈해 설화를 나타냈다. 배 앞에 있는 새는 까치.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씨를 삼았다는 내용이 기억난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脫解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冝弃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并寳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徃.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설화긴 하지만 슬픈 내용이다. 다파나국 왕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알을 낳자마자 버려지다니. 어명을 거절할 수 없었던 엄마는 자기 알을 실은 궤짝을 떠나보내며 펑펑 울었을 거다. 밤마다 아이가 무사할지 생각하느라 잠도 못 이뤘을 터. 왜국의 동북 1,000리에 있는 다파나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논란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일본 다지마국(但馬國) 또는 히고노국(肥後國) 다마나군(玉名郡), 어떤 이는 오늘날 제주도인 탐라국, 심지어 어떤 이는 캄차카 반도에 비슷한 설화가 있다는 이유로 왜국 동북 1,000리를 그대로 읽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그럼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파나국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석탈해 일족은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부족으로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있다. 아니면 설화 내용대로 일족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버림받아 신라로 이주한 것은 아닐까?

 

궤짝이 처음에는 금관국(가야, 오늘날 경상남도 김해)에 닿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행히 아진포구에 도착했을 때 할멈이 궤짝을 열었는데 어린아이 하나가 있었다고. 이 어린아이가 석탈해다. 오늘날 읍천항의 어부들처럼 탈해도 고기잡는 것을 업으로 삼아 자기를 기른 할머니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골상이 특이하니 학문을 배워서 공을 세우라고 했는데,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었다. 그래서 훗날 왕이 될 수 있었던 것.


읍천항 벽화
신라가 아기 탈해를 맞아들이다. 배 옆에 여인을 젊게 표현했는데,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머리가 희끗해야 하지 않을까?

그럼 알이 도착했던 아진포구는 어디일까? 아진포구는 <삼국유사>에서 계림 동쪽 아래 서지촌에 있다고 언급하는데, 고려시대에는 상서지촌, 하서지촌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 그래서 하서항에 석탈해 설화 안내판이 있었구나. 그러면 왜 읍천항에도 탈해설화를 전시한 공원이 있을까? 이는 월성원전 바로 앞에 있는 석탈해왕탄강유허비 때문에 그렇다. 조선 헌종 11년(1845)양남면 나아리로 아진포를 비정하여 하마비를 하사했다고. 하마비는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의미다. 즉 조선조정이 옛 초기 신라 왕실에 대해 존경심을 표현한 것. 이후 월성 석씨 문중에서 석탈해의 자취를 추모한 유허비를 설립한다. 나아리는 오늘날 월성원전이 들어서서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아래에 있는 읍천항에 탈해왕을 기념한 공원을 세웠다.


경주하면 불국사, 석굴암, 동궁과 월지, 대릉원 등을 흔히 생각하지만, 경주 동해안도 마찬가지로 신라역사를 교육하기 딱 좋다. 왜국 동북 1,000리에서 바다를 거쳐 온 석탈해, 신라의 충신 박제상, 그리고 통일신라의 문무왕과 신문왕까지 신라이야기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지리 교과서로만 배웠던 주상절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남들이 다 가는 경주 관광지를 다 봤다면, 신문왕처럼 이견대에 올라 동해바다와 문무대왕릉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주상절리를 보며 옛 신라인들의 발자취를 감상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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