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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un 29. 2021

간성 청간정

청간정은 원래 공무수행하는 관리를 위한 객관이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바닷 자락에는 남녘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관동팔경인 간성 청간정이 있다. ‘정(亭)’이라는 한자가 보여주듯이 이곳도 조선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만든 곳이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같은 관동팔경 정자인 월송정(越松亭) 주변으로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가 가득하고, 망양정(望洋亭)에서는 말 그대로 바다의 파도를 바라보는 게 일품이다. 청간(淸澗)을 직역하면 ‘맑은 산골 물’이라는 뜻인데, 정자 주변은 바다만 보이지 산골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이곳은 다른 관동팔경 누정과는 달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간성군 역원(驛院)인 청간역(淸澗驛)이라는 특이한 명칭으로 나온다. 역원은 옛날에 공무를 수행하는 자에게 숙식과 마필을 제공하는 시설이다. 즉 오늘날 호텔과 주유소가 모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대응하는 셈이다. 물론 당시 일반 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 TV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주변 자연경관과 맛집으로 유명세를 탄 고속도로 휴게소를 리포터들이 많이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그 역할을 한 게 청간정이 아니었나 싶다. 관동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을 통해 청간역 주변 경치가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조정에 소문이 났겠지. 그러다가 조정에 들어온 소문들이 청간역 시설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고. 관리들의 소문과 시설개선이 어우러져 조선시대에 와서는 아예 사대부들의 필수 관광지가 되었다.


우리에게 간성의 관동팔경으로 알려진 청간정으로 가보자.


청간정의 역사 


속초 시내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오른쪽 편으로 영랑호가 보인다. 영랑호를 뒤로 하고 다시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오른쪽 편으로 호텔과 펜션 안내판이 가득하다. 고성 바다가 워낙 깨끗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아 찾아오는 것 같다. 천진리를 지나 청간교를 지나면 오른쪽 편에 청간정 간판이 내 눈앞에 확 들어온다.


청간정을 들어가기 전 바로 앞에 비석이 셋 세워져 있다. 안내판을 보니 토성면장 김용집 비, 박복선 비, 김두현 기념비라고 한다. 제작연대는 1930년대라고.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때 청간정 중수에 기여한 이들을 기념한 선정비라고 해야 할까. 그중 왼쪽에 있는 김용집비는 관람객의 신고로 청간정 계단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굴해서 조사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박복선, 김두현의 비가 있는 이유는 청간정 중수를 위해 거역의 연금을 기부했기 때문이다. 


청간정 중수 기념비. 1929년 토성면장인 김용집에 의해 오늘날 자리로 청간정 복원이 추진되었다. 


1930년 청간정 중수라. 그렇다면 오늘날 내려오는 청간정은 송강 정철이 본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왜 중수하게 되었을까?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1884년에 건물이 불타서 그랬다고 한다. 즉 중수하는 데 든 시간이 무려 50년 가까이 걸렸다는 소리다. 이후 1980년 최규하 대통령이 청간정을 순시한 후 유지, 보수를 지원하였고, 2012년 6월에 다시 복원한 후 오늘날의 모습으로 이르고 있다.


청간정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다른 관동팔경과 달리 역사 사료가 적어서 정확히 알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청간이 누정보다는 오히려 공무를 수행하는 자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했던 역원(驛院)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고속도로 휴게소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던 셈이다.


오히려 이 두 문헌에는 청간역 동쪽에 있는 만경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在淸澗驛東數里。有石峯突起,層層如臺,其高數十仞,上有虯松數株。臺東構小樓,臺下皆亂石嵯峨揷海澨。水淸徹底,風來則驚濤亂撲石上,飛雪四散,眞奇觀也。

     

“청간역(淸澗驛) 동쪽 수리(數里)에 있다.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 일어서고 층층이 쌓여 대(臺) 같은데, 높이가 수십 길은 되며 위에 구부러진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작은 다락을 지었으며 대 아래는 모두 어지러운 돌인데, 뾰족뾰족 바닷가에 꽂혔다. 물이 맑아 밑까지 보이는데 바람이 불면 놀란 물결이 어지럽게 돌 위를 쳐서 눈인 양 날아 사면으로 흩어지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그리고 사대부들이 만경루에 대해 시를 읊은 내용도 이 내용 뒤에 언급되고 있다. 즉 청간정이 세워지기 전에는 만경루가 간성의 으뜸이었나 보다. 그러다가 조선 중종 14년(1519)에 간성 군수 최청(崔淸)이 청간역 옆에 청간정을 중수했다 혹은 이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념관에는 중수했다는 기록에 따라 고려 시대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나는 사대부들이 정식 명칭으로 청간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청이 건립한 이후라고 말한 가톨릭관동대학교 임호민 교수의 견해에 더 무게를 싣고 싶다. 이유는 '청간정'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나온 시들이 최청이 건립하기 이전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청간정은 단순한 정자였을까? 최청 시절의 청간정은 기존의 만경루를 중수하고 해당 정자를 읍정으로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옛 기록들을 보면 청간정은 역로 옆에 있던 정식 객관으로 소개하고 있다. 윤선거의 문집 <파동기행>에는 영랑호와 광호를 지나 저녁에 청간역정에 유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청간역정에 유숙하고 다음날 만경루에 올랐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온 ‘청간역정’은 정철의 손자 정양이 1665년 만경루 옆에 설립한 것이다. 그것도 누마루와 온돌방을 같이 갖춰서. 즉 만경루(최청 시절 청간정) 옆에 설립한 청간역정이 이전 것을 대체한 것이다. 조선 후기 대다수 그림도 청간역정과 만경루 그리고 바위인 만경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옛 청간정 그림들. 원래는 만경대 바위 옆 만경루와 함께 있던 객관이었다. 
김홍도가 그린 청간정. 오른쪽 두 그림이다.
심동윤과 강세황의 그림


그럼 오늘날의 청간정은 옛 위치와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다. 옛 사진을 보면 1884년 불탄 이후 청간정은 누각 돌기둥만 살아남아 있었다. 바람이 심한 바다 근처에 있던 환경이어서 그랬는지 불탄 잔해들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8년 중수될 때 안전상 해안이 아닌 오늘날 언덕 정상 부근으로 돌기둥을 이전하여 정자를 지은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선정비에 새겨진 세 명사는 사료 고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열정만으로 정자로 잘못 재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객관으로 다시 복구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 청간정이 있던 곳은 오늘날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들다. 고성군 측에서도 이곳에 청간정 원형복원과 만경대 개방을 1989년부터 추진했다고. 하지만 군 시설을 이전하는데 무려 300억 원 규모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한다. 작년 11월 ‘고성지역 문화재 발전을 위한 간담회’에서 향토사학자들이 고성군에 이 문제를 다시 언급했다고 했는데, 언제쯤 우리가 조선시대 모습의 청간정을 볼 수 있을까?


오늘날 청간정의 모습 


청간정은 작년 8월에 영남과 영동지방을 강타한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마룻바닥의 나무판이 빠지고 기둥이 손상되었다. 따라서 관광객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청간정을 마주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뻔했는데, 다행히 청간정 자료전시관 직원 분의 배려로 인해 건물 밖에서 촬영하는 조건으로 허락받아 들어갈 수 있었다.


언덕 계단을 따라 청간정에 들어가니 한자로 청간정이라고 쓰인 두 현판이 눈에 띈다. 하나는 바로 정면에 있고, 다른 하나는 건물 안 중간 부분에 보인다. 바깥쪽 정면에 있는 현판은 독립운동가 청파 김형윤 선생이 쓴 것이다. 청파 선생은 젊은 시절에는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 선생 아래서 독립군 전투에 참여했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현판 글씨가 선생의 일생대로 기개 있게 보인다. 청파 선생의 현판 이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던 현판이 있었다고 했는데, 1730년 9월 강원감사로 부임한 이진순이 철거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유는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했던 소론에 속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만경대 바위에 '청간정'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훼손된 우암의 필적을 전하기 위해 그랬다고 한다.


건물 안 청간정의 현판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친필이다. 이승만 정권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했기에 그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사실 이승만도 청파 선생처럼 독립운동가의 삶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인생 결말이 엇갈렸다. 청파 선생은 이후 본업을 유지하여 고건축물의 편액과 묵 글씨를 남기며 서예가의 명성을 유지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와 4.19부정선거로 인해 하와이로 망명하여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결말이 상반된 이들의 현판을 비교하면서 보니 뭔가 묘한 생각이 든다.


청간정 정면. 앞에 힘 있는 글씨의 현판은 청파 김형윤 선생의 작품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청간정 현판. 현판 위로 우물천정이 보인다.


누각 뒤쪽으로 가면 검은색으로 된 현판이 하나 보이는데, 한자로 된 시에 아래 ‘경신성하 심청간정 대통령 최규하’라는 문구가 들어온다. 해석하면 1980년 여름 청간정을 찾은 대통령 최규하라는 의미인데, 짧은 재위 기간 중에 청간정 유지, 보수를 지원한 대통령이어서 한시 현판이 새겨 있다. 시를 해석하면, ‘설악산과 동해보다가 상조하는 옛 누각에 오르니, 과연 이곳이야말로 관동에서 빼어나고 우수한 경치구나.’다.


이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중수기가 기록된 현판들이 안에 있는데, 정자에 올라가지 못하여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다. 이는 다음에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봐야겠다. 대신 정자 아래에서 청간 바다의 풍경에 집중하기로 했다. 정자 왼쪽 편으로 광경을 보니, 활로 된 해변과 저 멀리 섬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섬 옆으로는 가두리 양식장 이 여럿 있다. 오른쪽으로는 시가지화가 많이 진행된 천진리와 해변이 보인다.


최규하 대통령의 청간정 한시. 1980년 당시 청간정 중수를 기념하여 지은 시다.


2012년 청간정 중수기. 최청이 건립한 연대가 어긋나 있는데, 명종 15년으로 표기해서 그렇다.
청간정 왼편으로 바라본 활처럼 생긴 해변
정면 바닷가에 보이는 섬과 가두리 양식장들


이번에는 해변에 내려와서 산 위에 있는 정자를 바라보니 천진 시가지를 바라보는 망루와 같이 보였다. 그리고 오늘날 청간정을 뒤로하고 해변을 계속 걷다 보니 철조망들이 가득하다. 그렇다. 원래 철조망이 있었던 곳이 바로 옛 청간정의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안에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린 청간정 앞에 만경대 바위가 있는데, 나로서는 접근할 수 없다. 


옛 역관이었던 청간정은 언제쯤 원 위치로 복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린 복원된 관동팔경 청간정의 본모습을 언제부터 볼 수 있을까? 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군부지 보상비 문제와 요동치는 남북관계라는 상당히 어려운 난관들이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있었던 청간정 철책이 사라졌기에 그나마 복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나 싶다. 내가 봤던 두 망양정처럼, 언젠가 두 청간정의 역사를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청간정과 천진해변 시가지
청간해변의 철조망 뒤로는 군부대가 있다. 군부대 안에 만경대와 원래 청간정이 있던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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