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아미타여래를 직접 뵈며
흔히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굴 하면 경주의 석굴암을 떠올린다. 워낙 정교하게 불상을 잘 새기고, 원근법과 같은 각종 조각기법이 총동원되어서 오늘날에도 석굴암에 대한 찬사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도 석굴이 있다. 이름은 국보 제109호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석굴.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는 사람들은 이 부처 앞에서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존석굴 북동쪽에도 명물이 있다. 바로 부림 홍 씨의 집성촌인 한밤마을의 전통 돌담길이다. 오늘날의 잘 다듬어진 벽돌로 이뤄진 담장과 달리 투박한 돌들로 이뤄져 있다. 제주도 돌담길처럼 야생이 살아있는 돌담이라고 해야 할까? 부처님오신날 부계면의 두 명물을 보러 길을 나섰다.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석굴
군위 아미타여래 삼존석굴은 상주영천고속도로의 동군위 나들목에 가깝다. 나들목에서 내려와 넓게 뚫려 있는 79번 지방도를 타고 내려오면 오른쪽 편으로 삼존석굴로 가는 길이 보인다. 대구광역시나 호남지역에서 출발한다면 중앙고속도로 동명동호 나들목에서 내려, 동명지에서 79번 지방도를 따라 팔공산터널을 타고 오면 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왼쪽 편 식당가를 지나오면 오른편 아래 극락교라고 쓰여 있는 다리가 보인다. 바로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인 아미타불을 만나러 가는 길임을 보여준다. 다리를 건너면 불상 하나가 보이는데,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말아 쥔 부처의 상이 하나 보인다.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인 비로자나불좌상이다. 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고 하니 이 불상도 천 년 넘는 세월을 버텨왔다.
불상을 보니 상당히 자비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라 마음이 평안해진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어서 그런지 수많은 사람들이 불상에 동전을 남기고 갔다. 불상 아래에는 수많은 과일을 공양한 것 같은데, 특히 왼편의 파인애플과 그 아래에 있는 오렌지와 바나나가 눈에 확 들어온다. 특히 이런 날 부처님께 공양할 때는 전통 과일로 엄격하게 선정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비로자나 부처께서도 세월의 변화를 인정하신 것인가?
오른편으로 보면 특이하게 생긴 탑이 하나 있다. 1층 형태의 석탑이 하나 보이는데, 아래쪽에는 정육면체의 몸돌이 위쪽은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돌로 가지런히 쌓아 놓았다. 돌을 정교하게 만든 벽돌처럼 만들어 쌓았다. 이런 형태의 탑을 벽돌형 탑, 즉 전탑을 모방했다고 해서 모전석탑이라고 부른다. 원래는 3층이었는데, 몸돌에 자생한 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탑이 무너졌다고. 현재의 모습은 1949년 군위 우보면 보살들의 힘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모전석탑 바로 앞으로 가 정면으로 보면 바로 석불 3기의 모습이 보인다. 보통이면 모전석탑 앞 제단에서 보살들이 석불을 바라보며 부처께 기도를 드리지만,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라 아미타부처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보살뿐만 아니라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히 경주의 석굴암처럼 목조건물로 가려있지 않아서 옛 석굴의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다.
석불에 가까이 가보니 중앙의 아미타불의 모습이 특이하다. 경주 석굴암과 달리 양쪽 어깨가 다 옷으로 덮여 있고 상체의 묘사가 상당히 뛰어나다. 하지만 하체의 경우 발이 드러나지 않고 옷 안에 가려졌는데, 좁은 석굴에서 석상의 무게를 줄이는 대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장인의 고민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아미타불의 얼굴을 보면 턱이 상당히 도드라지게 조각되었는데, 중국 북제와 수나라 양식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의 오른손은 무릎 위에 있고, 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고 있는데,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때 마왕을 물리치고 지신(地神)을 불러 깨달음을 증명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보통 항마촉지인은 본존불에 새겨지지만, 정토 경전 중에 사바세계로 내려온 미타불이 석가모니의 몸을 빌려 중생에게 설법한다는 내용이 있어서 장인이 이를 차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정면으로 봤을 때 아미타부처 왼편에 있는 이는 대세지보살상, 오른편에 있는 이가 관세음보살상이다. 특히 관세음보살상의 연꽃무늬 광배가 상당히 인상 깊은데, 일부가 당나라의 삼채 양식으로 이뤄져 있다. 아미타불의 턱과 관세음보살의 광배는 이곳이 신라의 통일 이전과 당풍의 양식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삼국통일 이후까지 제작된 석굴임을 증명한다. 또한 최초 조성연대가 경주 석굴암보다 약 100여 년 빠르다는 것을 말한다.
좁은 공간에서 불상의 무게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한계가 있긴 했지만, 어찌 보면 군위 삼존석불이 있었기에 경주의 석굴암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 석굴암 제작자 김대성은 군위 석굴도 참조했을까?
한밤마을 돌담길
아미타부처를 뵙고 북동쪽에 있는 한밤마을로 향했다. 사실 이곳에 온 이유는 삼존석불에 이어 보물 제988호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보호수로 보이는 아름드리나무가 하나 보이는데, 이 마을에도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아름드리나무 뒤쪽으로는 묘비와 또 다른 소나무들로 가득한데, 임진왜란 시절 영천성을 수복하는데 선봉장이 된 송강 홍천뢰 장군과 군량 조달과 작전을 수행한 조카 혼암 홍경승 선생의 공적을 기린 곳이다. 실제 이 묘비 앞마당은 의병을 조직하여 주민들을 훈련했던 곳이기도 하다.
근데 이 두 분의 성 씨가 부림 홍 씨다. 오늘날까지도 이 가문의 종택은 여기에 있어 이들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시조는 고려 중기 재상을 지낸 홍란. 그는 원래 대야(大夜)였던 이 마을을 대율(大栗)로 고쳤는데, 어두운 밤 ‘야’자가 불길하다고 해서 먹는 밤인 ‘율’자로 고쳐 부르게 한 것이다. 대율을 우리말로 풀면 한밤. 이 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 이 마을에 밤나무는 그리 많지 않다.
아름드리나무를 지나 마을길을 쭉 올라가면 왼편 작은 사찰에 보물 제988호 군위 대율리 석조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다. 원래 이 마을에 큰 사찰이 있었는데, 폐사된 이후 이곳으로 옮겼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보이며 아래로, 왼손은 가슴 위에 올려놓았는데, 상당히 특이한 형태라고 한다.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귀가 어깨까지 늘어졌다.
석조여래입상을 지나면 내가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운 돌담길이 나온다. 마치 제주도에 볼 수 있는 투박한 돌들로 이뤄졌다. 삼존불상 앞에서 봤던 잘 다듬어진 모전석탑과 비교되는 느낌이랄까. 특히 부림 홍 씨 종택 근처 돌담은 기와와 잘 어울려서 상당히 운치 있게 보인다.
이곳에 돌담을 쌓은 이유가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마을 터를 잡을 때 땅을 팔 때마다 돌이 나와서 그걸 쌓았다는 설,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 때 큰 홍수로 수많은 가옥들이 유실되자,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떠내려 온 돌로 담을 쌓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은 돌담이 한밤마을을 독특하게 만든 1등 공신이 되었다.
군위 부계면의 두 명물인 군위삼존석굴과 한밤마을. 석굴은 자연동굴에 새겨진 신라시대 모습 그대로, 한밤마을의 돌담은 처음 쌓은 모습 그대로 남았다. 만든 이후 사람의 손이 덜 타고 거의 그대로 두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보호해야 할 명물로 된 것이 아닐는지? 군위삼존석불의 자비가 아미타불을 참배하러 오는 보살들과 한밤마을에도 가득하기를 원하며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 군위군은 2023년 7월 1일부로 경상북도에서 대구광역시로 편입되었다. 나는 군위군이 경상북도에 속했던 2022년 5월에 답사했다. 이후 군위편도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