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내에서 동편 안동댐으로 가다 보면 낙동강 뒤로 고풍스러운 고택이 있다. 고택은 50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임청각.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중종 10년(1515)년에 건립한 주택이다. 그의 후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임청각 옆으로는 전탑 하나가 고성 이 씨 탑동파 종택 앞에 우뚝 서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인 국보 제16호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안동댐을 가기 직전에는 야경이 상당히 아름다운 목조 교량이 하나 있는데, 비교적 최근인 2003년에 준공된 월영교다. 여름밤에 월영교를 거닐면 낙동강 변이 시원해서 그런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월영교를 낮에 건너면, 안동 민속촌에 전시된 옛 집들을 감상할 수 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며 수몰된 지역의 집들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항일운동의 상징 임청각, 월영교와 민속촌을 안동 시내 동편 낙동강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즐겨보자.
안동 항일운동의 상징 임청각
안동 임청각은 안동시내의 동편에 위치해 있다. 안동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시내에서 나뉘었던 길들이 낙동강을 만나면서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다. 길이 모이는 법흥교 고가에서 우측으로 빠지면 고가 아래 북서 편으로 빠지는 길이 하나 보이는데, 길을 조금만 가다 보면 왼편으로 행랑채가 가득한 고택을 하나 볼 수 있다.
보물 제182호 임청각. 임청각은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벼슬을 끝내고 1515년에 낙향하여 지은 집이다. 2002년 종손들이 국가에 반환하기까지 무려 500여 년 역사를 간직한 경상남도 고성 이 씨의 종가이기도 했다. 대문에는 국무령 이상룡 생가라는 팻말이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 왼편 행랑채로 들어가면, 그가 젊은 시절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으로 참여한 안동의진 의병활동부터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 일가족을 이끌고 어떻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만주에서 각기 흩어진 독립운동 조직을 통합하는 데 평생을 바친 그가 1932년 지병으로 타계하며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
그의 유골은 나라가 해방된 지 45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임청각 행랑채. 임청각의 역사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애를 볼 수 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
이상룡 선생의 아들과 손자, 두 동생과 조카들도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임청각은 안동에서 오래된 민가 집일 뿐만 아니라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한민국 독립역사의 요람이기도 하다. 일가의 사위 집안과 부인, 며느리들도 독립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으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족 전체가 대한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랑채 옆에는 오른편에 연못이 딸리고 툇마루가 드러난 정자가 하나 있는데, 현판에 군자정이라고 쓰여 있다. 군자정도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안을 보면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훈장증들이 걸려 있다. 대청마루 왼편에는 임청각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는데, 현판을 쓴 사람은 도산서원의 주인공인 퇴계 이황이다. 이황과 이명의 후손들 모두 예안과 안동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니, 말 그대로 군자(君子)의 모범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군자정. 중앙 돌계단 좌우로 툇마루가 도드라진다.
임청각 현판. 퇴계 이황의 글씨다. 천정은 서까래가 드러난 구조다.
임청각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들
임청각에서 고성 이 씨 탑동종택으로 가면 커다란 벽돌탑이 하나 보인다. 낙동강을 바라보는 쪽으로 감실이 하나 보이는데, 의성에서 내가 봤던 탑리 석탑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여기는 탑리 것과 달리 벽돌로 그대로 쌓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인 법흥사지 칠층전탑이다. 3층과 4층 받침돌에는 기와를 얹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목탑 양식을 모방한 증거로 보고 있다.
전탑은 일제의 만행으로 훼손된 흔적이 있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옛 흔적을 볼 수 없는 것과 감실에 있던 불상이 1930년 사라진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의 부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부조를 배치한 예는 거의 없다고.
임청각과 법흥사지 전탑은 80여 년 동안 중앙선을 지나가는 기차의 진동과 소음에 시달렸다. 다행히 최근 중앙선을 옥동 서편으로 이설하면서 이제 안도의 한숨을 쉬는 느낌이라고 할까? 선로에 있던 방음벽도 사라져 이제는 고택에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바로 바라볼 수 있다. 게다가 2025년까지 임청각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임청각 가문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역사문화공유관도 세운다고 하니 기대해 보자.
국보 제16호 법흥사지 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전탑이다. 2층과 3층 지붕돌에 기와 흔적이 있는데, 이는 목탑의 형식을 번안했음을 보여준다.
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상과 사천왕상. 기단 네 면 모두에 부조로 새겨져 있다. 기단 위에는 일제가 복원을 명분으로 시멘트를 발라버려, 옛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월영교와 안동 민속촌
임청각에서 안동댐으로 거슬러 가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한 목조 다리가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3년에 지은 월영교인데, 안동댐 때문에 시원해서 그런지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했다. 월영교 아래에는 개목나루에서 출발한 수많은 색깔로 가득한 달 모양의 보트들로 가득해 아름다운 야경을 선사한다.
목조 다리 건너편 산 중턱에 조명 위로 기와가 하나 보이는데, 조선시대 사신이나 관리의 숙소로 쓰인 선성현 객사다. 원래는 도산면 서부리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지역이 수몰되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만약 오후 4~5시경에 해 질 녘에 월영교를 건너면, 선성현 객사, 그 옆에 있는 보물 제305호 안동 석빙고 그리고 인근에 수많은 초가집들과 기와집들로 가득한 안동 민속촌을 꼭 관람하자. 안동 민속촌에 있는 집들도 역시 예안면과 도산면 수몰지역의 옛 가옥들을 옮겨왔는데, 까치구멍집을 비롯한 다양한 초가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월영교 야경. 다리 건너 저편 조명에 기와 건물이 보이는데, 선성현 객사다. 원래 예안면 서부리에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로 이전했다.
가까이서 본 선성현 객사(좌)와 보물 제305호 안동 석빙고
안동민속촌에 전시된 박분섭 까치구멍집. 집에서 발생하는 악취와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지붕 합각부(合閣部) 양쪽에 '까치집'을 닮은 구멍을 뚫었다. 주로 경북지역에 분포해 있다.
민속촌 입구를 지나고 낙동강을 계속 거닐다 보니 나루터에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하다. 왜 그런가 보니 이번 7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요일 밤 ‘청사초롱 달빛걷기’ 체험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원이 담긴 청사초롱을 만들고, 그 옆에 청사초롱 존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체험에 참여하면 오후 8시와 9시에 월영교와 안동민속촌에 대한 이야기를 가이드에게서 들을 수 있다.
청사초롱 체험뿐만 아니라 7월 말 경에 월영교를 방문한다면, 안동 문화재 야행을 절대로 놓치지 말자. 전통 등간이 걸린 월영교, 야간 고택체험, 야시장과 함께 낙동강변을 다채롭게 즐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음악공연과 더불어 하회마을에서 볼 수 있는 별신굿탈놀이, 안동놋다리밟기와 우리가 학교운동회 때 자주 본 안동차전놀이의 원류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청사초롱으로 가득한 2022년 여름 안동 개목나루 풍경
독립운동의 산실 안동 임청각과 오늘날 여름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월영교. 둘을 함께 보니 20세기 초 석주 선생의 조국을 잃은 슬픔으로 시작해서 광복 80년이 지난 후 선진국의 반열에 든 환희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압축해서 보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 사이 산업화로 인해 수몰의 사연을 겪은 도산면과 예안면의 역사도 있다.
중앙선 기차의 진동과 소음에 신음했던 임청각은 다행히 낙동강을 직접 바라보며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계획대로 간다면 2025년 문화재 야행은 99칸의 완벽한 임청각과 칠층전탑부터 월영교까지 파노라마로 이어진 낙동강을 거닐 수 있지 않을까? 3년 후의 또 다른 모습을 다시금 기대하며 월영교를 나섰다.
해질녘 임청각 전경
임청각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드디어 옛 중앙선 철로와 방음벽이 걷혔다. 2025년까지 99칸 임청각을 복원한다고 하니 기대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