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명물 외나무다리부터 독립운동의 산실 아도서숙까지
영주시가지 서편을 흐르는 서천을 따라 남쪽으로 10km 정도 가면 내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이 나온다. 내성천과 합류하는 지점에는 안동 하회마을처럼 하천을 삼면으로 하여 형성된 전통마을이 하나 있는데, 2013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된 영주 무섬마을이다. 17세기 중반 입향시조인 박수와 이후 김대가 자리 잡아 오늘날 반남 박 씨와 선성 김 씨 쌍성의 집성촌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섬마을의 명물을 꼽는다면, 원래 마을과 외부를 연결했던 유일한 통로인 외나무다리다. 1983년 수도교가 놓이며 사라졌다가 2005년에 다시 복원되었는데, 내성천의 푸른 물과 모래톱 그리고 푸른 산의 병풍이 잘 조화되는 느낌이다. 반남 박 씨 입향시조 종택인 만죽재 고택,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우당 고택, 경북에서 보기 드문 초가집인 까치구멍집들과 사회주의 항일운동의 전진기지였던 아도서숙도 무섬마을을 감상할 때 빠져서는 안 될 곳이다.
400년 역사의 영주 전통마을인 무섬마을로 가보자.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수도권에서 무섬마을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에서 내려 안동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자. 이후 적서교차로에서 빠져나가 2시 방향으로 서천을 따라 10km 정도 길을 따라가면, 오른편에 있는 승평교를 건너자. 이후 무섬마을 이정표를 따라가면 왼편에 수도교를 볼 수 있는데,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대구, 부산, 호남에서 오시는 분은 예천 나들목에서 영주로 가는 928번 지방도를 타고 조제리에서 좌회전해서 산길을 넘어가면 무섬마을로 가는 길을 볼 수 있다.
무섬마을은 내성천이 북에서 흘러오는 서천과 합류한 후 마을을 감싸면서 흐르는 구조다. 마을 뒤편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마을 앞으로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인데, 마치 하회마을과 흡사하다. 마을 이름 ‘무섬’은 오늘날 지명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이름인데, 말 그대로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의미한다.
400년 전통 마을답게 수많은 고택들로 이뤄져 있는데, 하회마을에서 볼 수 없는 중요한 구경거리가 있다. 바로 수도교를 건너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서 볼 수 있는 구불구불한 S자형 외나무다리다. 푸른 산을 병풍으로 하여 내성천과 모래톱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한다. 그래서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진 데다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들어서 수많은 인파들로 가득했다.
외나무다리는 원래 마을에서 외부를 왕래할 때 유일한 통로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외나무다리를 이야기할 때, ‘시집갈 때 가마 타고 한 번 들어오면 죽어서 상여 타고 나간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외나무다리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원래 1983년 수도교를 준공해서 철거했다가 2005년에 다시금 복원했기 때문에 그렇다. 참고로 10월 초 무섬마을에 올 기회가 있으면 외나무다리에서 시연되는 전통혼례행렬과 상여행렬이 장관인 무섬외나무다리축제를 꼭 만끽하자.
외나무다리의 폭은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정도로 좁다. 구간 구간에 옆으로 빠질 수 있는 다리 구간이 있으니 이를 유념하며 건너보자.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무섬마을 둘레길이 보이는데, 선인들의 시들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환학암이 보인다. 여기서 마을을 보니 수많은 흙으로 퇴적된 모래톱 뒤로 푸른 산을 병풍 삼은 옹기종기 모인 가옥의 풍경을 볼 수 있다.
무섬마을 고택들의 모습
마을 전경을 보고 다시 수도교로 돌아갔다. 수도교를 지나 무섬마을 안내판 바로 옆에 고택이 하나 있는데, 고택 이름은 해우당(海愚堂)이다. 선성 김 씨 입향조 김대의 셋째 손자 김영각이 1830년에 건립하고, 그의 양자이자 의금부 도사였던 김낙풍이 고종 16년(1879)에 중수한 살림집이다. 사랑채에 걸린 해우당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인데, 실제 김낙풍은 생애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내서 명사들과 교류가 활발했는데, 그중 한 명이 흥선대원군이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영주에 방문할 때 이곳에 묵곤 했다.
해우당은 김낙풍의 증손자이자 항일운동가였던 김화진의 생가이기도 하다. 김화진을 비롯하여 무섬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운동 포상자는 무려 5명이나 된다. 무섬마을의 항일운동은 의병 또는 3.1 운동에 참여했던 지역과는 좀 다른 양상을 띠는데, 1920년 후반 1930년 전반의 사회주의 농민운동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곳이 해우당 고택 북서에 있는 아도서숙이다. 1928년 김화진과 선성 김 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문맹퇴치,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을 중점 삼아 농민계몽활동을 이어갔는데 당대 사회주의 운동답게 신분계급과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배울 수 있었다. 아도서숙 운영위원들이 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다가 일제에게 구속되면서 1933년 폐쇄되고 82년이 지나서야 겨우 고증을 거쳐 아도서숙을 재건할 수 있었다.
해우당을 지나 마을 중심부로 가니 형형색색의 여름 꽃들과 야트막한 담장 뒤로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가득하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고택이 하나 있는데, 반남 박 씨 입향조 박수 선생이 1666년 이곳에 와서 최초로 지은 집인 만죽재다. 원래는 마을의 옛 이름을 따 섬계당이라고 했다가 8대손 박승훈이 중수하면서 그의 호를 따랐다. 오늘날도 13대 장손이 거주하고 있는데, 무려 360년 가까이 한 집에서 가문을 유지한 셈이다.
이후 박수의 증손녀가 김대와 결혼하는데, 김대가 처의 고향에 정착하면서, 반남 박 씨와 선성 김 씨가 공존하는 마을이 되었다. 그래서 마을의 구조를 보면 만죽재 주변으로 반남 박 씨들의 고택들이, 마을 양쪽으로 선성 김 씨의 고택들이 모여 있는 구조다.
무섬마을 기와집들의 구조는 사랑채와 안채가 엄격하게 분리된 ㅁ자형 경상도식이다. 바깥에 보이는 개방공간인 사랑채는 남성이, 중앙문을 들어가야 보이는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으로 남녀유별의 옛 유교문화가 깊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그런데 무섬마을의 초가집을 보면 지붕이 특이하게 생겼다. 지붕 용마루 양쪽으로 둥근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경상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 걸친 지역에만 볼 수 있는 형태다. 이러한 집들을 지붕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까치구멍집이라고 한다.
집을 자세히 보면 ㅁ자형 기와집들과 달리 대문을 닫으면 외부와 단절되는 구조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소백산맥의 산짐승과 폭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문제는 부엌 연기와 집안의 탁한 공기를 밖으로 보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쪽으로 구멍을 뚫은 것이다. 양쪽 구멍이 환기의 역할을 다하기 때문에 다른 초가집들과 달리 굴뚝이 없다는 것도 특징이다. 서로 반대되는 ㅁ자형 개방형 기와집과 폐쇄형 까치구멍집의 조화는 일교차와 연교차가 큰 마을의 기후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내성천을 굽이도는 곳에 위치한 400년 역사의 무섬마을. 반남 박 씨와 선성 김 씨가 함께 살아왔던 양성촌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ㅁ자형 기와집들과 까치구멍집들로 가득하다.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는 일본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던 김화진이 주도하여 아도서숙을 설립해 마을을 계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항일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다.
수도교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무섬마을의 백미인 구불구불한 S자형 외나무다리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시집 가마 타고 들어오면 죽어서 상여 타고 나갔고, 일제강점기 때는 일제에 항거한 마을 청년들이 이 다리를 건너 압송당했던 비극도 있었다. 수도교로 인해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난 오늘날에는 관광객들이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명소로 바뀌고 있다.
아직까지 여름휴가를 쓰지 않았다면 영주 무섬마을의 고택에서 묵어보는 것은 어떨까? 이미 휴가를 다녀왔다면, 10월 황금연휴에 무섬외나무다리 축제에 와서 마을 전통과 정취를 모두 즐기는 것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