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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Aug 17. 2022

영주 소수서원

자유분방한 구조로 이뤄진 한반도 최초의 사액서원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문성공 안향. 그 결과 유학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인 신진사대부가 등장하였으며, 이들은 쇠퇴하는 고려를 마무리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주요 세력이 된다. 안향의 성리학은 이후 이황의 영남학파, 이이의 기호학파, 조식의 남명학파 등으로 세분화된다.


참고로 안향의 고향은 오늘날 경북 영주시 순흥면이다. 조선 당시에는 풍기군에 속했는데, 중종 38년(1543) 당시 군수였던 주세붕이 중국의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안향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8년 후 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조정에 청원하여 조선 왕조로부터 최초로 소수(紹修)라는 서원명 현판과 노비와 서적을 지원받게 된다. 즉 국가의 공인을 받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당시 공립학교인 향교를 대신하여 사립학교인 서원의 전성시대가 도래한다.


조선 왕조 최초의 공인 사립학교이자 오늘날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영주 소수서원으로 가보자.


한반도 최초의 조선왕실 공인 사립학교,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에서 가깝다. 이제는 영주시로 흡수되었지만, 조선시대 흔적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셈이다. 나들목에 내려서 오른쪽으로 꺾은 다음 봉헌교차로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 소백로를 계속 따라가면 오른편으로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서원을 들어가기 전에는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에서도 볼 수 없는 300~500년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로 이뤄진 대규모 군락이다. 선비들이 오랜 풍파를 버텨낸 소나무들의 기상을 닮으라는 의미에서 나무들을 학자수(學者樹)라고 이름 지었다. 서원이 건립된 이후에도 지역 선비들이 소나무를 계속 심어서 그런지 오늘날까지도 더위를 식혀줄 수 있는 숲으로 남았다.


숲길을 걷다 보면, 두 개의 돌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는 불교 용구인 당(幢)을 보조하는 기둥이라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이름은 ‘숙수사지 당간지주’. 즉 서원이 있기 전 여기에 절이 있었다는 증거다. 숙수사의 법통이 언제 끊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향이 숙수사에서 공부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학문을 고향 사찰에서 시작해 이후 성리학을 들여왔다는 점에서 뭔가 의미심장하다. 하긴 고려시대는 불교와 유교가 함께 공존한 시기였으니까.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 300~500년의 세월을 견뎌낸 소나무들로 이뤄져 있는데, 지역 선비들이 나무를 꾸준히 심은 인공림이다.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서원이 세워지기 이전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다. 안향은 숙수사에서 과거 공부를 했다.


옛 절터가 오늘날 서원으로 변하게 된 계기는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향에서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이듬해 유생들을 교육하는 기관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 서다. 서원은 주자가 원장이 되어 유교의 이상 실현을 위해 오늘날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에 건립한 백록동서원을 따왔다. 


최초의 서원이라서 그런지 이후 건립된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보다 개성이 넘친다. 먼저 서원에 들어가기 전 왼쪽에 제사에 쓸 제물을 흠집 여부를 검사하는 성생단이 있다. 보통 성생단은 주로 사당 근처에 있는데, 소수서원은 특이하게 서원 입구에 있다. 오른편에는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인 경렴정이 있는데, 서원 입구에 하천을 끼고 들어선 정자가 있는 건 매우 드문 형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정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소수서원 입구. 입구 남서에 제단이 하나 보이는데, 제사에 쓸 제물의 흠집을 검사하는 성생단이다.
성생단 맞은편에 있는 경렴정. 경렴정 뒤로는 죽계천이 바로 옆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서원 내 전경도 다른 곳과 달리 상당히 차이를 보인다. 보통 강학 공간 뒤편으로 사당이 있는데, 여기는 강학 공간이 동편에, 제향 공간이 서편에 있다. 중국식 전학후묘보다는 오히려 서쪽을 으뜸으로 하는 우리 전통 방향 철학인 이서위상에 맞게 건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서원의 사당은 사(祠)라고 표기하지만, 여기는 문성공묘(文成公廟)로 표기되어 있다. 성리학을 전래한 문성공 안향을 기리고자, 격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치르는데, 이때 제향을 볼 수 있다면 주세붕이 직접 지은 ‘도동곡’이라는 경기체가를 들을 수 있다. 안향이 중국 공자의 도를 우리나라에 전래한 것을 칭송하는 노래인데, 소수서원에서만 유일하게 들을 수 있다.


문성공묘. 다른 서원과 달리 강학 공간의 서편에 위치해 있다. 문성공 안향을 기리는 제향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에 치른다.


중앙에 있는 강학당도 최초의 서원답게 특이한 구조다. 동쪽으로 향한 정면은 네 칸, 측면은 세 칸인데 다른 서원의 직사각형 강학당과 달리 정사각형에 가깝다. 남쪽에서 대청을 바라보면 명종이 친필로 내린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이 보이는데,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 중에 조정에 건의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근거이기도 하다. 


강학당 뒤로는 교사들의 집무실 겸 숙소인 일신재와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라고 쓰인 기숙사가 보이는데, 보통 서원 기숙사는 강학당 앞에 동재와 서재로 평행하여 분리되어 있지만, 여기는 한 건물로 붙어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의 경계는 널빤지나 종이, 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거는 액자인 편액으로 구분한다. 원래 일신재는 직방재에 딸린 작은 서재였는데, 순조 5년에 다시 개조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신재와 직방재 오른쪽에는 지락재와 학구재가 ㄱ자 형태로 있는데, 단이 낮아 젊은 유생들이 머문 기숙사임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403호 소수서원의 강학당. 다른 서원과 달리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조다. 강학당에서 길러낸 원생은 무려 4,000여 명이나 된다.
강학당 내부. 소수서원 현판은 명종의 친필이다. 그 아래는 문성공 향사를 주관하는 삼헌관과 집사 직책이다. 직책 아래에 담당자 이름을 표시한 분정기를 붙인다.  
강학당 뒤에 있는 일신재와 직방재. 다른 서원과 달리 한 건물로 붙어 있다.
지락재와 학구재. 서편에 있는 일신재와 직방재의 단보다 낮고 건물 형태가 작아 젊은 유생들이 머문 기숙사임을 알 수 있다.


최초 사액서원이라는 특권 때문일까? 서원의 질서가 잡히기 전이라서 그런지 건물의 구조가 너무나 자유분방하다. 학풍도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강조하여, 과거급제보다는 도학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인가 소수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당시 지어진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소수서원 박물관과 선비촌


서원에서 북동쪽으로 가면, 소수박물관이 보인다. 박물관은 영주시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해 유교의 전래와 소수서원의 역사로 이어진다.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로 시작해서, 안향이 공부했던 숙수사지와 그곳에서 발견된 불상들 그리고 소수서원을 세운 사람들의 이야기와 서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유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교과서에서만 본 안향의 초상이다.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는 구조다. 안향의 사후 12년이 지나 충숙왕 5년(1318)에 그가 문묘에 모셔지면서 그려진 고려시대 초상화다. 오늘날 초상화는 명종 14년(1559) 영정이 오래되어 갈라지면서, 화원 이불해가 이모본으로 제작한 것이다. 복제품이지만 고려시대 화풍을 잘 계승했다는 가치가 있어서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국보 제111호 안향의 초상(복제품). 오늘날 거의 전해지지 않는 고려시대 초상화 양식을 알 수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박물관을 나와 북쪽으로 가면 수많은 전통가옥들이 보인다. 2004년 영주시에서 조성한 선비촌이다. 영주 각지에 산재해 있는 고택들을 재현하여 한 곳으로 모아놓았다. 고택들은 주로 ㅁ자형 경상도식 구조다. ㅁ자로 지은 이유는 고택의 채광과 통풍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바깥에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옆 중앙 쪽문으로 들어가면 안채가 보이는 구조인데, 남녀의 공간이 철저히 분리된 가옥구조다. 고택 숙박과 염색과 공예와 같은 전통문화 체험도 가능하니,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찾아올 일이 있다면 참조하자.

분홍 배롱나무가 있는 선비촌 길을 거닐며
우금촌 두암고택의 사랑채 모형
우금촌 두암고택의 안채 모형


문성공 안향을 배향한 곳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최초의 사액서원답게 다른 서원과 달리 구조가 너무나 자유분방하다. 교육방향도 서원 특유의 자율성과 특수성을 강조하였는데, 죽계천이 펼쳐진 자연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된 느낌이다.


특히 퇴계 이황이 군수로 부임할 때, 소수서원을 과거 입시보다는 주자가 추구했던 도학을 중시하여 학문의 의미를 찾아가는 교육기관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이후 소수서원은 유학의 학문탐구에 집중하는 서원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후 다른 지역 유림들과 양반들이 기득권 유지와 영향력 확대를 위해 서원을 마구 세우게 되는데, 이는 흥선대원군이 47개 서원만 남기는 서원철폐령의 원인이 된다. 


다행히 소수서원은 최초라는 이유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소수서원의 자유분방한 구조는 나 자신도 고정관념에 빠지지 않아야겠다는 교훈을 남겼다. 초심을 잃지 않고 항상 올바른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서원을 나섰다.


소수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 왼편에는 '경(敬)'자 바위, 오른편에 있는 정자는 취한루다. '敬'은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의 머릿글자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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