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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neighbour Oct 22. 2018

함부로 갖는 연민에 대하여

빈곤을 향한 연민


길거리에서 목격되는 빈곤 현상


지하철 출구로 나가는 계단 중간 부근,

겉잡아 60세 정도 되어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노인의 굽어진 등이 보였고,
그의 신발 밑창을 보며 걸어 올라가던 계단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학생이었던 나에게 음료수 값인 2,000원.

음료수 하나를 덜 마셨다고 생각하면 내 용돈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액수.

언제부턴가 적선의 액수로 적당하다고 지정한 값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적선된 돈으로 담배나 술을 사 먹는데 써 버린다 했다.




TV에서 방송되는 빈곤 현상


더 어렸을 적 나는 불우한 사람들의 삶을 방송으로 보게 되면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그들의 사연이 궁금했고, 그들을 동정했다.


그러나 반복되자 결국 순간적으로 느끼는 동정심 같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정확히는 내 동정심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 싶었다.

그런 생각은 내가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자라나게 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사연을 제보하는 목사나 이웃이 모금액을 다 써 버린다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목격되는 기아 현상


이민을 간 캄보디아에서는 몸이 불편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훨씬 빈번했고, 일생활에 밀접해졌다.

내전 후 지뢰를 다 처리했다 했지만, 그 잔해는 산속이 아닌 도심에 휠체어 형태의 수레를 타고 다니는 어느 노인에게 남아있었다.


나보다 두어 살 어릴 것 같은 어느 누이가 자신의 동생으로 보이는 아가를 품에 안고 구걸을 했다.

차문을 열고 닫으며 옷깃을 잡는 것이 구걸의 방식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수월하게 구걸하기 위해 아가들에게 약을 먹여 아픈 듯 안겨있는 그림을 만든다 했다.





봉사의 원천은 죄책감이 아니다.


나는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다가,

이렇게 이따금씩 마주치거나 방송으로 보게 되면 갑자기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내 모순적인 마음이 싫었다.


그들에 대해 함부로 가진 연민은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죄책감만으로 매번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면해도 죄송했고, 적은 액수로도 죄송했다.

불참하는 봉사활동에 미안했고, 봉사를 일주일에 한 번가는 빈도수로도 미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앉은 레스토랑의 내부를 창가 넘어 내 또래의 아이가 자신의 동생을 안고 쳐다보고 있을 때,
밥이 쉽게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정답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밥은 내 밥이므로 맛있게 먹기로 했다.


나의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 사치는 누리되,
내가 가진 관심과 내 능력이 쓰이는 곳이 우선적으로 그들을 향하는 것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해야 현실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이뤄낼 것 같았다.




봉사의 원천은 연민이 아니다.

적어도 가장 건강하고 지속적인 동기는 아니다.


내 유한한 능력을 일방적으로 주는 사람이기보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클 수 있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 더 지속적인 방법이었다.


그들을 연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그들의 삶을 함부로 동정하면 안 된다.


그들은 가난하기 이전에 나보다 행복할 수도, 현명할 수도, 경험이 많을 수도, 용감할 수도 있는 개인이었다.


그들을 존중하고 동등하게 봐야 했다.

그렇게 해야 건강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것 같았다.




적선아닌 소비


잠실 환승 통로에서 노점 판매하시던 할머니에게서 3,000원어치의 토마토를 구매했다.

엄마는 그냥 적선하라 했지만, 할머니의 노동이 보상받는 편이 훨씬 기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다 팔릴 것 같지 않아서, 돌아갈 떄 짐이 가벼운 편이 낫이 않을까 싶었다.


일당량의 판매를 끝마치고 귀가한 집에는,

당신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이고 우리 이쁜 강아지"가 있을 수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일부 노점상들이 버려지는 과일을 가져와 판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부 노숙자가 기부금으로 술을 사 마시는 것,

일부 사연 제보자가 기부금을 훔쳐가는 것,

일부가 구걸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

그리고 노점상들이 질이 낮아 팔지 못할 제품들을 되파는 가능성을 감안하고서

기부에 인색해지지 않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적선해야 할까?


우선 3,000원이라는 액수가 나에게 큰 부담인 액수면 안되고,

3,000원이 적선이 아닌 give & take 형식의 소비면 조금 더 합리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며,

검은 봉지 속 담긴 토마토가 기왕이면 맛이 괜찮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물론 나는 토마토를 생으로 베어 물만큼 좋아하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좋아하시길 바라야 한다.




빅이슈 판매원


그런 면에서 지하철역 출구에서 뵙게 되는 '빅판' 빅이슈 판매원들과 그들의 생산을 돕는 여성 홈리스들은 자발적으로 빅이슈와 협력해서 자립을 통해 그들도 성실히 해낸다는 인식개선까지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5,000원의 소비는 일방적이고 일회성인 적선보다 훨씬 덜 부담스러울뿐더러 내가 여태 읽은 빅이슈는 내용도 꽤나 알찼다.



류준열 씨가 인터뷰 기부에 응했다는 <빅이슈코리아 170호>는 1월에 나온 턱에 뒤늦게 배달료까지 지불했지만 가히 흐뭇한 소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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