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결혼 타이밍이 안맞아서가 아니라

by 서연희

그날 새벽 끝끝내 그는 강서구를 떠나지 않았다.

친구와 맥주자리를 끝내고서라도 우리집으로 올까 했으나 그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새벽내내 불꺼진 마포구 자취방에서 온 어깨가 떨리도록 울었다.


서운해서, 슬퍼서, 아파서, 서러워서,

우리가 진짜 헤어져야해서.


아침이 밝아올쯤 까무룩 잠이들었고, 그의 전화소리에 깼다.

"나 지금 죽 포장해서 가고있어."

"오지마."

"이미 다왔어."

이번주는 그가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 가는 주말이다. '나 오늘 집에 안가고 너 간호하려고' 라는 말을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아직도 그에게 기대를 할 기운이 있는 내가 싫었다.

어제의 긴긴 밤을 나를 놓는데에 최선을 다해놓고, '짬내서' 죽을 사들고 온 저의가 뭘까.


이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취방에 들어서서 분주하게 죽을 꺼내 세팅하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어제 이랬으면 난 사랑이라 느꼈을텐데. 어제 이랬다면.


지금은 자발적 걱정도 아니고, 우러나온 사랑도 아니고, 알량한 죄책감도 아니고, 대체 뭘까? 그의 머릿속을 추측해봤다.


직장 일이 바쁜 애인이 동네에서 잠시 친구만나 스트레스 푸는 걸 이해해주지 않고, 고작 본인 감기몸살로 먼 길 와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여자친구.

곁에있어주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못갔다고해서 애인을 천하의 나쁜놈 만드는 이기적인 여자친구.

결국엔 화를 내며 잠깐의 스트레스를 풀지도,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게 만든 이기적인 여자친구.

하지만 그런 여자친구의 서운함을 이해해보려, 비효율적인 동선이지만 본가에 가기 전에 여자친구의 죽을 사들고 방문한 스윗한 나.

여자친구의 원망어린 분노를 듣고 기분이 안좋지만 아픈 여자친구 집에 들른 그릇이 넓은 나.

난 그럼에도 널 사랑해. 역시 내 사랑이 더 크다.


아마 그는 이렇게, 이 조차도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을테다. 하지만 난 이제와서 눈 앞에서 분주한 그에게 사랑도 고마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분해서 포장해왔으니 점심 저녁 나눠먹으라며 설명하는 그에게 대체 뭘 느껴야할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 침묵으로 일관했다.


왜 이제 왔냐 원망할까, 이게 지금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할까,

너의 생각으론 '죽이라도' 챙겨주러 온거겠지만.

지금와서 '죽만' 사다주고 가는게 의미있다고 생각한건가 정말?차라리 오늘 본가에 가지않고 나랑있기로 했다며 안아줬다면, 나는 다시 너와 사랑할 자신이 생겼을까.


지금 헤어지자하면, 이번주에 본가에 안갈까?

아니. 아닐거다. 바쁜 와중 '죽까지' 사온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나를 이기적이라 생각할거다.


"일어나서 이것좀 먹고 약 먹자."

"......안먹어."

"얼른 먹어, 약먹는거 보고 가게. 나 기차 시간 얼마 안남았어."


기차시간은 정해져있으니 집에서 나가는 순간 부터 헐레벌떡 뛰겠지. 이렇게 기차시간에 쫓겨 들를바엔 어제왔으면 해피엔딩이잖아. 왜 이제와서.


"아침 안먹었지?"

"응."

"같이 먹고 가. 나 어차피 두개 다 못먹어."

그가 포장해온 참치 야채죽과 전복죽 중 전복죽을 그에게 내밀었다. 난 전복죽 싫어한다며 권했더니 마지못해 숟가락을 든다.


아침부터 본인은 공복이면서 나만 챙겨먹인 사랑꾼 행세 시키고싶지도 않고, 아직 내 남자인 이사람을 빈속으로 기차를 태워 보내고 싶지 않다는 양극의 마음이 들었다.

걱정하는 마음보다는 불편한 마음으로 나를 보러 들렀을테고, 눈 앞의 헬쓱한 나보다는 몇 분 후 탑승히야하는 기차 시간이 신경쓰일 그의 성격을 알아서 나는 눈 앞의 죽이 달갑지 않았다.

깨작거리고있는데 옆에서 맛있게도 먹는 그를 보니 다시 얄밉다. 내가 혼자 밥 먹기 싫을까봐 같이 먹어주고 가는건줄 알았는데, 싹싹 비워지는 그의 그릇을 보니 그냥, 그 말이 생각났다. '밥이 넘어가냐'


내 안색과 목소리를 듣고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엉망인 모습에 '많이 아프네-' 하며 뒤늦은 걱정을 하는 음성에 눈물이 쏟아졌다.


많이 아팠다고, 아프다고 했잖아.

많이 아프면 온다며, 왜 안왔어 왜.


그는 당황하며 나를 달래려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나는 그를 뿌리쳤고 어제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생각보다 아픈 내 몰골을 보고도, 그도 어제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 진짜 나 배려안해준다..왔다갔다하기 힘든 나를 이해해줄 순 없어?나는 내가 아픈거 때문에 네가 왔다갔다 고생한다면 그게 더 신경쓰이고 마음 아파. 그래서 나 아플땐 네가 아무것도 안했으면 좋겠어. 근데 어떻게 너는 너 아픈것만 생각하고 나는 안보여?"


그도 눈물을 보였다.

자기가 그렇게 잘못한건지 그렇게 나쁜놈인건지, 자기는 배려받을 수 없는건지 답답하다며 울었다.


그의 눈물을 보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너 이제 기차 시간 됐겠다. 가. 그리고 내일 본가에서 일찍 돌아와서 만나. 이야기할거있으니까. 이건 선택지 주는게 아냐. 무조건 만나."


그를 집에서 내보내고나서는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결혼 타이밍이 안맞아서가 아니라,

가족이 될 수 없어서 헤어져야했다.

헤어져야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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