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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연우 Jul 08. 2023

장례식장에서 동창회를 하다

"윙~~!"


늦은 저녁식사 중 진동소리에 핸드폰을 들었다.

부고 카톡과 함께 친구의 짧은 글이 도착했다.


'친정아버지가 하나님 부르심을 받으셨어.

갑작스럽지만 소식 전해'


며칠 전 친구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실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소식을 전해 들을 줄은 몰랐다. 뭐라 말해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기에  절친으로서 내가 할 일은 부고를 여러 친구들에게 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핸드폰 연락처와 카톡을 뒤져가며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대략 15년 가까이 된 친구부터 최근까지 연락 주고받은 친구들까지 부고장 돌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번호가 저장되지 않은 친구들은 연락처를 알아내서 급히 소식을 전했다. 지금까지 연락을 안 하다가 부고를 전하는 게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때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라 위로와 힘이 되어줄 것 같았다. 발인이 2일 후 오전이라 발인 전날 퇴근 후에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 현장학습날이라 옷을 갖춰 입을 수 없어서 쇼핑백에 검은색 바지와 상의, 검은색 외투를 챙겼다. 하루 종일 반 아이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었기에 현장체험학습이 끝난 후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잠시 눈을 떴을 땐 어느덧 학교 앞이었다. 그만큼 많이 피곤하고 지쳤지만 옷을 갈아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해야 했다. 다행히 학교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서 잠을 잤기에 운전이 가능했다. 만약 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장례식장으로 운전하는 내내 졸았으리라.


50여분을 달려 도착한 장례식장 주차장. 다시 한번 얼굴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심히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긴장감과 엄숙함이 느껴졌다. 친구의 이름이 보이는 호실을 찾아 조용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먼저 도착한 친구가 손을 들며 아는 척을 다. 가장 먼 곳에서 제일 빨리 내려와 준 친구 A와 선배 B가 함께 앉아 있었다. 먼저 친구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히 친구는 웃는 표정으로 맞아주었고 연이어 도착하는 친구들도 속속 자리를 채워주었다. 퇴근하자마자 각 지역에서 오는 터라 조금씩 늦게 오기도 하고 길을 헤매다 찾아온 친구도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었지만 어색함은 하나 없이 모두 다 반갑고 손을 잡아주며 안부를 물었다. '어쩜 그리 그대로야!' 내지는 '정말 예뻐졌다!"와 같이 새하얀 거짓말일지라도 서로에게 아낌없이 입에 발린 말들을 하며 하하 호호 웃었다.


장례식장 한쪽에 자리 잡은 친구들은 먼저 돌아가신 아버님 소식을 물었다.

"췌장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어. 항암치료도 잘 이겨내셨고 새로 개발된 약도 잘 받아서 최근에는 제법 괜찮으셨는데 갑자기 악화되어버렸어. 사실 여기저기 암이 전이되었다고 했었는데 우리 가족들은 조금이나마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래도 어느 정도는 완치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예상했었어. 말기  암이었으니까. 그나마 병상에서 길게 고생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신게 감사해."

친구는 담담히 이야기를 하면서 이 와중에도 감사함을 이야기했다.  


"우리 아버지도 예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을때 너무 힘들었어. 장례를 치를 때는 정신없어서 잘 몰랐는데 장례식이 끝나고 아버지의 물건들과 나머지 일들을 정리할때 그리곤 갑자기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슬픔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시간이 지나니까 점차 괜찮아지기는 하더라구. 그런데 남아계신 어머니가 가장 힘들어하셨어. 옆에서 어머니 잘 챙겨드려야 할거야."

친구 C가 친구의 아픔을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야. 잘 보살펴드려야지."


친구의 이야기에 모두들 숙연해졌다. 누군가는 먼저 부모님을 떠나보냈고 또 누군가는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시지만 여기저기 편찮으신 부모님을 살펴보느라 힘든 친구들도 있었다. 어느덧 우리가 부모님의 편찮으심을 걱정하고 책임을 가져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에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한편으로는 어느새 일흔을 훌쩍 넘어 80에 가까워진 우리 부모님들이 지금까지 건강하시다는 것에 정말 감사했다. 그러나 갑자기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를 슬픔이 있을까 걱정 아닌 걱정도 했다. 친구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될 수도  있기에 남은 시간동안 부모님께 마음을 다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친구. 긴 시간이 지났어도 함께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는 언제 만나도 친숙하다. 20여 년 전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40대 중반을 넘어선  대학생부터 중고등학생 자녀들을 둔 아줌마가 되었다. 우리에겐 어떤 이야기를 해도 어느 하나 공감하지 않을 이야기는 없었다. 학교 이야기, 자녀이야기, 교육 이야기, 동물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주제로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느새 건강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 학기 초에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았어."

갑작스러운 친구 D의 말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


"그렇게 큰 수술이었으면 연락을 하지 그랬어."

친구 E가 우리를 대신해 대답을 해주었다.


"모두들 바쁜데 갑자기 연락 안 하다가 연락하는 것도 이상해서 못했지. 너무 아팠는데 치료는 잘 되었고 지금은 괜찮아."


"이제 우리가 건강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었구나. 시간 참 빠르네.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아직도 20대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말이지."


한 친구의 이야기에 모두들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에 놓인 고기와 반찬들이 하나씩 비워져 가고 다시 채워진 것처럼 우리의 끝없는 수다도 시들어져 갔다가 또 다른 주제로 채워지길  시간쯤 지났을까?


"이제 시간이 많이 되었네. 먼저 자리를 일어나야 할 거 같아. 미안해."

한 친구가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아니야, 우리도 이제 가야지."

"다들 너무 반가웠어. 우리 또 언제 만나지?"

"그러게. 모두들 바쁘니까 아마도 방학 때가 좋지 않을까?"

"이러다가 다음 모임에는 자녀들 결혼식에나 함께 모이겠다."

"하하하,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아니면 다음번에는 또 다른 장례식장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에고.. 이왕이면 장례식장에서 보는 것보다 좋은 일로 자주 봤으면 좋겠다."

"이제는 자주 모이도록 해야지. 오래간만에 보니까 너무 좋은데 말이야."

하나둘씩 자기 짐을 챙기며 오고 가는 말들 속에서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이렇게 함께 모이니까 정말 좋다. 모두들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방학 때 모임을 추진해 보자고."

"오케이!"

그렇게 우리는 다음 만날 날짜를 정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꼭 만나자는 무언의 약속을 다. 


친구 아버님의 부고로 모인 장례식장에서 짧은 동창회를 마친 이 기분. 뭐랄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죽음을 애도하지만 한편으로는 남은 사람들끼리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다짐하는 자리. 그렇게 우린 짧은 만남을 쉬워하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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