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 윤 Mar 03. 2020

번외편 3월 2일의 일기

잠깐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사실 나는 지금 브런치에 들어와 있으면 안 된다. 이 시각(밤 12시)에 컴퓨터를 켜는 것은 보통 작업할 글을 쓰기 위해서거나 혹은 쓰기 싫어서 미루다가 맘이 급해진 후에야 들어오거나 어찌 됐든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아무 생각 없이 브런치 앱을 열었는데 그제 올린 글이 조회수 1000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서 처음엔 뭔가 잘못된 줄 알았는데, 이윽고 3000, 5000이 넘어가기에 혹시나 싶어 찾아보았더니 브런치 메인 화면과 다음 메인 어딘가에서 내 글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그래서 였구나!

나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다른 사람이 봐주지 않는다면 자기만족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나도 몰랐던 내 안의 관종력) 열심히 몇 년을 매달려 써놓은 대본이 아무리 맘에 들게 나왔어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공연화 되지 못하면 실망스러운 것처럼 스스로를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결국에는 누군가에게 읽히고 공감을 나누고 소통을 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것이 지금 내가 작업을 하지 못하고 브런치에 들어와 글을 쓰는 이유다.

-신난다. 더불어 이 모자라고 창피한 글들이 낯선 사람들에 의해 몇천 번이나 조회를 당했다는 것에 수치사 하기 직전이다.




실은 지난주에 모 지원사업에서 내 작품이 최종 선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간 내가 접해온 공모전들은 붙은 경우, 보통은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개인 연락을 주었기에 (그래 봤자 그 경험은 몇 번 안된다) 발표일이던 날 오후까지 연락이 없는 것을 보고 아, 역시나 떨어졌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오히려 편안하게 버스에 올랐더랬다. 헌데 한 30분 후, 아는 동생이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무척 흥분되어서는 선정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화면을 캡처한 것을 보내준다.

공고 목록에는 작품의 제목과 내 이름이 있었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나는 햇병아리 작가라 이런 소식을 들으면 기쁨과 혼란이 뒤섞여 섞이면 안 될 노른자와 흰자의  뒤섞임을 목격한 제빵사처럼 패닉 상태가 된다. 이윽고 전화는 연거푸 울리기 시작했고 얼떨떨함 반, 기쁨반, 놀람 반의 쓰리콤보로 인한 무중력 상태가 되어 대학로에 도착했다.




내가 행운의 여신이라고 부르게 된 N양이 있다. 작년에 모 지원사업에 최종 합격했을 때도 나는 그녀를 만나는 중이었다. 오늘도 역시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는데 이 친구가 내 선정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오는 길에 사 왔다며 축하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닌가.


"언니 글 쓰다가 힘들 때 힐링하라고요."


N이 내민 것은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예쁜 색깔과 향을 가진 R사의 입욕제였다.


-잠깐 얘기하자면, 한창 힘들던 시기에 친구 녀석이 생일 선물로 이 브랜드의 유자+코코넛 향 바디워시를 선물해줬었다. 그다지 기쁜 일이 없던 나는 주어진 하루를 마지못해 보내고 있었는데, 그날 그 친구를 만나고 나서 받은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니 향이 너무나 상큼해서 기분이 급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우울함에 향기 테라피가 효과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리고 더불어 씻을 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난다고나 할까. (음, 씻을 때마다 내 생각해!라고 하긴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될 줄은....) 이후로 이 회사 바디 제품에 빠지게 되었고 친구가 준 향의 바디워시를 제일 큰 걸로 연달아 두통이나 썼더랬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더불어 행복했다. 내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 축하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몇몇 친구들의 진심 어린 카톡과 울려대는 전화와, 축하를 위한 작은 선물에 나는 다시 한번 사람에게서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N양은 앞으로 모든 공모전 발표일에 나를 만나기로 했다. 잘 부탁해. 행신 OOO양. )


다시 서두로 돌아와서,

해서 무슨 일로 컴퓨터를 켰었냐면, 이 대본을 읽은 연출 친구에게 받은 피드백대로 대본을 수정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신기한 게 글이란 것은 취미로 쓸 때는 재밌다가 막상 작가가 되어 일로서 미션(=코멘트)을 받으면 때때로 하기 싫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해해줘야 한다. 이 작품은 무려 3년을 잡고 있었다. 만지기 싫을 만도 하지 않은가.
하기사, 취미가 전공이 되었을 때 '하기 싫어증'에 걸리는 것은 음악 할 때도 그렇긴 했다. (취미가 전공이 된 사람. 하지만 그것은 내 어머니의 뛰어난 통찰력이자 계획이었다. 어머니, 당신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악기를 전공하면서 내가 가장 자신 있게 '덕분에 이건 잘하지!'라고 생각하는 점은 의외로 '끈기 있게 계속하는 것'이다. 몇 시간씩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악기를 연주하던 시절의 습관은 그대로 남아서 엉덩이 싸움이라는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쩔쩔매며 수업 따라가기 바쁘던 작가 지망생은 쉬지 않고 계속 써서 일련의 성과들을 거둘 수 있었고 내가 쓴 대본이 배우들의 손에서 실제 인물로 태어나는 기쁨을 맞이 할 수 있었다.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면서 나는 두 가지 글을 쓰고 싶었다. 하나는 내 개인사(=이혼)를 담담히 적어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것.  그래서 누군가 "혹시 너.... 신랑은...." "무슨 일 있어?"라고 했을 때 말없이 브런치 글을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는 것. 또 하나는 극작가의 꿈을 꾸고 이루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날들과 그로 인한 경험담을 적어보는 것이다.


나는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

극작을 하면서 언젠가 마음이 괜찮아지면 내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처럼, 그 시도가 두 번쯤은 실패한 뒤에야 지금의 이혼 일기를 쓸 수 있게 된 것처럼 어디선가 이혼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과 이로 인해 아팠던, 나와 비슷한 마음의 결을 가진 사람들을 글을 통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내가 더욱 성장할 수 있기를, 조금 더 나아가 함께 공감을 나누며 위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어느새 컴퓨터 앞에 앉은 지 1시간이나 지났다. 다시 초조해진다. 맨날 놀다가 글 쓴다고 한 소리 하시는 엄마 말씀에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잽싸게 커피를 타서 방으로 돌아왔다. 늦었지만 내일 미팅을 위해서 밤을 새울 참이다.


또다시 밤을 새우는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조금씩 자랄 수 있는 날들도 계속될 것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호흡을 들이쉬어 본다.

고쳐보자. 가진 건 끈기뿐이니까. 이제 시작이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