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키워드
가짜 일기 vs. 진짜 일기
일기 쓰기 하면 생각나는 게 딱.. 2가지가 잇다
하나는 국민학교 때 쓰던 일기장이 삼삼하게 떠오르면서 날씨란에 '오늘은 맑음'이라 쓰고 소소한 이야기 몇 줄을 적은 후 그다음 날엔 어제와 같음..이라고 썼던 기억이고
또 하나는 방학숙제로 주어지는 일기 쓰기인데 처음 며칠은 정직한 일기 쓰기를 하지만 그 후엔 손을 놓고 잇다가 겨우 개학 며칠 전에서야 부랴부랴 몰아 쓰느라고 가짜 일기를 만들어 낸 일이다
하루는 맑음 또 하루는 흐림 등으로 날씨 위조에 내용 역시 그럴듯하게 꾸며서 써내었다
이런 짓을 국민학교 6학년 마칠 때까지 하다 보니 가짜 일기 쓰기의 달인이 되어 이었고 이 달인의 능력으로 중, 고등학교에선 위문편지 대필자가 되어 버렸다
어른이 되어서도 진짜 일기를 쓰기보다 언제나 하루하루의 중요한 것들만 간단히 수첩에 메모해 두는 정도였다 물론 종종 일기처럼 기록을 하는 날도 잇긴 했지만 늘 프래너에 몇 자 적는 게 고작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는 바빠진 일상 속에서 일기 쓰기는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이제 자유로운 시간이 많아졌음에도 일기 쓰기는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고 늘 그랬듯이 그날그날의 중요한 일중심으로 메모해 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고
갑작스러운 시어머님 장례식이 이어지더니 건강상의 문제로 나 역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은퇴를 하게 되었다
코로나 시절이라 혼자 놀기를 향하고 또 그러다 보니 혼자 산책하며 책 읽는 재미에 쏙 빠져들면서 오히려 이 시간들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산책하며 건져 올린 생각들을 적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기다운 걸 쓸 수 있게 되었고 이즈음에 인스타를 하기 시작하면서 일기 중의 한 부분을 공유하는 날들을 계속해 나갓 ㅆ다
남들은 힘들다는 코로나 기간 중에 나는 여유로운 백조 생활을 통한 생활의 기록들이 주는 기쁨에 확"~빠져들고 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쟈 취업의 기회가 찾아왔고 다시 직장을 다니면서는 도무지 이런 기쁨을 누릴 시간이 없었다 이 직장은 밤 근무와 낮 근무를 교대로 해야 하기에 특히나 밤 근무 때면 모든 걸 뒤로 하고 오직 잠을 잘 잘 수 있게 하는 것에 집중을 해야 했고 다시 출근을 하면서부터는 백조 생활로 누렸던 활동의 거의 대부분을 접어야 했기에 그나마 간단한 메모조차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때 다가온 <위로되는 글쓰기> 모임에 함께 하면서 일기 쓰기가 시작되었다
매일 일기 써서 인증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기를 쓰고 출근 전에 올려두고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왔다
★일기 쓰기는 잠시라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 ★기쁘고 즐겁게 하루의 삶을 기록하게 된다
★쓰는 연습으로 글쓰기 근육도 키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요
또 ★기대하는 만큼의 멋진 글들이 탄생되는 그날을 기다리는 설렘까지 보너스로 준다(일기 쓰기 4 행시 ㅎㅎ)
이런 즐거움으로 오늘도 나는
일기 쓰기에 열심이고
일기 쓰기로 성장하는 글쓰기와
일기 쓰기로 퍼 담아내는 철학의 깊이와 사색의 찬란한 빛깔들의 잔치 속에 웃으며 서 잇다
최성은@life_coaching.sue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일기' 하면 떠오르는 게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초등학교 때 일기장을 제출하면 선생님이 읽고, 빨간 펜으로 선생님의 생각을 맨 아래 적어주시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고등학교 때인가 오빠 방에서 오빠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며 사춘기 남학생의 고민과 고뇌를 간접 경험한 것이다. 이런 나의 훔쳐보기 경험 때문일까 아직까지 일기장이라는 것을 두고 그곳에 기록을 하기가 살짝 두렵다. 누군가가 나만의 비밀을, 혹은 진심을 알게 되면 어쩌지 하는 염려가 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구글 독스에 기록하는 것인데, 종이 위에 펜으로 써내려 가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나에게 일기 쓰기란 잊혀 가는 기억을 붙들어 두는 행위이다. 기억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 당시의 나의 감정과 함께 담겨있기에 다시 읽어보면 그때의 나의 감정이 다시 떠오른다. 마치 호주머니 안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동전들을 동전 지갑 안에 잘 넣어서 보관하는 기분이 든다.
신혼 초, 시댁에서 어른들과 같이 살 때 답답한 마음을 어디에 풀 곳이 없어, 백일 남짓 한 큰 아이를 포대기에 둘러업고, 동네 아파트 놀이터를 하염없이 돌았던 기억이 난다. 왜 그때는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게 힐링이 될 수 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을까. 무조건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아야만 된다고 생각했고, 내 주변에는 내 이야기를 맘 놓고 털어놓을, 또 들어줄 이가 없었다. 가끔 옛날을 돌이켜 보며, "아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게 있다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신문 읽을 시간도 없었으니, 내 마음을 종이 위에 끄적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을 리 만무하기도 하다. 일기 쓰기 즉 기록의 힘이란, 점점 희미해지는 기억 속의 과거와 현재를 묶어 주는 것, 또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바통을 전달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몇 년 전인가,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에 대해 듣게 되었고 침대 옆 탁자에 다이어리를 놓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감사하는 일'을 적는 게 일상이 된 적이 있었다. 감사 일기를 쓰는 동안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마음의 평안이 있었고, 감사라는 화두를 놓고 끊임없이 하루를 되돌아보며 소소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고자 애썼다. 현재의 나의 모습에서 감사와 만족을 찾으니,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긍정적으로 변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관대해진 나를 볼 수 있었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일기는 밤에 쓰게 되었을까? 어차피 나와의 대화라면 아침에 일기를 쓰든, 하루 중 나 자신과 대면할 필요가 있을 때, 낮시간 동안에 써도 무방할 텐데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나도 가끔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다. 일기를 쓰며 '내 안의 나'를 만나 못마땅한 내 성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그리고 때론 후회를, 위로를, 격려를, 그리고 칭찬을 해줄 때도 있다. 남이 나를 알아봐 주길 기다려야 할까? 그냥 내가 나 자신에게 어깨 토닥이며 지금 잘하고 있다고, 또 앞으로도 잘 될 것이고, 잘 될 수밖에 없다고 나를 믿어주면 되는 것 아닐까?
소냐민정 @mjk_immigration
다시 한번 더 순도 100%
<위로하는 글쓰기> 모임에 함께하며 매일 일기를 쓰고 인증을 하면서 나의 흥미로운 모습을 인식했다. 100% 순도로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일기를 쓰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보여주어도 될만한 일기를 쓰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과 누군가 내 일기를 몰래 훔쳐볼 것만 같은 불안감을 자주 느낀다는 것이다. 그 불안감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타인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을 들켜버린 것만 같은 수치감이었다. 이런 나의 행동과 감정을 궁금해하고 있자니 무의식은 100% 순도로 일기를 쓰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나를 되돌려 놓았다.
그 시절 군에 복무하시던 아빠는 주말마다 군에 적응을 잘 못하는 사병들을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집밥을 먹이셨다. 그날은 그 여느 날과 조금 달랐는데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하신 후라 교자상 위에는 집밥 대신 치킨과 족발이 있었다. 사병들이 허기를 채우고 대화가 오갈 즈음이 되면 아빠의 유일한 기쁨은 언니와 나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 나는 일기 쓰기 숙제를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해서 상장을 받았고 아빠가 상장을 들어 자랑하니 몇몇 사병들이 나의 일기장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한 반응에 신이 난 아빠는 내 일기장이 트로피라도 되는 양 들고 와서는 사병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때였다. “일기장에 그 이야기 쓰지 않았었니? 사병들이 보지 못하게 어서 가서 가져오렴.” 엄마가 다급한 목소리로 귓속말을 하셨다. 한창 칭찬에 취해있던 나는 마지못해 일기장을 되돌려 받아왔다.
요 며칠 내 일기장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엄마가 버스를 탔는데 버스기사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엄마가 버스 안에서 구르는 사고가 있었고 그 때문에 내 동생을 잃었다고 했다. 매일매일 엄마 배에 대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동생과 대화를 나누는 그 행복감을 이제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급 브레이크를 밟은 버스 기사 아저씨가 야속했고 하필 왜 그때 엄마는 그 버스를 탔을까, 그 모든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들을 나열하며 화를 내다가 어느 순간 분노는 깊은 슬픔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우울한 감정에 침잠했다. 슬픔의 계곡에 빠진 나를 일기 쓰기가 조금씩 건져내고 있었다.
엄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실 내게 큰 슬픔을 주었던 버스 사건은 나를 배려한 엄마의 거짓말이었다.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가문에 19살에 시집와서 아들을 낳지 못해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던 엄마는 그 한을 풀기 위해 늦둥이를 임신했지만 딸이라는 것을 알고 어렵게 낙태를 결정했다고 했다. 사실을 알고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감정을 일기장에 풀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가슴에 묻었고 그 후로 나는 그 일에 대해 함구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초등학교 3학년의 모습으로 사병들에게 보여주어도 될 만한 일기를 쓰고 있었다. 동시에 그 일의 실상을 들켜버릴 것만 같아 불안해하기도 했다. 20여 년 만에 다시 100% 순수한 일기를 쓰며 나를 건져줄 일기 쓰기를 통해 늦었지만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여동생의 죽음도 함께 애도한다.
루시 @lufly_lucy
일기와 추억 박스
최근 캐나다 분들과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다시라고 하기에는 난 일기를 오랫동안 써오지 않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숙제로 제출한 방학 동안의 일기 외에는 기억나는 일기가 별로 없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여행을 좋아했던 난 여행일지를 일기처럼 작성해서 사진과 함께 간단한 일정과 느낌들을 적기는 했지만 하루를 마무리하며 지난 시간을 반성하고, 감사하고, 또 미래를 계획했던 그런 일기는 써본 적이 없다.
일기 쓰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어젯밤 나는 나의 오래된 추억 박스를 열어보았다. 추억 박스란….. 4년 전 부모님이 캐나다에 오셨을 때 결혼 전 내가 쓰던 물건이라며 챙겨 오신 나의 손때가 묻은 잡동사니 박스다. 이 소중한 것을 4년 동안 열어볼 생각도 않고 잊고 있었다니……
박스를 열자 혼란스러움이 밀려온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일기를 썼었다고?? 그 박스 안에는 대학교 4년 동안 내가 써왔던 일기장들이 들어 있었다. 일기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에게서 받은 편지와 심지어 노트를 쭉 찢어서 적어놓은 친구들의 짧은 메모까지 다 들어있었다. 20대의 어린 나. 내가 기록한 일기장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었던가. 캐나다에 이민 온 후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예전의 나는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나의 청춘이 열정, 행복, 기쁨, 도전, 성공 같은 것들로만 가득하다면 좋으련만…. 약간은 떨리고 두려운 맘으로 일기장을 읽어 내려갔다. 기억이 난다. 언젠가부터 자꾸 일기장에 부정적인 불만만 써 내려가는 내가 싫어서 읽기 쓰기를 그만두기로 했던 그때의 순간이.
호기심 많은 대학생활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곳저곳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나의 어린 시절. 경험하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귀여운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 조금씩 이성에 눈을 뜨면서 속앓이를 하는 나도 보인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도 안나는 사람인데 일기장 속에 나는 정말 안쓰러울 만큼 진지하다. 동생들의 대학 진학 문제로 입학 원서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나, 대학교 등록금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나, 할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그런 부모님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나. 국가 부도의 날, 그 삶의 현장 중심에서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 마음을 자식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시는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을 이해하며 혼자서 속상해하며 고민하는 어린 나.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법했을 기회들을, 돈이 없고 자신이 없어 포기했던 겁 많은 나. 미련하게 공부를 끝까지 마치겠다고 동생들 희생시켜가며 내 몸 망가져가며 연구실에 처박혀 공부하고 있던 어리석고 융통성 하나 없는 나.
그래도 잊지 않고 하루 일기를 끝낼 때마다 ‘괜찮아, 잘될 거야,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나를 만났다. 2022년 지금 같은 시기라면 유튜브를 통해 자기 계발 채널이나, 힐링 채널, 메디테이션 채널 등 다양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좀 더 위로하고 단단하게 키웠을 텐데…. 심지어 요즘은 책도 얼마나 많은데!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과거의 나의 결정에 대한 후회와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글쓰기를 통해 나의 과거 일기에서 발견한 것들은, 그때는 몰랐던 아주 소중한 보물들이었다.
그때 그 시기에 내 옆에서 묵묵히 나를 위로해주고 기다려주고 나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공감해줬던 내 동생들과 내 친구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것이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다 큰 어른이 되어 다시 돌아간 그때의 그 시간에는 늘 묵묵히 나와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전혀 당연하지 않은 따뜻한 손길들이 있었다. 노란 꽃 사진이 실린 잡지 한 장을 어디서 찢어왔는지…“꽃이 별처럼 생겼지. 넌 나중에 예쁜 별이 될 거야. 이 꽃처럼… ”이라고 메모지에 적어서 책 속에 꽂아준 내 친구. 뭐하나 야무지게 하는 것 없이 덜렁대며 실수만 하는 나에게 작은 수첩을 만들어 나의 실수를 쭈욱 나열해 놓고 그래서 내가 특별하고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라며 나를 응원해 주는 내 친구. 답답해하는 날 위해 일출이나 보러 가자며 갑작스럽게 정동진으로 가는 기차에 태운 내 친구.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등록금에 보태 쓰라고 편지와 함께 건네준 착한 내 동생들. 그리고….. 거의 매일 딸에게 사랑한다. 너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너를 응원한다며 잊지 않고 이메일을 보내주셨던 우리 아빠.
이제 알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20대 그 순간 너무 내 감정에 집중한 나머지 이 사랑들에 감사할 줄 몰랐었다.
난 여전히 20대의 그때의 어린 나처럼 배우고 싶은 것도 많고, 도전하고 싶은 것도 많다. 낯선 캐나다 땅에서의 매일매일의 순간이 나에게는 도전이다. 하지만 이번 두 번째 스무 살에는 좀 더 성숙해진 내가 되길 기대해본다.
잊지 않고 묵묵히 내 옆에서 나를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커뮤티니에서 만난 모든 멤버들. 이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절대 잊거나 박스에 담아두는 일은 없어야겠다.
오늘 나는 한국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다. 미안함과 고마움을 이렇게 전화로라도 전하지 못하면 나의 어린 20대가 정말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질 것만 같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도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 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지금부터의 나의 일기장에 채워나가고 싶다.
패미로열 @canada_famiroyale
그 시절의 ‘방구소녀’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요즘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채워가고 있는지 어떤 자세로 삶을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핑계 아닌 핑계들로 하루가 부족하다. 24시간이 모자라 잠자기도 부족한 나날들이라고 스스로에게 게을러질 수 있는 이유를 갖다 대며 합리화하기 바쁘다. 나태하고 미뤄도 괜찮다고 애써 이유를 쥐어주는 듯한 시간 속에서 다시 시작한 일기 쓰기를 하면서 늦게라도 나의 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한 자 한 자 정성이 담긴 하루도 있지만 그저 채우기만 하고 ‘하긴 했다’는 안도의 마음으로 보낸 하루들도 눈에 보이지만 그 뒤엔 왠지 모를 쓸쓸함과 아쉬움. 그리고 참 애쓰며 산다는 안쓰러움도 스스로에게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시절 어린 나는 ‘방구소녀’였다. 동네 작은 문방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항상 기웃거리고 들어가 이것저것 아기자기한 필기구며 노트들을 보며 좋아서 히죽거리기도 하고 소장하고 싶은 물건들을 위해 용돈을 열심히 모으기도 하고, 그것들을 책상 앞에 소중히 놓아두기도 했던 기억들이 선하다.
학생 때에도 그리고 20대에도 여전했던 나의 ‘방구소녀’취미. 그런데 30대가 되서부터 시들해지고 길을 가다 문방구를 보아도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문방구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방구소녀'의 나는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사회인으로서의 어른이 되었다.
40대가 돼서 아이들과 현실의 삶에 바쁘다며 한 달에 한번 일기를 쓰는 게 고작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 쓰기, 글쓰기를 좋아해서 작가가 꿈이었던 방구소녀는 어느 순간 그저 흐릿한 기억으로만 존재한 채 현실에서는 그날의 할 일들, 아이들의 스케줄들만 빼곡히 적힌 스케줄 노트 같은 일기장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나를 보았을 때 순간 먹먹해오는 감정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일기장을 보다가 다시 글을 쓰고 싶어져 좋아하는 펜을 구매하고 마음에 드는 노트에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매일이 아니어도, 인증을 위해서라 하더라도, 가끔은 쥐어짜 내는 일기라 할지라도, 이렇게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큰 동기부여가 된다.
새롭다. 왈칵 쏟아지지는 않지만 뭉글뭉글 맺힌 눈가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왠지 모를 위로가 내게 전해지는 느낌에 일기를 쓰는 5분의 짧은 시간에도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
그래, 엄마라 불리고 아내라 불리고 세상에선 아줌마라고도 불리는 나지만 여전히 내 일기장에서 나는 문방구를 사랑했던 ‘방구소녀’이고 글을 쓰기 좋아하는 여자이고 작가를 꿈꾸던 시절을 간직하는 여전히 꿈을 꾸는 어른이다.
그렇게 난 다시 작가의 꿈을 꾸기로 했다.
하루 @mind_here_
누군가의 ‘엄마’에서 ‘내’가 되는 경험
초등학생 때 가장 버거웠던 숙제는 단연 ‘일기 쓰기’였다. 놀기 바빴던 어린 시절, 나는 늘 일기가 밀려서 한 달 치를 한 번에 썼던 기억이 있다. 그다음 해엔 조금 더 머리를 써서, 벽에 있던 달력에 날씨를 표시해 놓았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엔 졸린 눈을 비비며, 왜 일기를 써야 하는지 조차도 모른 채, 씩씩거리며 일기를 썼다. 매일 고무줄놀이와 술래잡기를 하며, 또래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다가 엄마가 부르시면, 들어가 저녁을 먹고, 좋아하는 만화를 한 시간 정도 보았다. 보통의 나의 일과는 비슷했다. 특별한 일이 별로 없었던 그때에는 일기가 참 쓰기 어려웠다.
고등학생이 되어 클럽 활동을 하면서, 특별히 친했던 선배들과 교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하며, 선배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함께 담아 열심히 썼다. 꾸미기도 잘 못하면서도 열심히 꾸미고, 글씨체도 이렇게 저렇게 바꾸어 가면서 썼다. 일기 쓰기 하나에 그렇게 정성을 쏟았다. 일기 노트가 쌓여 갈수록 선배들과의 우정도 돈독해지는 느낌이었다. 청소년기의 나의 일기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기였다.
스무 살이 넘어서 썼던 일기는 ‘일기’라기보다는 ‘다이어리 쓰기’가 더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연 초에 예쁜 다이어리를 고르는 재미가 있었고, 그 다이어리를 일 년 동안 소중히 다루며 나의 일상을 담았다. 하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일기라는 말보다는 스케줄러에 가까웠던 것 같다. 달력 모양의 바둑판에 그날 있었던 일과 나의 약속 스케줄들이 여기저기 어수선하게 들어가 있는 모습…… 그래도 일 년이 지나 다시 들추어 볼 때, 그때 그 시간들 속 분위기, 냄새, 기분 등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곤 했다. 그때엔 참 무언가를 잘 버리지도 못하고 그 다이어리들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책장에 꽂아 두고, 가끔 꺼내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내 나이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이하고, 다시 일기를 쓰려고 다짐했다. 막상 노트를 찾고, 펼치고 보니, 하얀 백지가 내 마음을 대변하듯 막막하기만 했다. ‘맞아, 일기는 하루를 돌아보며, 자아성찰을 하는 시간이지’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돌아보았다. 전업주부인 나에게 하루란, 도시락 싸고, 아이들 학교 보내고, 설거지와 빨래, 간단한 점심 후 아이들 픽업, 아이들 방과 후 활동에 데려다 주기, 저녁식사 준비, 저녁 먹고 아이들 재우기…… 늘 쳇바퀴 같은 나의 일상을 떠올리자 우울감만 커졌다. 내 이름 석자는 어딘가 사라져 가고, 누군가의 엄마로 바뀌어 가고 있는 나의 일상이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도 의욕도 열정도 사라지게 만들어 버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다시는 일기를 쓰지 못할지도 몰라.” 무엇이라도 써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노트를 펼치고, 펜을 잡았다. 그때, 제일 먼저 생각났던 단어가 '책임감'이었다. 나는 그 단어에 대한 나의 느낌을 썼다. 그것이 내 마흔의 첫 번째 일기였다.
그 이후 강의를 통해 일기를 쓰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익혔다. 지금은 단순하게,
오늘 나빴던 일
오늘 좋았던 일
감사
내일 할 일
로 나누어서 쓴다. 하루의 일과가 정리가 되고, 감사로 마무리하고 나면 뿌듯해진다. 하지만 아직까지 문장으로 일기를 쓰는 것이 쉽지 않다. 문장으로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매일 더 나은 모습의 일기를 쓰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정보은
쓰는 일기, 읽히는 일기
마냥 즐겁기만 했던 초등학교(입학할 때는 국민학교였으나 졸업할 때는 초등학교였으니 초등학교라고 하기로 한다.) 시절, 나는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꽤나 즐기던 아이였다. 그래서 일기를 열심히 썼다. ‘일기 쓰기’는 내게 숙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주어진 숙제를 훌륭히 완수해 냈을 때 얻어지는 인정이나 칭찬, 만족감이 좋았던 것 같다.
그 시절, 나의 일기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매일 밤 내 숙제를 확인하는 엄마에게 읽히고, 다음날 반 선생님께 한번 더 읽혔다.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정선생님은 매일 인상 깊은 일기 두 세편을 반에서 크게 읽어주시곤 했기에, 내 일기가 선택이라도 받는 날이면 나의 일기는 엄마와 선생님을 거쳐 우리 반 50여 명의 친구들과도 공유가 되는 셈이었다(아, 물론 나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독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일기를 더욱 열심히 썼다. ‘잘’ 쓰면 ‘잘' 썼다고 칭찬받을 수 있었고, 반 친구들 앞에서 으쓱해질 수 있었다.
이처럼 내 유년시절의 일기란, 언제나 나 이외의 독자가 있는 글이었다. 엄마에게 혼날 것 같은 생각이나, 선생님께 창피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적을 수 없는 곳, 일기장은 그런 것이었다. 같은 반 남학생에게 반해버려 일기장에 언급을 하니 다음날 선생님께서 그 친구를 내 짝꿍으로 만들어주신 잊지 못할 일화도 있었고, 우리 반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적은 내용을 선생님께서 다음날 모두에게 읽어주셔서 친구들 간에 오해를 풀게 된 일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나는 매일 밤 일기를 쓸 때마다, 엄마와 선생님이라는 ‘독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흔 살이 된 지금, 나는 열 살의 나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그때, 나의 일기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면 나는 조금은 다른 생각과 감정들을 꺼내놓았을까? 고작 열 살짜리 소녀에게도 엄마나 선생님께 보여줄 수 없는 마음 깊은 곳 이야기들이 있었을까? 미처 적지 못한 그 이야기들은 결국 어디로 갔을까? 마음 한편 어딘가 웅크리고 있다가 딱지처럼 굳었을까, 과거의 어느 시점, 내게 귀를 기울여준 누군가에게로 흘러들어 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흐르는 시간의 파도에 함께 휩쓸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을까?
앤 @ggoomhoy
또 그 어떤 열매로
요즘 내가 가장 의지(依支)하는 말은, 사람의 의지(意志)는 원래 약하다는 말이다. 나만 유난히 의지가 박약하여 작심삼일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원래 그렇다는 진실을, 내가 게으르고 의지가 약한 것에 대한 위로로 삼는다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도(성공한 사람 본인들의 말에 따르면) 의지가 강해서 성공했다기보다 처음의 열정과 각오를 유지시킬 수 있는 환경 세팅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경 세팅이 의도치 않게 잘 되었던 걸까, 작심삼일이 취미, 용두사미가 특기인 나도 내 인생에서 꾸준히 한 게 딱 하나 있긴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가장 처음으로 선생님께 받았던 숙제, 바로 일기 쓰기였다. 8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10년 동안 (거의) 매일 쓴 일기는 60여 권의 빛바랜 일기장에 담겨 아직도 본가의 작은 방의 책장 구석에서 세월의 먼지를 받아내며 내 유일무이했던 끈기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나도 처음부터 일기 쓰기가 좋아서 꾸준히 썼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너무너무 쓰기 싫었다. 딱히 쓸 말도 없는데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매번 고민하는 것도 싫었고, 내가 원할 때가 아닌, '매일'이라는 강박을 가지게 만드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싫었던 이유는, 일기는 솔직하게 써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담임 선생님은 그 '솔직한 일기'를 검사 명목으로 마음껏 본다는 점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미워도 밉다고 쓸 수 없고, 같은 반 친구가 짜증 나도 짜증 난다고 쓸 수가 없는데 솔직하라니?!....... 그래서 한 동안 일기 쓰기를 거부했지만 곧 순응하기로 했다. 체벌이 존재했던 1990년 대 그 시절, 절대 권력인 교편에 맞서기엔 8살 인생이 너무 피곤해질 것 같았다. 이왕 써야 한다면 잘 써서 칭찬이라도 들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수년에 걸친 일기 검사 코멘트의 데이터베이스가 쌓이자 어떻게 쓰면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가 '인생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삶과 죽음이 어떻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기특해했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모든 소재들을 그런 것(?)들과 결부 지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허세가 가득했다는 뜻이다. 다시 일기장을 꺼내 읽다가 몇 줄 읽지 못하고 덮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다. 내가 생각해도 코딱지나 파는 어린아이 주제에 인생을, 삶을, 그리고 죽음 따위를 너무 심하게 들먹였다.
4학년 때였는지 5학년 때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종례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갑자기 내 이름을 불러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셨다. '내가 뭘 잘 못했나?' 하룻 동안 학교에서 내가 저질렀던(?) 일들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훑으며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난 나에게 선생님은 아침에 걷어가셨던 내 일기장을 돌려주시며 어제 일기를 읽어보라 하셨다.
'네? 지금 여기서요? 반 아이들 앞에서 일기를 읽으라고요?'
반항심이 들었지만 역시나 교편에 맞서지 않기로 했다. 시키는 대로 그 전 날의 일기를 반 아이들 앞에서 읽었고, 나는 박수를 받았다. 선생님은 내 일기를 칭찬해 줄 요량으로 발표를 시키신 것이었다. 그때의 일기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전 날은 독립기념일을 맞아 미군부대에서 불꽃놀이를 했고 나는 옥상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그것을 구경했다. 일기 제목은 '불꽃놀이'. '하늘로 솟았다 떨어지는 화려한 불꽃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불꽃은 아주 크고 화려했고, 어떤 불꽃은 작고 약했다. 그리고 또 어떤 폭죽은 심지어 터지지도 못하고 꼬꾸라지듯 땅에 떨어졌다. 인간의 인생도 그런 것 같다. 기왕 사는 거라면 나는 아주 화려하고 크게 빛나는 불꽃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대충 뭐 그런 내용이었다. 11살짜리 아이가 미군부대의 불꽃놀이를 보며 인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강요로 쓰기 시작한 일기 쓰기가 나중에는 스스로 강박을 만들어 매일 쓰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18살 때까지 매일 줄 노트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때까지 뭐라도 썼다. 그때는 누가 시켜 쓴 것도 아니었는데 꾸역꾸역 쓰면서 이런 걸 뭐하러 쓰나 싶었다. 매일 쓴다고 작가를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상을 받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뭐든 꾸준히 하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언젠가 의미가 되어 돌아오는 걸까. 11살 그때의 각오처럼 화려하고 커다란 불꽃은 아직 되지 못했지만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일기 쓰기가 20여 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내 글쓰기의 소재가 되어 주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쓴다. 지금이야 보잘것없어 보이는 글도 10년 뒤 20년 뒤엔 또 어떤 열매로 자랄 씨앗 일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황서영 https://link.inpock.co.kr/standal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