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키워드
그냥 그 자리에서 그렇게 시작하기
오빠가 아빠를 모시고 단 둘이서 해외여행을 떠났다. 집에 혼자 계실 엄마 생각이 나서 영상통화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 가운데, 엄마가 걱정을 털어놓으셨다. 수영 강습을 받고 있는데, 아직도 물속에서 숨쉬기와 팔 돌리기가 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급반으로 올라가는데, 본인만 초급반에 남아있게 생겼다며 큰일이라고 하셨다. 개인 레슨을 받으면 좀 나아지려나 순진한 표정으로 내게 물으셨다. 엄마의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이 내겐 기쁜 소식으로 들린다. 70대 중반을 훌쩍 넘어서 뭔가 새로운 것 배우기에 도전하신 엄마, 나이가 한참 어린 사람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날마다 수영장에 나가신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만 두실 법도 한데, 물에 못 뜨면 그냥 물속에서 운동 삼아 걷기라도 하면 된다며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한 말씀을 하신다. 배움에 도전하고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본다. 변화를 추구하고, 나아지기를 원하고,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성장을 꿈꾼다는 뜻일 것이다. 딸이 내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뼈 있는 소리를 한다. “엄마는 왜 이렇게 두려움이 많으세요?” 정곡을 찔린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맞는 말이라 사실 할 말이 없다. 평생 남들을 가르치는 일만 해오던 내가, 작년에 이민 컨설턴트라는 분야에 뛰어들었다. 이민법 공부만 열심히 해서 라이센스 시험에 합격하고 그러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사업가가 되어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분야에 맞닥뜨리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처음 갈 때의 그 기분, 매일 산을 하나씩 넘는 기분이었다.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시작도 못하고 미루기만 하던 세금 신고와 회계 업무를 시작했을 때, 염려했던 것보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렇다.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막연하게 걱정하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보다 쉽게 일이 풀렸다. 물론 그 과정 가운데, 내가 저지른 실수들로 인해서 하지 않아도 되었을 법한 일도 추가로 발생하긴 했다. 두려움이 너무 커서 도전하기 어려울 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온다. 학창 시절에 뉴스를 통해, 60살이 넘은 어르신이 수능 시험을 보고 대학 입학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평생 공부에 대한 아쉬움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실천하신 모습에 존경심이 들면서도, 그런데 그 공부한 거 언제, 어떻게 활용하실 건가 의아했다. 이제는 나의 생각이 달라졌다. 인생의 황혼기로 접어들었다고 해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더더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일이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전의 사전적 의미가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걸다’이다. 도전은 잘해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준비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도, 인생에 많은 시간을 남겨두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닌 그냥 그 자리에서 하면 된다는 것을 오랜 마음고생을 통한 경험으로 익혔다.
소냐민정 @mjk_immigration
취미가 비즈니스가 되게
캐나다 외국 살이 18년 차 나는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이다. 낯선 땅,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전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낯선' 모든 것들이 이제는 '낯익은' 것들이 되어간다. 나는 이곳에서 세 아이들을 키우며 9년 차 피아노 개인 레슨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한인이 거의 없는 캐나다 시골마을에서 당연히 피아노 학생들은 100% 캐네디언이다. 나의 인생에서 결혼, 이민, 출산, 이주 등 이 모든 것들이 큰 도전이었지만 한국 학생들도 아니고 캐네디언 학생들 피아노 레슨을 한다는 건 내 인생 큰 용기를 내야 했던 도전이었다. 왜냐면 난... 피아노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랑 직장동료의 아들 3명으로 시작한 나의 피아노 비즈니스는 광고 한번 없이 매년 성장해 갔고, 지금은 미리 자리를 예약해야 다음 학기 레슨을 받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비즈니스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나의 미약하고 자신 없었던 나의 도전이 9년 동안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우연히 찾아온 나의 기회에 "Yes"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처음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개구쟁이 남자아이 셋을 레슨 할 때 그 떨렸던 마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작은 타운으로 이사를 오고 캐네디언 교회에 처음 방문했을 때 일이다. 예배 후 찬양팀 리더가 나에게 와서 "너 피아노 칠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다음 주부터 피아노 반주로 찬양팀에 합류해 줄 수 있겠니? "라고 물어봤을 때 정말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찬양과 피아노 악보도 아니고 코드만 잔뜩 적혀있는 익숙하지 않은 악보를 보고 피아노 반주를 해달라고?? 하지만 도전! "Yes"라고 대답했었다. 그래서 매주 찬양팀 활동을 하며 사람들에게 내가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었고, 점점 나에게 아이들 레슨을 부탁하는 학부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스운 뒷이야기지만 그때 찬양팀 리더가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나에게 부탁했다는 사실이다. 정작 그날 반주 팀에 합류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피아니스트는 교회에 안 나왔다는 재미있는 사실. 내가 "No"라고 이야기했다면 영영 떠나버렸을 나의 기회였다.
크리스마스 시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노인분들을 위로하기 위해 로비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신랑의 제안에 난 흔쾌히 "Yes"라고 대답하고, 몇 명 안 되는 피아노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많은 노인분들과 가족분들이 감동했고 이런 감동의 마음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나는 코로나 3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크리스마스 콘서트를 병원에서 한다. 그 이후 나의 피아노 학생들은 점점 늘어갔다. 나의 영어실력이 뛰어나서 개인 레슨을 문제없이 해나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직도 외국인들이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려고 하면 혹시나 못 알아듣고 엉뚱한 대답을 할까 봐 눈빛을 피하며 못 본척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캐네디언을 상대하는 나의 비즈니스는 매 순간 매 결정이 말 그대로 도전이었고, 도전이다. 나의 모든 도전이 항상 성공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도전하는 편이 늘 나에게 성장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레슨을 하나도 할 수 없었을 때도 난 전자책 쓰기에 도전을 했다. 내가 겪었던 나의 시행착오들과 또 계속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공개하면서 피아노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 개인 레슨을 준비하거나 현재 하고 계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작업들은 나를 위한 과정이었다. 쉬어가는 동안 나의 모든 여정을 다시 되돌아보고 기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언젠가는 진짜 도움이 되는 좋은 책을 발행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도전이란 늘 부담스럽고, 두려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떨리는 단어이다. 나를 포함하여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시작하는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패미로얄 @famiroyale @canada_famiroyale
두려움보다 강한 꿈
나는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머릿속에는 늘 고민이 가득하고, 하나의 결정에 따른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느라 온종일 뇌를 혹사하곤 한다.
이런 내게도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과감한 도전을 한 경험이 있다. 약 10년 전, 다니던 회사의 재정난으로 이직을 준비하던 중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직 대신 입시를 결정한 것. 어릴 때 엄마의 반대로 하지 못했던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12년 만에 다시 수험생이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이미 4년 경력의 디자이너였지만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고 미술 공부를 단 한 번도 제대로 깊이 있게 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늘 마음 한편에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
포트폴리오 준비에 밤낮으로 매진한 덕분인지 운 좋게도 석 달 만에 합격이 된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미대생이 될 수 있었다. 늘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존심도 센 내가 어떻게 띠동갑들과 같은 수업을 들으며 꿋꿋하게 두 번째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큰 도전이었다. 어린 동기들에게 뒤처질까 전전긍긍했고, 부족한 체력에 밤샘 과제들을 해내느라 몸도 마음도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며 창의력을 계발하고, 내 예술적 지식과 견문도 넓히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때 내가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40이 되든 50이 되든,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반드시 미술을 깊이 있게 공부할 것'이라는 내 확고한 의지, ‘내 남은 날 중 가장 젊은 날은 오늘’이라는 사실, 그리고 ‘3~4년쯤이야 금방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런 결정을 내린 내가 대견하기만 하다.
생각이 참 많은 요즘이다. 지금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와 같은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10년 전에도 나는 겁이 났을 것이다. 분명 두려운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당시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보다 내 꿈이 더 강해서가 아니었을까.
만약 지금 내게 있는 꿈들이 모두 작고 나약한 것이라 이리도 힘을 못 쓰고 있는 거라면, 이 작은 꿈의 결정들을 모아 커다란 꿈 한 덩이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상상해본다. 마치 눈덩이를 굴리듯, 굴리고 또 굴리다 보면, 그때처럼 내 두려움을 무력화시킬 만큼의 강력한 꿈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설레는 상상이다.
앤@ggoomhoy
뜀틀 뛰기 3초 전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그날따라 더 세고 쨍하게 울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체육 시간, 그것도 제일 무서워하는 뜀틀 뛰기 시험 마지막 연습이 있는 날이라 제발 갑자기 배라도 아파 조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날따라 몸이 무척 건강했다. 5단 정도는 어떻게 해보겠건만 6단은 난공불락 마의 고지임을 수차례 연습 시간 동안 확인한 터라 날카로운 뜀틀 모서리가 오늘따라 더 유난히 히번덕 번쩍거렸다. 더더군다나 서울서 며칠 전 전학 온 잘 생긴 명수 앞에서 잘 해내고픈 마음에 부담이 백배였다.
구름판 앞에서 힘껏 도움닫기 하라시며 발 스텝 구령까지 맞춰주는 선생님 목소리는 배터리 나간 라디오 마냥 페이드 아웃되더니 손바닥만 장엄하게 뜀틀판을 짚고 그 광대한 판을 직면해야 했다. “삑”하는 선생님의 호각소리와 매서운 눈빛이 내 좌절을 더 부풀렸다. 다시 도움닫기 하려 힘껏 뛰어가는 뜀틀 앞 3초 전 드는 생각들, (‘어차피 못 넘을 거니까 점수는 필기시험에서 만회 하기, 넘어져도 안 아픈 척 하기, 그리고 명수 앞에서 최대한 예쁘게 넘어지기’) 이런 생각들이 3초를 채웠다. 어떻게든 뜀틀판만 넘으면 약간의 점수라도 주겠노라에 튐틀판위에 철퍼덕 걸터앉기를 반복, 마침내 넘어보나 싶었으나 엉덩이 끝은 사정없이 뜀틀 모서리를 강타하며 설명할 수 없는 굉음을 내고 엉거주춤 자세로 매트에 꼬꾸라져 버렸다.
엉덩이 꼬리뼈를 타고 전해오는 통증이 명치까지 올라오는가 싶더니 이러다 뜀틀 뛰다 죽은 아이로 신문에 나겠구나 생각하는 찰나, 매트 앞에 만신창이로 내쳐진 내 몰골이 떠올랐다. 그리고 미리 세워둔 뜀틀 실패 대안들 중 그나마 최악의 상황들이 현실화되진 않았음에 안도했다. 최대한 안 아픈 척, 멋지고 예쁘게 그 몰골을 정리하려 실눈을 가늘게 뜬 순간 극적으로 마침 종이 울렸다. 운동장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가는 아이들 뒤에서 명수는 나에게 말을 건넸다.
“생각보다 잘 뛰네. 뜀틀 정리하는 거 도와줄래?” '내가 이렇게 실패해도 서울 남자애들은 말도 참 부드럽네' 하는 생각도 잠시, 6단짜리 뜀틀을 하나씩 분해하다 보니 모서리는 생각보다 부드러워 장롱 속 한 짐 싸 둔 겨울 이불들이 생각났고, 넘어져도 나를 받쳐줄 푹신한 매트가 있기에 뜀틀 때문에 앰뷸런스가 학교에 올 일 가망성은 적음을 알았다. 집에 가서 엄마 몰래 이불들 죄다 꺼내서 연습만 하면 되리라 생각하며 씨-익 웃는 명수 앞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의 도전 대상은 무시무시해 보였던 뜀틀 자체가 아니라 도움닫기 중 3초 동안의 내 감정과 마음이었다. 뜀틀 모서리에 긁힌 내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가 낭자함과, 뜀틀 판을 짚은 손과 나의 육중한 몸의 물리적 계산이 맞지 않아 부조화 속에 움직일 때 뼈가 꺾일 거라는 상상이 불러낸 불안과 두려움으로 번진 또 다른 잡생각들의 어지러움 말이다. 나머지 인생 반을 살면서 도전장을 내미는 시간들이 올 때마다 엄마 몰래 겨울이불들 첩첩이 쌓아두고 큰방에서 작은 방으로 냅다 내달렸던 나의 뜀틀 도전기를 떠 올릴 것이다.
“옴마야 내 못산데이. 이거 다 뭐꼬?”
“이불 뜀틀이다 엄마. 내 지금 지피지기 백전불태 할라꼬”
“야가 무신 소리하노?” 이런 대화도 함께 말이다.
pinkpen@mindmap.anna
난 여전히 꿈꾸는 도전자
도전이란 말만 들어도 괜히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그대?
인생이란 마치 요리와 같아서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맛이 아주 달라질 것이다
그저 그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 속에서도 사람에 따라 건져내는 것들이 참으로 다양할 것 같다
누군가는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것들을 끄집어내고 또 누군가는 조각조각 이어진 기억을 아름답게 이어가며 인생의 화폭에 담아낼 것이며 또 누구는 실패를 딛고 다시 한번 도전하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데 사실 젊어서는 내가 하는 것이 도전인 것조차 모르고 그냥 해나갔다
이제 60대에서야 인생의 맛도 더 느끼면서 여유를 찾고 여백이 있는 이야기가 있는 삶을 지어내면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게 되니 도전이란 말이 더 크게 다가온다
수많은 변화가 있었고 도전을 했지만 특별히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며 참 많은 꿈을 꾸며 이루어 낸 것 같다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얽혀 그 미로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느라 피곤했던 인생이 코로나로 인해 혼자만의 은둔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내겐 녹색 신호등이 켜신 셈이고 선물 같은 시간이 되었다
2020년 이곳 캐나다에 코로나가 상륙한 시점에 시어머님의 장례를 치렀고 그 정신없는 가운데 손 수술을 했으며 그에 따른 여러 일들로 인해 은퇴하여 백수가 되었다 그러면서 혼자 놀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첫 도전은 천 권 책 읽기 었고, 두 번째론 인스타에 등극한 것이며, 세 번째로는 숨쉬기 외엔 운동을 싫어하여 늘 집에서 책 읽기를 즐겨하던 내가 아파트 숲 속을 매일 산책한 일이다 이런 일들로 내 일상엔 마구마구 화려한 색들이 입혀지면서 이 은둔의 삶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던지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는데 매일 아침이면 읽을 책들로 인해 설렘으로 눈이 떠지고
오전 중의 푸른 정기 속을 거니는 여유로운 산책 중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기쁨에 젖는다
어디 그뿐인가
몇 년 전에 올려만 둔 인스타 계정을 살려내어 조금씩 사진을 올리다가 이젠 매일 하루 한 번 글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하나씩 올리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매일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일로 인해 적지 않은 보너스까지 누리게 되니 더없이 기쁘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나의 선물 목록 1호는 바로 많은 인스타 친구들과의 교류인데 온라인이니 전 세계 속으로 헤엄을 치며 즐겁게 노닐고 있어서 이 또한 생동감을 더해주고 이 안에서 독서 모임이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다
사실 하루하루가 도전이며 선택이 아니던가?
우리 가족 5명의 강도 높은 도전 이야기를 하려 치면 끝도 없을 것이다
인생극장 스토리의 주인공 같은 남편의 이야기 캐나다에 취업비자로 와서 이민 신청을 하고 영주권을 받은 후 맨땅에 헤딩한, 끝도 없이 펼쳐지는 변화의 물결들이며 소심하고 겁이 많아 수영장 물속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큰딸이 어떻게 이리 생기 넘치는 활동가가 되어 지금은 한 가정을 꾸리는 엄마로서 당당한 커리어 우먼으로 세상을 향해 나가고 있는지… 토론토대학을 다닐 때 둘째 딸이 회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조정선수가 되어 새벽마다 호숫가로 나가 연습하다 자전거 사고도 나고 미국 원정 때는 쓰러져서 앰뷸런스에 실려 가기도 하면서 이룬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아마 그런 일들이 밑받침되어 현재 어엿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막내딸의 끈질긴 노력으로 얻은 지금의 당당한 회사의 이사로서의 삶을 어찌 다 이 지면에 쏟아 놓을 수 있으랴
여름도 이제 서서히 꼬리를 내리고 있나 보다
곧 나의 사랑하는 가을이 올 것이고 그러면 머지않아 숲을 거니는 내 어깨 위로 고운 단풍잎이 떨어지리라
마치 내 인생의 앞날이 예쁘게 채색되듯이 말이다
나는 이렇게 오늘도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의 조그만 도전들로 인해 설렘과 철학 한 스푼의 행복을 건져 올린다 사람은 나이 먹는 것으로 늙는 게 아니라 꿈을 잃을 때 노화가 시작되며 도전 의식이 사라질 때 비로소 노인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한 살 한 살 세월을 거듭할수록 난 오히려 나이 듦이 더 좋아진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라고 말했던 아인슈타인.
종종 이 말을 떠올리면 새롭게 정신이 차려지곤 한다
오늘도 나는 많은 꿈의 목록을 가슴에 품고 있다
이렇게 변화를 꿈꾸면 언제나 설레니 역시 난 여전히 꿈꾸는 도전자다
성은@life_coaching.sue
우리 인생의 크고 작은 도전들
인간은 매일 작은 도전에서부터 인생의 방행을 결정할 큰 도전까지 무한한 도전을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여자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매일매일, 매주, 매달, 매년... 도전이라는 걸 하게 된다.
오늘만 하더라도 주부로써 블라인드와 식탁 등에 낀 기름때 먼지를 제거하기 위한 도전을 했다. 어떻게 올라가지? 무엇으로 닦지? 그냥 물티슈나 타월은 택도 없을 텐데... 그럼 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인터넷도 찾아보고 처음 해보는 일들, 작지만, 새로운 도전을 한다. 그 도전과제를 깔끔히 마쳤을 때의 쾌감은 참 달다.
나의 커리어, 인생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이 건 또 다른 차원이다. 좀 더 책임도 크고 전파력도 크다. 지금까지 인생의 큰 도전은 기인적으로 대학, 취업, 결혼, 출산, 캐나다로의 이민, 그리고 이방인으로써의 정착과 정체성 찾기. 나는 영어를 전공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했던 사람이다. 사실 캐나다에서는 거지도 영어를 나보다 더 잘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계속 고민 중이고 도전하는 중이다.
엄마로서의 도전도 있다. 이건 좀 더 다른 문제이다. 정답이 없다. 성취감보다는 감동과 감사함이 더 크다. 모두들 엄마는 처음이기에 많은 도전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인터넷과 책 속으로 차고도 넘치는 정보들에서 우리 아이랑 딱 맞아떨어지는 건 없는 것 같다. 아이가 자랄수록 도전도 많아진다. 무한반복에 지칠 수도 있지만, 정답이 없음에 욱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엄마들은 포가 하지 않고 해낸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그 무엇보다 큰 것 같다.
영어로 challenge는 '도전, 과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많은 도전들 속에서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장기전이 필요한 도전들은 작은 실패와 다시 시작하는 힘을 기르면서, 우리 모두 도전에서의 성취에도 가까워지고 있기를 바란다.
Judy@judy_canada_
배낭여행 -도전!이 아름다웠던 20대
내가 스무 살이던 그 시절에도, '해외 배낭여행'은 로망이었다. 유럽에 대해서 1도 모르는 내가 친구들과 작당 회의를 한 후, 덜컥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해 버렸다.
일하면서 대학 공부를 하기도 급급했던 그 시절이었는데도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삼촌들에게도 나 해외여행 갈 테니 돈을 보태 달라고 큰소리쳤다. 삼촌들의 도움과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가지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친구들과 좌충우돌 33일간의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 도착한 나라는 영국! 도착하기 이틀 전에 런던 지하철 역에서는 테러가 있었다. 우리가 공항에 내려서 숙소에 가려고 찾아보니, 분명 지하철 역과 가까운 곳으로 잡았는데, 그 주변 지하철 역들은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우리는 두 정거장 전에 내려서 큰 여행 가방을 들고 어찌어찌 길을 찾아 숙소에 도착했다. 오 마이 갓. 우리 숙소는 3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나는 정말 가방을 던지듯이 질질 끌어 간신히 방에 도착했다. 이렇게 긴 여행이 처음이라 제대로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몰랐던 나는, 막상 가방을 열어보니 쓰다가 버려도 되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나의 무지함이란...... 결국 신발을 버리고, 새로 사야 했다. 신발을 바로 사지 못해 쪼리를 신고 동산 위의 성을 오르는 무모함도 감수해야 했다.
이 첫날의 기억 말고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참 많다. 한국에서와 달리 화장실 바닥에 하수구가 없는데 샤워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은 채 샤워해서 물 바다를 만든 일, 숙소라고 해서 가 보니 2층 침대가 10개 이상 한 공간에 들어가 있고, 그중 침대 하나가 내 공간이라고 해서 뜨악했던 일. 숙소를 찾아가려고 보니 버스 타고 2시간을 가야 해서 숙소를 포기하자마자 만난 한국 분이 방을 제공해 준다 하셔서 간 집에서 먹었던 눈물의 양배추 김치. 가져온 햇반을 먹고 싶은데, 전기 주전자도 없고, 전자레인지도 없어 화장실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받아 햇반을 데워 먹은 일.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그런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났다. 마지막 날은 여행 가이드 책에 쓰여 있는 정보를 철썩 같이 믿고, 루브르 박물관에 오후 늦게 관람하러 갔는데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이십 대 여자 세 명은 오해도 있고, 신경전도 있고, 서로 다른 데이 루틴을 가지고 있어서 맞추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내 서로에게 적응했고,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잘하는 일들을 알아서 맡아 나누게 되었다.
여행 초반에 나는 많이 우울했다. 내 생애 첫 해외여행이고, 큰돈을 들여왔는데,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까지가 동유럽이고 어디가 서유럽인 지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숙소들은 엉망인 곳도 많았고, 낯선 환경들은 자꾸 집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쉬움만 가득했다. 깃털처럼 가볍게 집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꼭 다시 와야지' 다짐을 하며 왔던 기억이 난다.
여행은,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고, 내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게 해 주는 감사다.
나는 이 해외여행이 나에게 선물 같고, 기적 같다. 이제 두 번째 스무 살을 맞이하는 나와 내 친구들과 다시 한번 배낭여행을 갈 수 있기를 기약해 본다.
@boeun_challenge
도전, 매일 모든 순간이 도전이 아닐까?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도전이 아닐까 싶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루하루 성장하는 모든 시간들.
찰나가 모여 일 년이 되고 추억이 되는 과거의 시간들이 쌓여
현재의 모습까지 다다르는 동안 수많은 일들.
그 시간의 모든 모습들이 도전의 연속이고
그 도전으로 인한 결과들이 오늘을 보이게 하는 건 아닐까 싶다.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나 생각에 잠기다 보니
모든 순간순간이 도전이고
어느 쪽으로 결정되더라도 그것 또한 도전이고
그 도전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 바탕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학교 진학할 때도 어느 학교로 가야 할지
어느 과를 선택할지..
졸업 후 어느 도시로 이동할지
어떤 회사의 직원이 될지 그 모든 순간들에 나를 보면
모두 다 도전이었다.
익숙해진 시간들, 사람들, 생활의 패턴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한편으로 쿵쾅거리는 설렘이나 긴장감이 주는 묘한 매력에
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의 이중성.
그에 따라오는 고민과 도전 직전의 긴장감. 두려움.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감정들.
또다시 조금씩 조금씩 다른 도전들이 내게 일어나고 있는 요즘.
현실이라는 이유로 본캐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마음으로만 있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던 도전들을 하고 있다.
마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직접 알아보고 행동하기 위해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하나 공부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킬링타임 없이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나를 보면
어느 훗날의 내 삶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그려보게도 한다.
어쩌면 그 희망 하나로 에너지 삼아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을 쫓지 않고 내 시간을 내가 진두지휘하는
내 시간 속에서 내가 얼마든지 시간을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그런 삶이 내게 일어나길 바라며
오늘도 빼곡하게 적힌 노트를 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어느 것을 집중해야 할지
또 어느 시간에 배치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하루를 24시간,
1440분으로 나누어 생각을 해본다.
이게 맞는 건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솔직히 확신은 없지만 믿는다
그 끝 어느 선에서 적어도 후회는 없을 내 모습을.
미련 없이 도전에 대한 끝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다음 도전을 고민하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보며
오늘도 도전하는 나로 살아간다.
매 순간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파이팅!’
하루, 그리다 @mind_here_
밑져야 본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도전적인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가슴에 손을 얹고 자기 객관화를 해보면, 안타깝게도 나는 '도전적'이기보다 '겁이 많은'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평소엔 90퍼센트 겁을 내며 움츠리고 살다가 어느날 10퍼센트만큼 뜬금없는 미친 짓(?)을 일삼게 된다(그리고 그 10퍼센트는 도전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내 본질과 싸워 이긴 경우다). 자전거도 제대로 못 타면서 오토바이를 사러 수원에서 부천까지 가서는 집으로 돌아올 때 막 산 오토바이를 운전해서 온다든지, 수영이라곤 개헤엄이 전부인 주제에 스킨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태국 섬에 간다든지, 합격한 회사의 입사일이 발표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연락도 잘 되지 않는 인도로 여행을 갑자기 떠난다든지......
내가 '도전'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스물한 살 혼자 떠난 유럽 배낭여행이다. 그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무모한 일을 자행한 적이 없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지루한 범생이였다. 그때 당시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유럽 여행을 다녀오지 않으면 마치 다음 학기를 위한 학점을 얻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도나도 유럽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여행은 좀 달랐다. 여자들은 대부분 친한 친구와 짝을 맞춰 팀을 꾸리고(2명, 혹은 4명)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메고 가는 대신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를 택했고(애석하게도 같이 갈 친구가 마땅히 없었던 이유도 있다), 바퀴가 달린 캐리어 대신 어깨에 메는 35리터짜리 배낭을 택했다. 전자의 이유는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바람처럼(?) 흘러가 보고 싶었고, 후자의 이유는 혹시 캐리어 바퀴라도 고장 나면 '바람처럼 흘러가기'라는 첫번 째 계획에 무리가 있지 않겠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그리고 명색이 '유럽 배낭여행'인데 '배낭'이 있어야 진짜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치한 고집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행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다. 유럽은커녕 혼자서는 국내 여행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아니, 혼자서 기차 한 번 타본 적 없는 '대구 촌년'이었다. 고분고분하기만 했던 외동딸, 외손주가 갑자기 해외여행을, 그것도 혼자, 심지어 자유여행으로 간다고 가방을 싸는데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하는 엄마와 할머니도 참 대단했다는 생각이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든다. 얼마나 걱정이 되고 못 미더웠을까, 대구를 떠난 순간부터 대구로 돌아온 그 순간까지 그들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그런 무모한 도전들을 어떻게든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던 건 나 혼자만의 성과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란 것을, 주위의 사람들의 인내와 신뢰가 없었다면 결코 도전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깨달았다.
21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은 일 수로는 길지 않았으나 혼자 떠난 도전을 하지 않았다면 210일이 걸려도 다 경험하지 못할 만큼의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둘이 아닌 혼자였기에,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었기에, 캐리어가 아닌 진흙탕도 걸을 수 있는 배낭이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물론 실수도 많았지만, 도시마다 새로운 여행자들과 만든 추억도 많았고, 현지인들과 교류할 기회도 더 많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데 있다. 동반자가 배가 고픈 지, 무엇을 먹고 싶은 지, 피곤한 지, 기분이 좋은 지 나쁜지, 신경 쓸 필요 없고, 어제 만난 여행 친구와 오늘의 여행 친구가 되지 않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를 위한 걸음을 걸었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도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혜택은 그 도전을 통해 얻은 실질적인 성과보다 '도전을 했다'는 기억에서 오는 자존감에 있다. '나는 그런 도전도 한 사람', '그런 무모한 것도 감행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앞으로 살면서 무수히 많은 또다른 도전의 순간에 발을 뻗을 용기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도전은 어떤 것이 되었든,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든 '밑져야 본전'인 장사가 아닌가 싶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원금보장'이 되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미래 지향적 투자인 것이다. 나는 오늘도, 15년 전 독일 뮌헨에서 비에 젖은 종이지도 한 장만 믿고 하루 종일 진흙탕을 걸으며 가슴 벅찼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또 다른 '밑져야 본전'인 장사거리를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