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동네

네 번째 키워드

by 황서영

개천이 있는 나의 동네


나의 고향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이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의 방배동은 나의 모교인 서문여중, 여고를 중심에 두고,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로 나뉜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대부분 가까운 지역에서 오다 보니 대개 생활 수준이 비슷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어려서, 친구들에게서 나와 다른 점을 별로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나랑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가보니 신기한 게 많았다. 아파트 입구에 상가가 있는데, 상가 안에는 모든 가게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아주 편리하고 세련되게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친구가 사는 삼호 아파트는 평수가 굉장히 커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유명인들도 많고 부자들이라고 했다.


내가 다니던 중, 고등학교 옆으로 개천이 흘렀는데, 비가 많이 오면 개천이 넘칠 듯 말 듯 물이 찰랑찰랑해서 아슬아슬했다. 비만 오면 친구들은 개천이 넘치기를 은근히 바라며 비가 더 많이 내리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개천이 넘치면 학교가 문을 닫을 거라는 순진한 상상을 했다. 개천이 넘쳐도 아파트에 사는 본인들은 전혀 상관이 없겠지만, 주택에 사는 나로서는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9월, 집중호우로 몇 날 며칠 비가 쉬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더니 마침내 홍수가 나고 말았다. 학교 근처 주택가에 살던 우리 집도 홍수로 물에 잠겼다. 개천이 옆에 있어서 피해가 더 컸던 건지 아니면 우리나라 하수도 시설이 미비해서 그랬는지 이유는 다 알 수 없었지만, 집 마당에 있는 하수도 구멍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동네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우리는 집을 떠나 삼촌집에 며칠을 머물렀다. 뉴스에서 비가 그치고 물이 빠졌다는 소식을 접한 후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 집은 새로 지은 지 일 년도 채 안된 상황에서 물난리를 경험했고, 벽지와 장판을 새로 하고 조금이라도 물이 닿았던 가구들은 모두 내다 버려야 했었다. 지금 어른이 된 상황에서 내가 엄마였더라면 그때 기분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그 와중에도 밝고 씩씩했고, 우울해하거나 속상해하던 모습은 기억 속에 없다. 오히려 우울하고 속상했던 건 나였다. 하루는 같은 반 친구들이 우리 집 대문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뉴스에서 물난리를 겪은 수재민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방송을 본 친구들은, 물난리를 당한 나를 위로해 주러, 아니면 격려 차원에서 우리 집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물난리로 온 동네가 한창 어수선한 분위기에, 난리통인 우리 동네를 친구들에게 들킨 것 같아서 나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했다. 엄마에게 괜스레 짜증을 부리며 왜 우린 친구네처럼 아파트에 살지 않고, 주택에 살아서 이런 물난리를 당하냐며 따졌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에 옥의 티로 오점을 남겼던 개천도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인가에는 아스팔트로 덮이며 도로가 되어서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기억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게 참 이상하다. 한국을 떠난 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개천이 왜 불현듯 사진 속 한 장면처럼 지금 떠올랐을까 의아할 뿐이다. 아마 9월에는 내 생일이 있고, 어릴 적 물난리로 정신없는 와중에 축하받지 못한 나의 생일은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내 깊은 속에 서운함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냐민정@mjk_immigration




숲을 품은 경치 맛집 우리 아파트


내가 사는 이 아파트는 50여 년의 세월이 녹아 있는 오래된 아파트다. 요즘 신형 모델과는 아주동 떨어진 모양으로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직사각형의 밋밋한 구조다. 겉으로 보면 너무 낡아서 흉물스럽기까지 한 건물. 하지만 이 아파트는 그 연수만큼의 풍요로운 숲을 품고 있어서 오히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사람으로 치자면 노년에 접어든 아파트지만 곳곳에 편리함을 심어 두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멋지게 즐기고 땀 흘릴 수 있는 테니스장과 3층에 특별히 만들어 놓은 수영장과 정자 그리고 아이들이 자동차의 위험 없이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게 만든 잔디밭이 있다. 세 딸이 다 떠나고 우리 둘만 남은 뒤, 집을 정리하여 팔고 이 아파트로 들어왔을 땐 몇몇 가지 일들로 마음이 좀 불편했었다. 오래된 아파트다 보니 호텔식으로 디자인된 긴 복도엔 에어컨 장치가 없어 환기가 잘 안 되니 당연히 냄새가 났고 지하 주차장에서도 쓰레기로 인한 불쾌지수가 종종 올라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번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으나 그때마다 사정이 생겨 눌러앉다 보니 지금까지 10년이나 살고 있다.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한 것처럼 이왕 사는 거 이 아파트랑 친해지고 주변과 정이 들어야겠기에 새로운 관점으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바로 내 눈에 잡힌 멋진 숲이 다가왔다. 세상에 이런 보배가 여기에 턱 하니 버티고 있을 줄이야 설레는 마음으로 한 바퀴 돌면서 탐색을 하고 이리저리 동네를 훑어보니 걸어서 20분 안에 쇼핑할 곳들이 다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장점으로 다가오던지… 길을 건너면 코스코와 쏘비스가 있고 숲 속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5분 내에 닿는 맥도널드와 스타벅스 그리고 중국 마트와 달러 숍 그 외에도 여러 레스토랑들이 죽 늘어서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 플라자 안과 밖으로 미장원, 약국 , 워킹클리닉 등 생활에 필요한 온갖 것들이 다 있다 보니 정말 너무 살기 편한 동네라서 마구 자랑하고 싶은 정도다 나야 버스를 탈 기회는 없지만 아파트 입구에 바로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학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편리함까지 갖추고 있다. 꼭 숲 속이 아니라도 아파트 주변을 걷기만 해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고 근처에 커다란 묘지도 있다. 여기선 묘지를 공원처럼 잘 가꾸어 놓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뛰면서 운동을 즐긴다. 우리 부부도 종종 그곳을 걸으며 이 안에서 쉬고 계시는 시부모님의 묘를 둘러보기도 한다.


이젠 이 동네가 너무 좋아서 떠나기가 아쉽게 느껴진다. 내년에 토론토 근교로 이사하기 전까지 더 많이, 더 오래 숲 속을 걷고 느끼며 많은 생각의 씨앗들을 품으려 한다. 경치 맛집인 이 아름다운 숲 속이 나를 채워준 커다란 부분이었음을 자랑하고 싶다 이렇게 자연을 벗 삼을 수 있어서 더 풍요롭게 이야기가 있는 삶으로 걸어갈 수 있었고 여기서 걷어 올린 수많은 철학 조각들이 내 인생의 화폭을 화려하게 채워 주었다. 앞으로 이사 갈 동네도 호수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트레일 그리고 공원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아파트 숲을 뒤로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새로운 장소를 떠올리며 다시 기대감에 부푼다. 사실 동네가 어떠한가 보다는 얼마나 내가 현재 사는 그 마을을 사랑하며 다가가고 어떤 관계를 맺을 것 인지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어디서 살든지 자랑스러운 우리 동네라고 소문낼 수 있기를.


성은 @life_coaching.sue


응답하라 1988 우리 동네


"언니! 1988 봤어? 너무 재미있는데 언니는 보지 마라. 그냥 인터넷에 나오는 재미있는 짤만 보고 전체 드라마는 안 보는 게 좋겠어"

"왜?"

"언니는 보면 분명 울 거야. 어쩌면 향수병 걸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냥 재미있는 부분만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미 캐나다에도 재미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1988 드라마를 동생이 보지 말라고 일부러 전화를 했다. 아이들 재워놓고 설거지 하며 짬짬이 보는 1988의 3분 영상은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드라마 전체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생이 보지 말라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제대로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내 동생은 쌍문동에서 태어났다. 쌍문동과 수유리에서 난 유년시절을 보냈었다. 1회 드라마를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듯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대문 색깔도 대문 모양도 심지어 집 구조와 집 크기도 모두 달랐지만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에는 그것이 부의 차이인 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대문 색깔은 친구네 집을 구별할 기준일 뿐이었다. 갈색 대분은 희나네집, 짙은 초록색 대문은 수민이네 집, 담 밖으로 목련나무 가지가 삐저나온 집은 선희네 집.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우리 동네 전체의 모습이다. 철길 다리 밑을 건너, 4차선 큰 도로 위로 육교까지 지나야 만 학교가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총총 발걸음으로는 30분도 족히 걸렸을 것 같은 거리이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 같이 모여 재잘거리며 학교로 걸어갔다. 유독 개를 무서워했던 나는 개를 키우는 집을 지날 때마다 대문이 굳게 닫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의 손을 꽈악 쥐고 친구들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를 갔던 기억이 난다. 방과 후 우리들은 모여서 마치 고무줄 올림픽 대회라도 나갈 듯이 그렇게도 열심히 고무줄놀이를 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올 때쯤 "애들아 고구마 먹어라~"구원의 목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우르르 몰려가 고구마를 먹었고, "애들아 수박 먹어라~"라고 누군가의 엄마가 소리치시면 우리는 우르르 달려가 수박을 함께 먹었다. 아침 등교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희나 가 나오질 않는다. 우리는 희나네 집으로 가보았다. 희나 와 엄마가 아침 식탁에서 실랑이 중이다.

"희나야! 이 하얀 국 먹어야 해~ 몸에 좋은 거야. 한 숟갈만 먹고 가라!"

"싫어!"

"혜진아, 수민아, 선희야 너희는 이국 먹을 수 있지? 어디한번 보자! 니들은 잘 먹제??" 아줌마는 우리 몫으로 한 그릇씩 곰국을 말아오신다. 음... 분명 아침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나의 그 한 숟가락 때문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워야 했다. 동네에 출장 요리사분이 오시는 날이면 더 신나는 날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그렇게 요리를 가르쳐 주며 냄비 같은 주방용품을 파셨던 것 같다. 아무렴 어떠랴. 온 동네 엄마들이 다 모여서 함께 요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그날 저녁 온 동네잔치처럼 온 가족들이 다 모여 최고의 만찬을 맛볼 수 있었다. 짜장을 만드는 날이면 노란 라면 냄비 그릇에 짜장을 담아 옆집으로 날랐고, 저녁식사 후에는 그 냄비 그릇에 다소곳이 귤이 담겨 친구 손에 배달되었다. 집집마다 집 밖 담벼락 옆에 붙어있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과 그 쓰레기통 옆에 차곡차곡 쌓인 다 타버린 살색 연탄들이 그림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겨울이 되면 아침마다 아빠들이 이 다 타버린 연탄을 문 앞과 동네 길에 던져놓고 발로 밟아 아침 등굣길에 토끼 같은 아이들이 넘어질까 길을 다져놓곤 했었다.


드라마 속 그 배경은 나의 집이었고, 드라마 속 엄마는 나의 엄마였으며, 드라마 속 철없는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추억 때문에 이 드라마를 사랑했을 것이고 또 그래서 마지막 모두가 떠나간 텅 빈 쌍문동 우리 동네를 보았을 때 눈물이 났을 것이다. 그 시절 젊고 예뻤던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 맘이 애잔했을 것이고, 철없이 함께 뛰어놀던 지금은 연락이 뚝 끊겨버린 내 어린 친구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을 것이다. 내가 살던 우리 동네는 이제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동네이다. 쌍문동 우리 동네.


패미로얄 @canada_famiroyale


봉자와 덕자 그리고 봉덕이


어렸을 때는 내가 살던 동네의 이름이 너무 창피했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친구들이, 선생님이 혹은 다른 어른들이 '니는 어데 사노?'하고 물으면 그 어린 마음에도 얕은 한 숨을 내뱉으며 마지못해 대답하곤 했다.


鳳德(봉덕); 성인군자의 높은 덕을 이름.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나는 봉덕1동에서 태어나 유치원과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까지 봉덕동에서 다녔다. 내가 그 이름을 창피스럽게 여긴 이유는 단순했다. 발음이 촌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봉자, 덕자, 순봉이, 병덕이처럼 '보옹더억'이라고 발음을 할 때마다 그 발음을 하는 내 음성이 촌스럽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구멍이 나서 기워 신은 양말을 친구들에게 보여야 할 때처럼 내가 속한 동네의 이름의 발음할 때마다 나는 창피해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조부모님의 슬하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집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됐다. 나름 교육열과 치맛바람으로 유명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동네 이름은...... 놀랍게도 '봉덕2동'이었다. 나의 '우물(?)'은 생각보다 꽤나 넓은 동네였던 것이다(그리고 심지어 봉덕3동도 있었다). 17년 만에 봉덕1동에서 벗어난 나는 또 다른 봉덕동, 봉덕2동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수원에 취직을 한 나는 드디어 봉덕동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봉덕과의 인연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장소도 봉덕동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이후로 어머니는 이사를 하지 않으셨고 캐나다가 아닌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은 본가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안방 창문을 열면 앞산의 봉우리가 보이고 5분 거리에 신천이 흐르는, 게다가 대구의 중심지와도 가까운 '봉덕동'이 찾기 드물게 살기 좋은 곳이라 하신다. 그녀의 '봉덕 사랑'은 20년 째 변함없이 꿋꿋하기에 봉덕동을 벗어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실제로 이사를 위해 새 아파트 매물을 찾아보시지만 봉덕동 안의 매물만 보신다......). 이 정도면 참으로 끈질긴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제 봉덕동을 미워하지도 창피해하지도 않는다. 성인군자의 높은 덕이라는데 발음이 조금 세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좋은 뜻을 가진 동네 이름을 싫어할 것까지야 싶은 것이다. 봉자, 덕자라는 이름이 아닌 봉자, 덕자의 생각과 행동이 세련된 사람을 만드는 것이란 것을, 내가 속한 주민등록등본 상의 동네가 아닌 내 안의 중심이 서 있는 곳이 진짜 나의 위치란 것을 깨닫게 된 후부터다. 그러니까 그만큼 내가 좀 컸다는 뜻이겠다.


오랜만에 괜히 '보옹더억'하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푸른 앞산의 봉우리처럼 높은 기상이 '보옹'하고 떠올랐다가, 지혜로운 어떤 이들의 값진 '덕'들이 '덕덕하게' 쌓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좀 촌스럽긴 하다.


황서영@https://link.inpock.co.kr/standalone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