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글쓰기 1주 차
'감정 글쓰기' 코칭 수업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글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강의/코칭/편집
황서영 no.more.thinking.and@gmail.com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으로 들어갔던 날.
난, 마치 망치로 뒷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우리 둘과 시부모님의 네 식구만 살 줄 알았는데 나를 기다리는 건 큰 시누네 네 식구에 작은 시누네 작은딸(아직 돌도 되지 않은 아기)이 떡하니 누워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당연히 새 식구가 들어왔으면 미리미리 집 안 정리를 하셔야지 이게 뭐람’. 속으로 잔뜩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머리 뚜껑이 확 하고 열릴 기세였지만 사회적 체면이 있는지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비시시 웃기만 했었다. 말로는 아기도 시어머님 당신이 기르실 거니 걱정하지 말라 하셨으나 우리 정서에 어찌 또 그럴 수가 있느냔 말이다. 이렇게 하여 하루하루 나의 시간은 열받는 일로만 채워져 갔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시아버님 식사를 챙기고 시누네 두 딸의 도시락을 싸서, 머리 빗겨 보내고 또 한 차례 시누네 밥상 차리고서야 겨우 마지막으로 앉아 한술 먹고 숨 돌리고, 또다시 아래 위층을 종종걸음으로 다니면서 청소와 정리에 빨래를 하고 나면 시간은 어느덧 저녁 할 시간으로 달음질을 쳐서 그 좋아하는 커피 한잔을 여유롭게 즐기지 못하고 또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한 바퀴 돌아야 했다.
‘나도 귀한 집 자녀인데 이 꼴이 대체 뭐야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욕이라도 할 줄 알면 속 시원히 다 쏟아붓고 싶은데 그것도 못 하겠고 한껏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져서 토요일이면 남편을 불러내어 남들은 사랑 타령을 하는 카페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살벌하게 전쟁하곤 했다.
하지만 겉모습만은 철저한 효자 장남인 남편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회사를 아예 서울서 본가가 있는 인천으로 옮겨버리고 말았다. 도무지 회사 핑계로도 도망갈 구실을 못 찾은 난 점점 말을 잃어가고 있었고, 생각의 힘도 빠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매일 스트레스를 삭이고 화를 누르며 지낼 뿐이었다. 겉으론 예의 바르고 부모를 공경하는 척했지만 속으론 온통 불타는 화로 하나를 품은 채로 말이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콩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 하면 잘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며 선한 분이시고 아주 유약하신 분이라고 남들은 시어머님을 평가하지만 정작 당신 딸에게는 제대로 가정교육을 못 시킨 것 같아 아주 답답하고 못마땅했다. 아무리 외국 살이 하다 잠시 한국에 들르러 왔고 비자 문제로 계속 지내게 되었더라도 살 곳을 마련해 나가는 게 상식이지 않은가? 더구나 동생 댁이 들어왔는데 한 두 달도 아니고 일 년 이년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같이 끼어 살면서 자기 자식 건사도 안 하고 룰루랄라 놀러만 다니는 건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좋은 소식 하나가 들어왔다. 캐나다에 갈 수 있는 탈출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당장 가야지! 다 때려치우고 가자. 돈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더라도 난 여길 도망쳐야겠다는 맘이 들어 좀 머뭇거리는 남편을 재촉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캐나다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시부모님이 따라오시고 시누 네도 쫓아왔다. 쓰레기차 피하다 똥차 만난다더니 내 꼴이 딱 그러했다. ‘아, 난 역시 이 시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보다’하는 생각에 더 큰 분노가 폭풍처럼 몰아쳐왔다.
그렇게 22년이란 세월 동안 시집살이를 하다가 3년 전 시어머님이 세상을 뜨시면서 모든 게 종결되었다. 더 이상 시댁하고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고 모든 화 덩어리를 몽땅 그 매장지에 같이 쏟아 넣었다.
상처를 입어도 속 끓이지 않고 화내지 않는 나무처럼 겉은 점잖게 포장해 놓았으나 그건 그 긴 세월을 그저 내 감정을 누르고 눌러 둔 일종의 환상 게임이었을 뿐이었다.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상처는 남아 순간마다 머리통을 잡아 흔들면서 미친년 머리 끄덩이처럼 줄기차게 달라붙어 있었는데 장례식 후 한 순간에 온전히 사라져 버렸음이 오히려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분노와의 작별이 얼마나 속 시원하던지…… 내 마음속 저 밑바닥에 고여있다 틈만 나면 슬며시 기어 올라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며 괴롭히던 그 녀석이 이제 꼬리를 흔들며 줄행랑을 쳤다.
Good bye, angry bird.
<분노를 묻어 버린 날> 최성은 Sue
얼마 전 짹짹이 인형을 샀다
2022년 1월 1일부터 시작된 514 챌린지.
새벽 5시에 일어나 김미경학장님 강의를 20분 정도 듣고 나머지 시간은 각자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는 시간이다. 추석 때 새벽에 급체로 응급실 가는 바람에 1년 중 이틀 빠진 시조새다.
주위 사람들에게 추천도 하고 유튜브 링크를 새벽에 보내주기도 했지만 다들 며칠 가지 못했다.
아침에 시어머님께 강의 내용을 말씀드리니 새벽예배 드리기 전에 들을 수 있다 하셔서 중간부터 아침마다 링크 주소를 보내드렸다. 본인을 " 늙짹"이라고 하신다. 어머님은 85세 나이신데도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다
어느 날 어머님 말씀하시길,
"내가 직업이 몇 개인 줄 아니?"
집 뒤 텃밭에 나가서 직접 심은 야채를 따와 요리를 하면 요리사요, 안방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면 화가요, 건너 방에 가서 옷을 만들어 입으면 디자이너요, 노인복지관에 가서 공부를 하면 학생이요, 시니어클럽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직장인이니 당신의 직업이 5개라는 것이다. 요즘은 젊은 시절 잠깐 하셨던 게이트볼 운동까지 다시 시작하셔서 하루하루를 즐겁고 알차게 채우고 계신다. 다양한 곳에 열정이 가득하신 어머님은 이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까지 손을 뻗치셨다.
어머님이랑 같이 살게 된 건 아버님이 암으로 돌아가신 2006년부터이니 조금 있으면 20년 가까이 된다. 우리가 둘째인데 아주버님은 2001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 버리셨고 어머님이 우울증 약을 드시고 있으신 상태였기에 합치게 되었다. 같이 살면서 중간에 신랑이 나가 살자고 한 적이 있다. 자기 엄마랑 도저히 같이 못살겠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참견한다고 그때 내가
“ 혼자 살 수 있는 분이 계시고, 그렇지 못한 분이 계신데 어머님 혼자 사시면 오래 못 가실 거 같아” 하고 말했다. 그렇게 고비를 넘겼다.
내가 맘 편히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늦은 나이에 준우(아들)를 낳았지만 어머님이 키워주시면서, 살림도 도맡아 해 주시고 준우 피아노레슨비랑 학원비까지 다 내주고 계신다. (아버님이 공무원이었기에 연금이랑 상가 세 까지 나오시니 여유가 있으시다.)
남편은 우리가 얹혀사는 거라 말한다. 주위분들은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이 요즘 어디 있나고(?)
"불편하지 않아요?" 하며 신기하게 보는 분들이 계신데 나는 그분이 더 신기하다.
단독주택이고 어머님 1층, 우린 2 ~ 3층을 쓰기에 각자 공간이 있어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불편하지 않지만 그래도 같이 생활하다 보면 부딪칠 때가 종종 있다.
예전엔 회사 갔다 오면 택배가 뜯어져 있는 걸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었다. 어머님은 혹시 상한 것일까 봐 뜯어보셨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는 않으신다. 얼마 전에 택배 가 계속 오니 뭐냐고 물어보셔서 짹짹이 인형을 샀다고 했더니, 왜 사냐고 '사지 말지'하신다. '금액이 비싸서 못 샀는데 이번에 할인을 많이 해서
기념도 되고 나중에 저희 샵에 짹짹이분들 오게 되면 바로 인증이 되니깐요. 전 그냥 사지 않아요. 생각하고 사요.' 하며 이렇게 구구절절 답을 해야 되는 것이 피곤할 때 있다.
며칠 지나 친정아버지 친정엄마가 몸이 많이 안 좋아져 일전에 사다 드린 "단백질가루"를 부탁하셔서 이 트레더스 갔는데 판매하지 않아 다음날 “이마트 좀 갔다 올게요” 말씀드리니 왜 그렇게 자주 나가냐 하신다.
"살게 있어서요"
휴,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다. 그런 일이 있고 이틀 후 어머님이 아침을 하시면서 일주일 전에 내가 농수산물시장에서 야채를 사 온 것을 보고 (농수산물시장에서 야채를 살 때는 한번 오기도 힘들고 샤브샤브도 해 먹고, 2천 원어치 시금치의 양도 많았고, 채소를 많이 먹어야 될 것 같아 브로콜리 등이것저것 한 일주일치 생각하고 사 왔지만 계속 늦게 퇴근하게 되어 냉장고에 야채가 많이 남아 있었다.)
어머님이 '한 말씀하시겠구나' 예상을 이미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야채를 왜 이렇게 많이 샀냐고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지 마라, 말씀하시길래 '어머님은 왜 맨날 하지 마라, 가지 마라, 사자 마라, 먹지 마라 하세요' 하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알겠는데요. 말끝마다 '~~ 마라'라고 하세요. 그럼 왜 사는 걸까요? 연명하는 것 같아요."
"내가 언제 그랬어?"
"물론 예전에 비해서 덜 하시지만요."
내가 연어를 좋아해서 가끔 기운이 떨어지면 코스트코어에서 연어를 사 와서 먹게 되면 무슨 맛으로 연어를 먹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번은 양념깻잎에 싸 드시더니 맛있으시다 하셔서 웃었다.
같이 산다는 것이 참 무섭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입맛까지 변하게 하니 말이다.
(어머님이 워낙 검소하시고 검소가 몸에 배어 계신 걸 알지만 한 번은 말씀을 드려야 될 거 같아)
어머님은 너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받아친다며 널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헉 이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닌데…) 하셨다. 사실은 이미 오랫동안 마음속에 불만으로 가지고 있었고, 매 순간마다 어머님이 이거에 대해 한 말씀하시겠구나 생각을 하는 습관이 생기는 바람에 어머님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내 말이 튀어 나갔던 것이다.
너무 똑똑해도 문제라고 끈기 있게 도전하는 것도 좋은데 열 번 잘하다 한번 잘못하면 다 사라진다며 말씀하셨다.
"어머님, 어머님은 말씀을 하셔서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많으세요."
“그래, 네 말은 내가 도움이 전혀 안 되었다는 거지?”
나는 너 잘 살길 바라서 하는 말인데 하시면서 서운해하신다.
"그거 모르는 거 아니에요 한 번은 말씀을 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앞으로 어머님 말씀 다 듣고 말씀드릴게요. 크리스마스 때 카드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앞으로는 똑똑한 며느리가 아니라 지혜로운 며느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가끔 어머님이 예전 시어머님이
“아비한테는 말하지 마라”하셨던 말을 지금 내가 너한테 하고 있다고. 예전에 할머니가 했던 행동을 본인이 지금 하고 있다는 말씀을 가끔 하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아~ 나도 나중에 어머님처럼 똑같이 <마라 여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난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을 하지만 나이 들어 걱정이 많아지면 노파심에서 말을 하게 되고 그때마다 어머님이 떠오를 거 같다. 그때 가서 '네~~ 네~~'하며 좀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던걸 후회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내일모레면 어머님이 미국 아주버님댁에 다니러 가신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그 빈자리가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맏아들 얼굴 실컷 보시고 형님이랑 진아가 있는 LA에 여행도 잘 다녀오셨으면
좋겠다. 우린 모두 자신의 존재, 인정 욕구에 목말라 있는 것 같다. 어느 순간에 많은 것들을 당연시 여기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좀 더 알아주고, 감사의 표현도 아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폰에 저장된 어머님은 ‘마라 여사님’이다. 아직 어머님은 모르신다. 혹시 어머님이 아시면 화를 내시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된다. 같은 말이지만 '~하지 마라' 대신에 '야채를 조금만 사라' 혹은 ‘’ 야채를 조금 덜 사는 것이 좋겠다’하고 말씀해 주시면 참 좋을 텐데...... 혹시 그런 날이 오면 ‘마라 여사’에서 ‘라라 여사님’으로 변경해 드려야지, 생각한다.
<마라 여사님> GM김수정
결혼 전에 직장에서 옆자리에 앉은 선배가 내게 말했었다. 종희 씨는 짜증이라는 단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야. 푸른 효소 같은 걸 먹어서 그런가? 아침 대신 출근하자마자 서랍에 넣어둔 효소를 타 마시는 나를 보면서 한 말이다. 자기가 보기에도 정말 열받을 상황인데도 난 아무렇지 않은 거 같다면서.
이랬던 내게 분노라는 감정을 선명하게 알려준 것은 남편이다. 총이 있다면 그의 머리에 쏴버리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고, 나보다 30cm가 크고 몸무게는 두 배나 되는 그를 내가 때려줄 수는 없으니 청부업자를 고용할까 하는 생각까지 머리에 스칠 정도였으니까.
남들한텐 착하다, 대단하다 소리를 들을 상황에서도 어쩌면 그리도 창의적으로 비난을 잘하는지... 결혼하고 10년쯤 지난 후에 그에 대한 답을 친정아버지가 주셨었다. 정서방은 아버지보다도 두 세대 앞사람 같다고.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조선시대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거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아무리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19세기 사람과 같이 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나는 그가 달라질 거라는 헛된 희망을 놓지 않고 20년을 버텼다. 그 세월 동안 내 안에 매일매일 쌓여가는 분노는 나를 갉아먹으며 변화시켰다.
온화하면서도 열정적이던 나는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변해갔다. 그런 내가 나도 싫었다. '내가 왜 이렇게 못나졌을까?' 남편에 대한 원망만큼 나에 대한 실망도 컸다.
냉소와 비난, 분노와 우울함이 가득한 집에서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랄 리가 없었다. 이민으로 힘이 들었을 아이들에게 사춘기가 찾아오니 나의 분노와 우울, 불안한 증세는 극에 달했다. 가정이, 부모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주지 못한 것이 아이들의 방황에 큰 이유가 됐으리라. 그래서 나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 바람대로 되지 않는 남편에 대한 마음과 기대를 내려놓기로 했다. 요즘도 남편이 기분 나쁜 말을 툭 내뱉으면 기분이 순간 안 좋긴 하지만 전처럼 분노가 치솟지는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화가 잘 안 나고, 일부러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상대방 입장이 잘 공감되는 성격으로 태어난 덕분에 짜증이 뭔지 모르는 사람, 이슬만 먹고사는 사람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아마 무난한 사람을 만났다면 분노라는 감정을 이렇게 제대로 경험하지는 못했을 거 같다. 분노라는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것이 사람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아마 죽을 때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 경험은 온화하지 않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하루하루가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들긴 했지만, 분노와 원망으로 죽어가던 내 마음을 다시 살려내는 공부와 연습을 할 수 있었고, 마음이 아픈 네 아이를 어떻게든 품어내야 했기에 기를 쓰고 희망을 찾아내 가며,
무너진 가슴을 추스르고, 아이들을 격려하며 살아온 시간만큼 깊어지고 성숙해진 나를 만나게 되었다.
<총으로 탕 쏴버리면 속이 시원할 텐데> 루비쥬
“이 선 넘어오지 마”
언제 이 말을 처음 배우고 쓴 걸까. 대충 말문이 트이면 제일 먼저 “이거 내 거야”라며 장난감을 사수하고, 정확히 반이라 우겨대며 책상에 줄을 긋고, 넘어오기 없기 약속을 하고, 짝꿍과 말도 안 되는 지우개 뺏기 싸움을 하다 끝내 한 사람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것으로 겨우 끝을 맺었다.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불쑥 내 영역을 침범하고 들어와 나의 소중한 것들을 건드리고 빼앗으려 할 때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인간의 본능은 수차례 경고의 단계를 넘어서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애초에 분노 자체에는 문젯거리도 아니었고, 매정하게 잘라져야 할 죗값도 아니었는데 지난날 내 삶은 무수히도 그 감정을 숨기라며 매섭게 나무라고 꾸짖었다. 분노를 어떻게 표현할지, 어떤 식으로 소화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내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어른들 앞에서 뚱한 표정조차도 맘대로 내비치질 못하고 목구멍에 딱딱한 불덩이 같은 게 갑자기 올라 울음보가 터지면 울면 못 쓴다 해서 애써 울음을 참아내야 참을성 있고 온순하며 좋은 아이라고 세뇌를 당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내 사회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정작 분노가 필요할 때는 눈을 감으며 모르쇠로 일관하고, 분노를 거두어야 할 때 살을 붙여 나와 상대방을 괴롭혀 상처만 남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내 분노가 너의 분노보다 더 크다며 분노 키재기를 하면서 나의 화를 미성숙하게 다스렸다. 상처뿐인 전쟁터를 터덜거리며 걷는 패잔병의 모습을 했을 분노를 떼어놓고 되돌아보면 분노가 분노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노는 그저 내가 올린 생각의 한 끗 촉발에 켜진 스위치로 형성된 감정 화학 덩어리일 텐데 영문도 모른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져,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거려질 때쯤 모든 상처의 원인 제공자로 낙인이 찍힌다. 분노의 생각이 채 아물기도 전에 얼렁뚱땅 응급조치를 한듯하지만, 다음번 분노 때는 더 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왜 분노가 일었는지조차 볼 수 없도록 눈을 가려버린다. 당뇨병보다 무서운 게 합병증인 것처럼, 고집과 불안으로 만들어진 생각의 확장이 말도 안 되는 소설까지 쓰면서 분노의 합병증을 만들어 낸다. 저녁 9시 뉴스에 나오는 흉흉한 사건들을 기어이 만들어내니 분노는 허탈하리라.
그냥 딱 한 번 만이라도 나와 너의 화를, 그리고 불만을 제대로 봐라만 봐준다면 좋겠다고 분노가 이야기하는 거 같다. 그리고 내 신념과 기준이 불의와 맞닥뜨릴 때 제대로 된 식별로 분노 스위치를 켜달라 부탁도 하며 거든다. 오늘은 그저 내 맘 어느 구석에 말없이 웅크리고 있을 '분노'라는 존재에게 인사 한마디 건네고픈 날이다.
<분노씨 안녕하십니까?> Pinkpen
분노에 관하여 매우 할 말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떠오르는 것이 정말이지 없다. 그래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생각났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과연 내 감정을, 그 당시의 내 분노를 솔직하게 글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그것도 내 일기 속 나만의 공간이 아닌 하나의 주제를 놓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글로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정답은, 우선 해야 한다는 것에 도달했다. 이건 숙제이자 나의 공부이다.
25살부터 나는 서비스업종을 시작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겁기도 했고 관찰하며 그 사람들을 알아가는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다. 아웃백스테이크 하우스 천호점 오픈멤버 모집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갔다. 보기 좋게 탈락. 그리고 5개월쯤 지났을까? 직원모집 광고를 보고 다시 도전했다. 내 첫 매니저, 지금 이 순간 그분의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 하나만큼은 배울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의 아웃백커 인생은 시작되었다. 트레이너였던 주디언니, 세상에 성격이 저렇게 더럽고 모난 사람이 다 있나? 이럴정도의 인성을 가지고 있는 언니였지만 이 사람 또한 엄청난 job knowledge로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1년쯤 지났을 때 FOH(front of house) 쉽게 말해 홀쪽 직원들은 이렇게 부르며 주방직원들은 BOH(back of house)라 불렀다. 미국회사이며 프랜차이즈로 한국에 들어온 회사이다. 나는 FOH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BOH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일을 배우는 그 자체가 너무 행복했다. 그리고 고객들에게 다른 직원들보다 무언가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이 지나 매장 트레이너가 되고 오프닝 트레이너가 되어 신규 매장 오픈교육도 파견되었었다. 매니저 시험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후보에서 명단이 사라졌다. 그 당시 내 매니저였던 알버트는 조이라는 직원(알버트 매니저가 총애하는 직원이었다)과 사이가 안 좋아진 틈을 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이제 전혀 안 나지만 나를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그렇게 또 1년이 흘렀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나는 더 이를 악물고 FOH와 BOH 일을 하며 아웃백 지식을 넓혀갔고 트레이너로서 나만의 교육책을 만들고 직원들 교육에 재미를 붙여나갔다. 나는 8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FOH , BOH 어느 위치든 마다하지 않으며 매니저로서 참 열심히 일했다.
세월은 더 흘러서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창업자셨던 두 사람은 ET.Jung과 ZEUS는 불고기브라더스라는 한식 프랜차이즈를 만들었다. 우연한 계기로 나는 아웃백시절 본부장님 중 한 분 JAMES의 소개를 통해 불고기브라더스에 경력직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입사하고 보니 전직 아웃백커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다음으로 많은 TGI출신 직원들이었다. 경험을 살려서 마케팅도 하고 직원들 교육도 시키면서 매니저 발령은 입사한 지 2달 만에 달성했다. 이때부터 나의 힘든 시절이 시작되었다. 매니저 미팅을 가면 아닌 건 아닌 거라며 본부장님들 앞에서 또박또박 말하고, 인건비를 줄이라는 본부장님들 앞에서 근무 시간을 거짓으로 할 수는 없다고 대들고, 직원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건데 최소한의 월급 스케줄을 주어야 비전을 가지고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지 않겠냐고 대들기 시작하면서 나의 인사고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본부장님은 나를 지방매장의 새로오는 점주들 밑에서 일하도록 발령을 내곤 했다.
화가 났다. 여우처럼 인사본부장에게 '알랑방구'나 뀔 위인이 되지 못해 비합리적인 인사발령을 많이도 받았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전 매장에서 성과가 제일 좋아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두 좌천 같은 발령뿐이었다. 그렇게 왜 난 항상 승진이라는 문 앞에서 매번 보기 좋게 물을 먹고 분노를 삭여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나의 모습이다. 하다 하다 인사본부장은 승진 시험에서 1등 한 나를 꼴등으로 바꾸어서 전사 이메일에 보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지방 오픈 매장에 발령받았고 그 매장을 끝으로 퇴사했다. 그때의 분노를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리고 질문하게 된다. 왜? 왜인 거지? 여전히 난 잘 모르겠다. 사회가 아직도 그렇게 업무로 평가하지 않고 그저 잘 보이려는 입놀림으로 평가하는 지도 이젠 알 수가 없다.
오래 걸렸지만 그 분노를 8년 정도 다른 일들을 겪으면서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사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여전히 나는 업무평가에 있어서 종종 분노를 한다. ‘왜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는 걸까?‘라는 질문도 여전히 하면서 살고 있다. 단지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불공평하며 내 분노를 세상에 드러내기보단 분노라는 감정을 잘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보단 나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란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다. 좀 늦게 알게 되었으면 어때? 그전과는 다른 나의 모습으로 분노를 다스리며 세상을 배워나가고 있잖아?
때로는 분노라는 감정이 우리 자신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이로운 도움닫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오랫동안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면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으니 분노, 그 마음이 외치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분노> JAcKY
나는 화를 잘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쉽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도 않는다. 누군가와 싸워 본 적도 없고, 내 화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져 본 적도 없다. 동생들은 어렸을 때 나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언니랑은 전혀 싸움이 되질 않아. 무슨 이야기를 해도,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화를 내는 법이 없었지. 결국 나 혼자 미친년처럼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제풀에 꺾이는 꼴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그럼 난 성경에 쓰여있는 잘 참고 기다리는 자, 노를 버리고 불평하지 않는 자일까? 그렇다면 내 길이 형통하고 늘 마음이 평안해야 할 텐데 그런 것 같지 않다. 난 화를 잘 참는 자, 분노를 잘 다스릴 줄 아는 자가 아니라 내 감정을 외면하고 분노를 모른 척했을 뿐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화가 날 일이 생길 때마다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우울과 좌절로 내 감정을 정리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종종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런 일조차 자주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40년이 넘도록 철저하게 잘 외면하도록 훈련된 덕분에 화를 느끼는 임계점이 매우 높게 설정되어 있는 듯하다. 지금에서야 우울과 좌절로 눈물 흘렸던 그 시간들이 결국 분노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화가 났던 그 순간에도 나 자신은 화를 잘 낼 줄 모르는 사람, 분노를 잘 참는 사람이라고 철떡 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처하는 나 자신은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운 좋게 인생 처음 상담이라는 걸 받아봤다. 누군가가 온전히 내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여주고, 또 내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대가 되었다. 첫 상담 날짜가 다가 올 수록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주제로 상담을 받아야 후회 없는 시간이 될까? 상담을 통해 난 무엇을 깨닫고 어떤 변화를 시도하게 될까? 난 과연 얼마만큼 내 마음문을 열 수 있을까? 나 조차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내가 선택한 상담주제는 한창 자기 계발에 푹 빠져 있었기에 당연히 나의 비전과 계획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상담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서 그동안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마음속 이야기들이 저마다 자기가 먼저 말하겠다고 난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었듯이, 누구나 다 겪는 일일 거라 생각하며 내 안에 꾹꾹 눌러 놓았던 가족들로부터 받았던 마음의 상처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때는 화를 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난 펑펑 울고 말았다.
그때 나는 화를 냈어야 했다. 아니 화가 날 것 같다고 이야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더 이상 나에게 말로써 상처를 주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 나 스스로를 보호했어야 했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화'라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무작정 참으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내 마음속 어딘가 빈자리를 찾아 열심히 깊은 구덩이를 판다음 이 감정을 구겨 넣어 발로 잘 밟아 덮어두는 작업을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내가 얼마나 속상한지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그 감정 앞에 솔직해져야 이 “분노”라는 나의 일부분도 잘 데리고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가끔 집안에서 내가 보이지 않을 때 아무도 없는 지하 창고, 주차장 깜깜한 자동차 안, 아니면 꼭 걸어 잠근 화장실을 살펴봐 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소리도 못 내고 쪼그리고 앉아 꺼이꺼이 울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씩씩하게 내편이 되어 물어봐 줬으면 좋겠다.
“왜! 왜! 무슨 일이야??? 도대체 누가 널 화나게 한 거야!!!”
<분노> 패미로얄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크게 분노한 적이 있으며, 분노의 복수를 한 적이 있다. 그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일했던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이 캐나다로 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사로 햇수로 13년을 근무하면서 청소년복지와 다문화/외국인복지 분야에서 일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근무하면서 다문화정책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전국 최초로 다문화전문위원 모집 공고를 보고 바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서류를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간 날 면접관들의 질문 중에 합격하면 이사할 생각도 있냐는 질문에 이사할 수 있다고 답변하고 합격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면접을 보고 나오는 길에 주변 집 시세도 알아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처음 출근했을 때 소장님과 직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설렜던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모집 공고에 나와 있던 이야기와 달랐다. 내 직책은 다문화정책 제안은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었고 주로 벤치마킹으로 기관을 방문하는 분들을 응대하고 브리핑하는 일이었다. 일 복이 많았던 나는 입사한 해에 국제 다문화 포럼 부대행사와 상사 발표 준비, 홍보물 개편, 인원 모집 등을 야근하며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일했다. 성황리에 포럼을 마치고 부장급이 포럼 부대행사와 홍보물에 대해 칭찬을 하자 이상하게도 나의 직속 상사인 팀장님의 표정이 애매모호하게 어두워졌다.
그다음 해에 소장님이 바뀌고 나의 위치와 업무가 바뀌는 황당한 경험을 해야 했다. 두 번째 소장은 나의 직책에 대한 채용을 처음부터 반대했기에 내가 입사한 첫날부터 곱게 보지 않았고 본인이 내 업무를 더 잘 안다며 나의 업무를 가져가고 다른 분야로 자리까지 이동시켰다. 또한 대외활동으로 대학교로 강의도 나갈 수 있었으나 나에게 주어질 그 기회는 소장님에게로 갔다.
대학교 교수님이 우리 기관의 직책을 잘 모르고 내가 전에 근무했던 직장의 직책 "과장"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그날 계약직 직원들의 직책 팻말을 계약직으로 바꾸라고 담당 직원에게 지시했다. 나는 다른 계약직 직원들에게 미안했고 너무 황당한 업무 지시에 할 말을 잃었다. 담당 직원이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업무 관련 팻말로 변경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하기 싫어하는 업무도 맡게 되면서 주말 근무도 하게 되고 새로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다행히 바뀐 업무 직속 상사는 부당하게 대하는 소장에 비해 나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또 하나의 큰 부당한 일은 내 업무의 일부를 모 기관의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평가 담당자가 전 직장부터 알고 있던 분이라 내 실질적인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 와중에 (문제의) 그 소장님은 식사도 접대하면서 예산을 따겠다는 포부로 평가받는 날을 고대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나와는 의사소통한 것이 없었고 평가 담당자가 식사를 거절하고 현장에 있는 담당자(나)와 차나 한잔 마시겠다고 했더니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000, 내 눈앞에 띄지 말라고 해."라고 소리쳤다며 직원이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다른 건물로 쫓겨났고 재계약 시점에는 계약일까지 결재를 미루는 바람에 담당부서에서 연락이 왔었다.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부당한 대우에 나는 출근하기가 싫어졌고 퇴사를 고민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내가 경험한 부당함을 설명했더니 진정서를 접수할 수 있으며 상황 파악을 위해 직원들이 나와서 확인하고 공문으로 주의 조치를 줄 수 있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진정서를 제출하고 싶었지만 사람 일은 모르기 때문에 친한 직원과 상의했더니 퇴사하려고 한다면 좋게 마무리하고 나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소장은 직원들에게도 나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등 유치한 수를 썼다.
결국 나는 소심한 복수로 아버지에게 SOS 요청해서 아는 시의원을 통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시의원님이 나를 소장에게 친한 의원 조카라고 소개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다음 날 나를 소장실에 부르더니 커피까지 손수 타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예상대로 소장님은 높은 사람들에게는 고개 숙이고 만만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는 부류였다. 직원들에게 들은 소문에 의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퇴사 결심을 하고 캐나다로 유학을 준비하였는데 소장직 인사이동이 있었고 세 번째 소장님을 만났다. 이분은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부분을 보상해 주듯이 기존 업무와 자리로 옮겨주셨고 내가 열심히 한 일에 대해 인정해 주고 지원해 주셨다. 그리고 퇴사 일주일 전에 우수 직원 포상으로 제주도 연수까지 추천해 주셔서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 일 이후에 한 동안은 '어차피 캐나다로 오는데 인권위에 신고할걸'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노에 대한 복수는 좋은 결말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한다.
<부당한 대우, 분노와 복수> 캐나다아하
분노를 떠올리니 빨간색 포장에 노란색 불꽃이 그려진 불 라면이 떠오른다.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완곡한 표현으로는 다혈질인 사람, 하지만 내가 보기엔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이다. 영문도 모르게 불같이 화를 낼 때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남편의 분노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우리 가족은 그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가장 난감한 경우는 가족들이 차를 타고 가다가 뭔가 본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단어에 폭발하며 감정 조절 능력을 잃고 마는 때다. 어디로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차 안에 갇혀서 그 화를 다 흡입하는 날이면, 양손으로 의자 천 시트를 꽉 붙잡고 나도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시선을 최대한 창밖에 고정하자니 애꿎은 목이 뻐근하고 아프다.
하루는 온 가족이 지인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아서 그 집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날도 무슨 단어가 본인 심기를 건드렸는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나는 마치 24개짜리 달걀 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전혀 기억도 안 날 만큼 내가 보기엔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저녁 초대한 집을 불과 1km도 안 남긴 가까운 거리에서 갓길에 차를 대놓고 목덜미를 잡으며 혼자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의 감정 폭발에 나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혼자 분을 삭이며 분노했다. 부모 양쪽이 소프라노로 목소리를 높이면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도가니가 될 것 같아서 나름 내가 익힌 방법은 침묵으로 그가 혼자 분을 삭일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파티에 가기 전에 가졌던 온갖 기대와 설렘은 이미 사라졌고, 이런 똥 밟은 기분으로 얼굴에 가면을 쓰고 애써 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비참했다. 기러기 부부로 살고 있으니 이렇게 떨어져 지내며 그나마 그의 분노를 일 년에 몇 번씩 한시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조금씩 커가며 아빠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대뜸 묻는다. “엄마, 아빠는 얼마나 계시는 거야?”
그날도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주일 예배가 끝나고 곧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비치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집에 다시 들러 점심을 먹고 가기에는 번거로울 것 같아서 코스트코에 가서 간단히 핫도그와 푸틴을 사기로 했다. 남편은 코스트코에 앉아서 먹고 가자고 했지만, 나는 주일 오후에 어마어마한 인파 속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우연히 아는 사람들 만나서 인사 나누며 그곳에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음식을 사서 차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때부터 남편은 속에서 이미 화가 나기 시작했었다. 본인 뜻대로 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안 먹겠다던 큰 아이가 아빠가 운전하는 동안 본인 무릎에 올려 뒀던 아빠 핫도그를 한입 베어 먹은 것이 탈이었다. 안 먹겠다고 해서 큰 아이 것은 안 샀는데, 아빠 핫도그를 한입 먹었으니 식구들은 당황했고, 남편에게는 불난 집에 휘발유를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비치로 가는 동안 내 머릿속은 많은 생각으로 복잡했다. 과연 이런 기분으로 비치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까? 집으로 차를 돌리는 낫지 않을까?
한국에서 직장 생활할 때, 같은 사무실에 미모의 능력자가 바로 내 옆 자리였다. 그런데 그녀는 비밀이 많은 듯 사생활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알듯 모를 듯한 사람이었다.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다녔지만, 아이 아빠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고, 고등학교 때 미국에 살아서 영어가 아주 유창했는데, 미국에서의 생활도 잘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사생활이니 몰라도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녀의 기분에 따라 사무실의 분위기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사무실에서 같이 일했던 대부분의 사람이 다들 평화주의자라 그녀와 맞붙어 싸우기를 싫어해서, 그녀의 기분이 저기압인 게 보이면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각자의 일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말을 한마디도 안 하고 하루를 보낼 수는 없는 일. 업무를 하다 보면 원치 않아도 그녀와 말을 섞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불쌍하게 그날의 희생양이 되는 그 사람은 그녀의 쌀쌀맞고 도도하고 재수 없고 싹수없음을 온통 뒤집어쓰고,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을 정말 환장하게 하는 건 그녀의 기분이 좋을 때는, 간도 쓸개도 다 빼내줄 만큼 엄청나게 친절하다는 사실이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두 번 놀랐다. 그녀의 미모와 유창한 영어실력, 그리고 그녀의 무드 스윙. 어떤 게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혼자 궁금하고 있을 때 그녀가 동정심을 유발하는 말투로 본인이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앓고 있어서 약을 먹는 중이라고 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하면서도 갑상선 병을 앓고 있는 모든 환자가 다 이런 걸까? 의문이 들며 그녀에게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만 같다.
분노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에 관심을 두되, 나는 어떤 감정에 나의 에너지를 쏟을 것인가 어떤 감정이 나의 행동으로 발현되기를 원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분노의 추억> 소냐민정
한국인들에게는 다른 민족이 갖지 않은 병이 있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병명조차도 '화병'(hwabyeong)이라고 할 만큼 화병은 우리 민족에게만 해당하는 고유한 병이라고 한다. 화병이라는 병명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를 위한 미국 정신과 학회의 매뉴얼에도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다른 민족들에게서는 진단되지 않고 우리 민족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증상들로 대별되는 이 병을 따로 구분하여 부를 어떤 이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상담심리 강의를 들을 당시 몇몇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의 '화병'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화병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내재된 '화'가 가슴속 깊은 어딘가에서 분화구를 찾아 이리저리 흐르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느끼며 살고 있었으니까.
나의 분노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예전엔 별로 생각지 않고 살았었다. 평소에는 담담하고 정적으로 보이는 내 마음속에서 화가 분화구를 찾아내도록 돕는 원인들이 무엇인지 나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런 만큼 나의 분노는 갑작스럽고 힘 있게 솟아오르곤 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자신에게도 적잖이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많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엄마도 남들이 표면적으로는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는 히스테리컬 한 면을 갖고 있었다. 엄마가 가진 히스테리의 근원을 나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나의 외할머니가 이따금 신경질적인 화를 터뜨리곤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인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나의 친할아버지나 친할머니가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맏딸인 나는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동생 셋을 돌봐야 할 때가 많았다. 동생이 하교 길에 어디론가 사라지면 동생을 챙기지 못했다고 혼이 났다. 남동생을 돌보면서 업어주다가 함께 넘어져 동생이 다치게 되었을 때는 내가 일곱 살 때였던 것 같은데 그때 아버지에게 맞으며 느꼈던 온몸의 고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도 내가 왜 맞아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동생이 귀여워서 업어 주었을 뿐이었다. 동생을 업어주며 가졌던 누나로서의 뿌듯함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중학교에 다닐 때, 엄마가 외출하시고 안 계신 동안 동생이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을 때는 동네 외과 병원으로 업고 뛰어야 했다. 그 마음씨 좋은 의사 선생님은 누나가 애쓴다며 돈을 받지 않고 동생의 상처를 꿰매어 주셨다.
그렇게 자란 내가 시집을 갔다. 공부하는 아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그 당시 남편의 어머니는 전화도 바꾸어주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워 헤어지려고 했으나 남편은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 후 결혼을 하고 호된 시집살이를 겪으면서 나는 누누이 그때 단호하지 못했던 나를 책망하곤 했다.
시어머니는 기분이 좋은 때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늘 마음속이 지옥인 듯해 보였다. 고분고분 눈치를 보던 새댁인 나는 그녀가 분화구를 터뜨리기 좋은 대상이었다. 직장을 다니던 나는 퇴근 후 밥을 하고 저녁상을 치운 후 다음 날 아침상을 위해 국을 끓여놓고 반찬을 준비한 뒤에야 아이를 씻기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주말에는 빨래며 식구들의 세끼를 챙기고 치우느라 나에게는 휴식이라는 게 없었다. 설에는 양력설, 음력설 모두, 시아버님의 손님을 평균 70여 명 정도 치르느라 친정에는 가보지 못했다. 손님을 사흘쯤에 걸쳐 다 치르고 나면 제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는 시어머니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늘 부족하고 미련한 며느리였다. 보란 듯이 선을 봐서 조건 좋은 며느리를 보려 했는데 일이 틀어졌음을 아쉬워했다. 아들이 '제멋대로 연애를 해서' 말이다.
몇 년 전, 그 이상 견뎌내려고 만용을 부리다가는 내가 온전치 못하리라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지키려는 결단을 내렸다. 시집에서 나온 것이다. 효자 남편 더러는 당신 엄마와 함께 살라고 했다. 그러나 당신 아들이 절대 당신을 뒤로한 채 마누라를 따라나서지 않으리라고 호언하던 시어머니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몇 년이 흐르는 사이 치유가 서서히 일어났다. 매일 맞닥뜨리며 이겨내야 했던 자극들이 더 이상 없어졌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으며 홀로 계신 친정 엄마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맘 편히 자주 방문할 수 있으니 내 속에서 좌절감으로 내리눌려 발산되지 못하던 분노가 힘을 잃고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화가 나면 내게 거친 욕도 서슴지 않으시던 시어머니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분노도 상처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그분의 과거 상처가 빚어낸 그분 마음속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기까지 하다. 엄마 없이 자라 학교에도 가지 못 했고 종국에는 청상과부의 아들에게 시집을 와 갖은 시집살이와 남편의 무례함을 견디면서 마음에 화가 켜켜이 쌓였으리라. 혹여라도 며느리가 자신을 무시할까 봐 어떻게든 권위를 세워야만 했으니 늘그막에도 그분의 마음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홀로 남으신 엄마에 대해서도 나는 예전의 분노를 품고 있지 않다. 너무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이 넷을 기르기에 겁에 질린 그분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육 남매의 셋째였던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보다 학업이나 경제력에서 앞서 있어서 큰아버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고 부모님을 모셨으며 여동생들을 독일에 간호사로 보내주었다. 며느리 중 둘째였던 엄마는 시부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셔야 했고 시누이들과 시동생을 한 집에서 부양하다가 각자의 길로 내보내야 했으니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시집와 찬 물에 빨래를 문지르던 엄마의 손은 시집오기 전엔 첼로를 연주하던 손이었다. 그들 마음속에 쌓여있던 분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없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들의 행동도 이해가 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치유를 불러오는 큰 축복이다. 그보다 더한 축복은, 내 삶 구석구석에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을 흑역사가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나에게는 최근 몇 달간 그런 깨달음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을 나도 똑같이 누군가에게 했었던 일이 생각났던 그 순간의 경험은 신비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에게서 화가 사라지게 한 또 다른 원인은 에크하르트 톨레이다. 그의 책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원제: A New Earth)를 읽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과거의 스토리가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다. 과거는 사라지고 없으며 나에게는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분노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도 나에게 분노를 일어나게 할 수 없다. 분노의 원인은 내 생각에 있다. 분노는 나의 에고가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요즘 나의 에고를 건드리는 일이 일어날 때는 즉각적으로 반응(react)하기를 멈추고 침착한 대응(respond)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 순간 멈추어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현상을 초연히 바라보면 즉각적으로 화내는 일을 줄일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아마도 평생이 걸리는 일일 것이다.
<영원히 눈 감는 그 순간에는 정리해야 할 분노가 더 이상 없기를> 빵굽는 엄마
함께 있으면 재미있는 친구, 즐거운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에는 한창 코로나로 소셜게더링을 못하게 하던 때라서 이웃 간에 인사하기도 쉽지 않았어요. 그렇게 따로 섬처럼 조용히 떨어져 지내다가, 이웃에서 가라지세일을 할 때 함께하게 되었어요.
세 집이서 모여 가라지 세일을 하면서 서로 도와 물건을 팔고, 세 집에서 모인 8명의 아이들끼리 따로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처음에는 다 같이 몰려다니며 노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차경주와 몬스터 트럭을 좋아하는 세명의 그룹이 생겼어요. 바로 우리 집 막내와 리비아네 아들 둘이었어요. 셋이서 어찌나 죽이 잘 맞던지 몇 시간을 놀아도 지치지 않고, 또 싸우지도 않고 잘 놀더라고요. 학년은 모두 다르지만, 셋다 같은 학교에 같은 스쿨버스를 타니, 거의 하루 종일 어울려서 잘 놀았어요.
서로 돌아가며, 플레이데잇을 하던 어느 날, 리비아로부터 문자가 한통 왔어요.
주말에 본인이 약속이 있는데 3시부터 4:30까지 아이들을 봐줄 수 있냐고요. 시간이 되면 당연히 봐주는데, 그날은 신랑이 3시부터 3:30까지 줌으로 면접이 있는 날이었어요. 온라인 면접이라 집에서 해야 해서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고 문자를 했죠. 그랬더니, 본인이 약속을 바꾸겠다면서 1시부터 2시까지 봐달라고 하는 거예요.
음.. 시간을 본인이 정해서 통보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끼리 잘 놀고, 평소에도 자주 봐주었기에 알겠다고 했어요.
아이들은 평소처럼 신나게 뛰놀았고, 시끌벅적 아이들 키우는 집 같았지요. 그런데 2시 반이 되어도... 리비아에게 아무 연락이 없는 거예요. 문자도 하고 전화도 했는데, 연락이 되질 않았어요. 남자아이들 셋이 거실에서 카레이싱을 하고 노는 바람에 티브이를 보고 싶다는 우리 딸내미들은 아이들이 집에 가면 그때 보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어요.
신랑 면접 시간은 다가오고, 아이들이 점점 더 신이 나서 소리치며 놀고 있는데... 아이엄마는 연락이 안 되어요.
내가 돈은 받고 아이를 맡아주는 베이비시터도 아니고, 아이들끼리 즐겁게 놀라고 선의로 시작한 일인데, 분명히 온라인 면접이 있다고 시간까지 알려주었는데.. 아무런 연락도 없는 이 엄마에게 점점 화가 났어요.
결국 2:55에 아이들을 꼬셔서 밖에 나가서 놀기로 했는데, 한 녀석은 너무 피곤해서 밖에서 놀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요. 집으로 가고 싶다는 거예요. 나머지 두 녀석은 놀이터에서 놀기 시작했고요. 결국 3시가 한참 넘어서야 늦어서 미안하다며 픽업을 하러 왔고, 아이들은 집에 가게 되었어요.
문제는 그다음에 이 엄마에게서 온 문자였어요. 시간을 못 지켜서 미안했고, 아이들이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겠다고 문자가 온 거예요. ;;;;
이게 무슨 말이지?? 아이들은 당연히 시끄럽게 놀 수도 있는 건데... 왜 이런 문자가 왔을까 하고 다시 보았더니,
제가 2:50쯤에 "어디쯤인지? 아이들은 행복하게 잘 놀고 있는데, 아이들이 너무 신나서 목소리가 커져서 면접에 방해가 될 거 같아 걱정이다 "라고 했거든요.
제 포인트는 3시 이전에 픽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는데, 아이들이 시끄러웠다 이 말만 보였나 봐요. 그리고 다음문자는 본인이 늦은 시간만큼 우리 아들을 봐줄 테니 본인 집으로 보내라는 거였어요...
기브 앤 테이크라고 말이 있긴 하지만 세상에는 1 대 1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이 있잖아요. 또 그 시간이 아니면 안 되는 일도 있고요.
오늘은 돌이켜 보면 화가 난 이유는,
3시에 면접이 있다는 걸 미리 이야기했음에도 그 사건을 존중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이었어요.
급한 일도 아니고 본인의 자유시간을 위해서 베이비시터 대신에 저를 사용하는 찬스를 썼다면, 최소한 픽업 시간을 지켜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 부분이 가장 서운했고, 화가 났었죠.
아이들이 당연히 시끄럽게 놀 수 있고, 한번 놀러 왔다가 재미있으면 서너 시간 놀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오늘은 우리에겐 특별한 날이었는데 말이죠.
신랑 면접이 끝나고, 제가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혼자 산책을 나왔어요.
하늘도 보고, 강물도 보고 눈도 밟으면서 생각을 비우는 연습을 했지요.
왜 화가 났을까?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첫 시작을" 내가 잘못했더라고요. "
첫째로, 그런 중요한 일이 있다면, 아무리 부탁을 해도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다고 이야기하거나, 시간을 면접시간 이후로 제가 바꿔서 제안했어야 했어요. 시작부터 내가 많이 양보하고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 마음이 바탕에 깔려서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았을 때 더욱 화를 부추긴 거예요.
둘째로, 우리 딸내미들이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남자아이들을 위층 방으로 올려 보내서 놀게 하고, 티브이를 보게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다리고 참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히나 아이들에게는 더욱 힘든 일인데, 한 시간만 참으라고 말한 것이 두 시간이 되어 버리니, 모두가 화가 난 상황이 된 거죠. 또 기약 없이 길어지는 상황은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꼴이 되니, 그 상황에서 딸내미들에 대한 저의 미안함이 분노와 원망의 감정으로 이어졌을 거예요.
셋째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기대를 많이 하면 안 되었어요. 당연히 이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은 모두 저의 입장에서만 옳은 말이더라고요.
그리고 모든 호의는 나의 입장에서 충분히 괜찮을 때만 베풀어야겠다는 점이에요. 아마도 그 엄마는 제가 전날 나잇시프트 알바를 해서 밤새도록 일하고 아침에 와서 쪽잠을 자고, 아이들을 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거예요. 피곤하고 힘든 건 그저 나 자신이었던 거죠. 나를 혹사시키면서 거절하기가 힘들어서 다른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었기에 그 피곤함이 분노의 감정으로 눈덩이처럼 불어 난 거예요.
이번 일로 영혼의 단짝을 만나서 매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아들의 친구관계를 재정비할 생각은 없어요. 누구에게나 사정을 있을 수 있는 것이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부탁을 들어주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 이렇게 걷다 보니 눈앞에 스타벅스가 있네요. 마침, 지난달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스타벅스 기프트카드가 잠바주머니에 만져졌어요.
오예!!
마치 로또를 샀는데, 한 장 더 티켓에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어요.
오늘의 저의 PICK은 바닐라 라테와 초코 머핀입니다. :) 달콤함에 분노의 감정이 녹아내리고 있어요.
<분노를 예방하는 법> 세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