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글쓰기 1주 차
'감정 글쓰기' 코칭 수업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글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강의/코칭/편집
황서영 no.more.thinking.and@gmail.com
마법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조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역시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설렘이 아닐까? 하루 첫 시작을 이런 가슴 두근거림으로 출발한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말이다. 이런 즐거움의 향연을 맘껏 즐긴 지난 연말이었기에 더더욱 설렘이 주는 기다림의 열매인 달콤함이 라벤더 향처럼 피어오른다. 햇살의 윙크로 깨어나는 대지처럼, 왕자의 입맞춤으로 눈을 뜨는 백설 공주처럼 선물로 다가온 딸아이의 캐나다 방문 소식은 바로 그 시각부터 내 마음을 팔딱거리게 했다. 몇 달 전부터 12월에 휴가 차 다니러 온다고는 했으나 갑작스러운 암 수술을 받기도 했고 회사 일정상 오기 힘들 거라고 했기에 올해는 못 만나겠구나 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어느 날 비행기 표를 끊었다는 전화를 받고 나니 기쁨에 마음이 흔들댔다. 이런 깜짝 선물은 늘 나를 황홀하게 하여서 가슴은 두근두근하고 괜스레 정신 놓은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게 된다. 아니 사실 동네방네 뛰어다니며 막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다.
"딸이 옵니다. 딸이 온다니까요. 하하하"
딸아이가 공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실실거리며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초록 이파리들의 싱그러운 눈인사처럼 순간마다 기쁨이 깃들었다. 게다가 방금 내린 커피 향은 오늘따라 더 깊게 향기로웠다.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조바심 나는 마음처럼 마구 진동하는 심장을 꼭 붙들어 매야만 했다.
그런데 하필 딸이 오는 날인 23일 어찌나 눈이 많이 내리던지 401 고속도로에 사고가 많이 나 길이 모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아이구 어째, 가슴만 조여들고 우린 오가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거렸다. 다행히도 큰애가 데리러 가서 작은 딸은 안전하게 도착을 하였고, 다음날인 24일 오후에서야 겨우 한쪽 길이 열려 부랴부랴 토론토를 향해 달려가 그동안 보고 싶었던 딸을 부둥켜안았다.
한국에 나가 산 지가 11년.
이후 해마다 캐나다를 방문했었고 우리 또한 한국을 자주 들락거렸으나 이렇게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성탄절과 연말 그리고 새해를 함께 누리기는 처음이어서 더욱 가족 재결합에 의미가 있었던 날이다. 거의 3주에 가까운 날들을 함께 먹고 마시며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재재거렸다. 진정 딸 셋과의 수다는 너무나 맛있는 감정의 진수성찬이다. 맛있는 것 먹으러 가기, 쇼핑하기, 네일 숍에서의 힐링 그리고 캐나다 원더랜드의 윈터페스트, 모녀의 팔찌 만들기 등 많은 경험을 통해 세 딸을 가진 나는 참으로 복된 엄마라고 느끼며 덕분에 10살은 더 젊어진 기분이다. 한국과 캐나다란 물리적 공간에서 그저 영상통화로만 아쉬움을 달래다가 이렇게 모두 모여 정을 나누니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싶다.
“살아간다는 건 설렘이야."
하루를 산다는 건 인연을 따라 운명을 건져 올리는 황홀한 만남이야.”라고 한 조희선 시인의 시구를 내 멋대로 곡을 붙여 흥얼거려 본다. 갓 구운 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그 냄새에 반한 채, 한 손엔 딸이 가져다준 브라질 커피를 들고서 겨울 공기 속을 뚫고 나온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쪽빛 하늘을 바라보는 이 아침 역시 설렘이다.
<설렘이 주는 선물> 최성은 Sue
"설레는 결혼 행복한 선택" 이 문구가 나의 회사 GM웨딩의 슬로건이다. 20년 넘게 이 일을 하는 동안 신랑 신부님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좋은 일 하시네요 , 보람되시겠어요', '늘 예쁜 거 보셔서 좋으시겠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살면서 내가 '안녕하세요?' 다음으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뭘까 생각해보니 '축하드려요'이고,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복 받으실 거예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끄럽다. 매번 모든 분들 진행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웨딩컨설팅과 웨딩플래너 일을 오랫동안 온몸을 바쳐해 왔다. 처음에는 촬영이 있을 때는 끝까지 남아 사진도 찍고 동영상 촬영까지 해서 앨범이랑 동영상도 CD에 담아 드렸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해드렸다. 손님들은 '스튜디오촬영 사진보다 때론 실장님이 찍어주신 사진이 더 마음에 들어요' 하실 때도 많았다. 사진은 누가 찍느냐에 따라 결과물에 무척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등학교 베프 친구인 루미는,
"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신부님과 친구이고 일상이고 취미 같아."
하고 말하곤 했다. 오래전에 결혼한 고객이었던 분들도 아직도 연락하고 왕래하며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놀러 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나는 보험(금융) 관련 정보를 이제 막 결혼하시는 고객님들께 공유하고 좋은 업체가 있으면 연결해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는데 다른 일로 바쁘다 보니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제 100세 시대라는데 내 나이가 50세쯤 되었을 때쯤에는 무언가 좀 더 확고한 계획이 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융을 알아야겠다는 더 이상 늦추면 안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보험회사 팀장인 지인이 결혼식에 와서 신랑, 신부님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위험한 직업군의 증가와 저금리, 그리고 100세 시대와 핵가족화로 인해 앞으로 보험이 더욱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FP 교육을 받고 생명, 손해, 펀드자격증을 따고 그 외 투자권유대행인, 퇴직연금자격증까지...... 그리고 작년 12월에 어렵게 재무설계자격증까지 따게 되었다.
만 5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 버렸다. 보험 쪽에 주력하다 보니 웨딩컨설팅, 웨딩플래너일은
소개로 부탁하시는 분만 몇 팀만 진행을 하게 되었다. 보험회사에 가서도 항상 웨딩이 따라다녔다. FP팀장님 자제분이랑, 동료 동생분들도 도움을 청하셔서 도와 드리게 되었다.
보험의 세계에 와서 웨딩을 세계를 보니 아, 정말 남들이 늘 내게 말했던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예쁜 것들 안에 살고 있었구나. 그때는 몰랐던 것 같다. 예전에는 그 많던 호텔들의 웨딩페어, 드레스샵의 웨딩드레스쇼 등 참 많았는데 코로나로 모든 행사가 중지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호텔웨딩페어에 초대되어 갔을 때 웨딩행사의 모든 것이 너무 예쁘고 내가 특별한 일을 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나는 국산, 외산 할 것 없이 예쁘고, 다양한, 멋진 웨딩드레스들을 보면 다시 설렌다. 웨딩드레스가 원래 이렇게 예뻤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하면서 언제까지 필드에서 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더 이상 이 일을 못하게 된다면 마지막 진행한 부부 한 쌍에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친하게 지내는 웨딩드레스샵 원장으로부터 들은 '뼛속까지 웨딩플래너'라는 칭찬이 오랫동안 큰 울림이 되어 머릿속에 남아있다. 올해도 몇 팀 의뢰가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캐나다팀 커플과 카톡을 주고받고 통화하면서 다시 설레고 있다. 새 신랑 새 신부님에게서만 느껴지는 순수하고 예쁜 느낌이 좋다.
“GM웨딩은 특별해요”라는 말에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한 팀 한 팀 설레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진행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젊은 시절부터 숙명처럼 지금까지 함께한 웨딩에 대해 책을 쓰고, 알프스오토메(작은 사과)가 가득한 가든을 만들어 신랑신부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편하게 놀러 오셔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또다시 설렘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고 늘 만남의 축복을 미리 준비해 두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다시 설렘> GM김수정
설렘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그 아이가 떠오른다.
초여름 같았던 소년.
그를 처음 본건 대학교 2학년 때 농촌봉사활동에서였다. 학생반 반장이던 그에게 학생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자존심이 상했고 속도 상했다. 내가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싶었다.
기가 잔뜩 죽어있던 나에게 열흘 내내 그 아이는 봄날의 햇살처럼 다정했고, 그의 웃음은 초여름 햇살처럼 빛나고 싱그러웠다. 그해 겨울 선배가 지도하는 그룹 세미나가 있었다. 그 아이와 나는 같은 팀이 되었고, 다른 팀원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 해 겨우내 매주 그 아이와 둘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했다. 중앙대 근처에서 모임을 했는데 길에서 구워 파는 호두과자가 유난히 맛이 있었다. 모임을 할 때마다 호두과자를 사서 나눠 먹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호두과자를 보면 그 아이가 떠올라 설렜다.
내가 다니던 치과 근처에서 그 아이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치과에 가는 날이면 그 아이를 만났던 거 같다. 세종문화회관에 공연을 보러도 가끔 갔었다. 공연이 끝나면 인사동에 살던 그 아이를 만났다. 공연이 끝난 후 어느 늦은 밤에 나를 보러 나온 그 아이는 정장을 멀끔히 차려입은 채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엄격한 형님 집에서 살았던 그 아이는 추운 밤 공중전화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와 대화했다. 그래서 공중전화부스만 보면 그 아이가 떠올랐었다.
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그 아이가 참 예쁜 글의 긴 편지를 보내왔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 언니는 너무 멋진 편지라며 부러워했고, 룸메이트였던 동갑내기 친구는 이런 편지를 보내는 사이인데 어떻게 사귀는 게 아니냐며 이해할 수 없어했다.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냐 했고 심지어 그 아이가 혹시 '게이'가 아이냐며 물었다.
아마도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첫사랑이기에 그 아이가 다니던 학교 연대, 인사동, 호두과자, 공중전화들이 내게 설렘으로 남은 걸까 생각한다.
설렘으로 남아있는 나의 첫사랑 - 루비쥬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연애 콘텐츠와 노래를 접목시킨 TV프로그램 방송을 보며 떠올렸던 노래 제목이다. 남녀는 서로의 노래 목소리만 인지한 채 방송 당일 가려진 막을 사이에 두고 노래를 부른다. 20-30대 방청객들이 누르는 설렘 지수가 일정 이상 되면 그 막은 걷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첫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을 맞는다. 심장 박동과 가슴 두근거림의 수치를 건강 상태로 직결해야 하는 나이지만 나도 그 청중의 한 사람이 되어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설렘 지수를 만끽해 본 적 있다.
나도 한때는 심장이 내 귀에 들리는 것이 들킬까 봐 애써 태연 한척했던 연애의 달콤함을 알기에 돌아보는 추억 소환일까. 기러기 부부 입장에서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대리 만족을 하려고 한 것일까?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훔쳐보는 관음증 아주머니라며 대리운전도 아니고 대리 설렘이 그 나이에 뭐냐며 핀잔을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인 설렘이라는 감정을 50대들이 부정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실제로도 트렌드 시장의 키워드 분석에서 설렘이라는 키워드의 주요 수요층은 20~30대가 50대보다 절반 이상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딱히 새로울 거리가 없는 일상 속에 대리 설렘이 뭐 죄인가. 그들의 기다림과 “처음”이라는 기대의 솜사탕 같은 설렘을 내 것인 양 착각도 잠시 해보며 기분 좋은 호르몬이 잠시 돌다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한 구절을 흥얼거리며 친구에게 익살맞게 되받아치고는 나의 촐싹 맞은 설렘을 혹여 점잖게 늙어가야 한다는 강박에 무릎을 꿇리고 싶지는 않았다. 매일을 인생의 첫날처럼 살자고 결정한 뒤로 시간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은 여전히 나에겐 가슴 떨리는 반가운 손님이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시절 설렘은 인생 살이 굵직한 일들로 인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알 수 없는 미지의 경험 자체에 대한 순도 100% 자연산 설렘이었다면 어엿한 중년 위치의 삶을 향한 설렘은 그 뱡향이 ‘나’에게로 집중됐다는 게 달라진 점이다. 이제는 설렘에 덧붙여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까지 미리 동반되어 오기가 부지기수라 설렘 자체를 마냥 핑크빛 감성만으로만 대할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다간 설렘이 욕심으로 탐욕으로 체념으로 그 모습이 변형되기 쉬워 무수히 다독거려야 할 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애쓰는 것이 안타까운 조금은 안쓰러운 설렘이라도 농익어가는 시간이 만들어줄 나를 만나기에 무거운 발걸음이라도 억지로 떼어보는 용기 때문에 힘을 낼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점잖고 멋진 어른의 모습 자체보다도 세상 속 존재감을 알릴 때 나에게 주어졌던 원래 그 기초로 돌아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설레고 싶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모습이 내 모습일지 두근거려 보며 반가운 악수를 할 수 있을 그날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여전히 설레며 살기로 했다.
‘나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에서’
<나잇값> Pinkpen
유일무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정성 가득한 이라는 수식어를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바로 나의 도자기다. 내 손으로 흙에서부터 직접 빚은 내가 만든 도자기.
1년 전 우연한 기회에 가출(?)을 목적으로 도자기클래스를 등록하게 되었다. 가족들에게는 특별할인이라 이번기회를 놓치기 아깝고, 한번 배워두면 도움이 될 거라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댔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답답한 일상 속에서 일주일에 딱 한번 2시간만이라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삼 남매맘', '워킹맘', '이민자'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내 하루는 쉴 틈이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신발장 앞에 아이들이 입을 옷과 양말과 겉옷을 층층이 쌓아놓고, 바로 신을 수 있게 네 켤레의 신발까지 정렬해 놓고서야 하루가 마무리된다. 다음날 아침, 눈썹이 휘날리도록 신속하게 싼 도시락을 네 개를 가방마다 쏙쏙 챙겨 넣고, 바나나와 머핀을 챙겨 아이들 손에 쥐어주고 미적거리는 아이들의 엉덩이를 밀어 차에 태운다. 차 안에서는 아이들에게 바나나와 머핀을 먹인다. 막내부터 데이케어에 맡기고, 딸내미들 정류장에서 스쿨버스 타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고 나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5-7분 남짓. 그 안에 출근을 마쳐야 한다. 아무리 서둘러도 출근시간 전에 도착하는 일은 없다. 마음 같아선 다른 동료들처럼 10-15분 먼저 도착해서 천천히 차도 한잔 마시고, 여유롭게 시작하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퇴근도 출근 못지않게 치열하다. 퇴근을 하자마자 마트로 달려가 장을 본 뒤 데이케어에서 막내를 픽업하여 집으로 온다. 그나마 신랑이 일찍 퇴근하는 덕에 두 딸내미를 픽업해서 짐네스틱에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 오는 임무를 수행해 준다. 그동안 막내를 돌보며 저녁을 준비하고, 딸내미들 오는 시간이 맞춰 식사하고 나면 육아전쟁의 제2막이 열린다. 똑같은 접시에 같은 양의 간식을 주어도 서로 많은 것을 먹겠다고 싸우고, 물과 우유든 도대체 마시라고 있는 것인지 쏟으라고 있는 것인지 하루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물난리가 난다. 방에서 장난감 가지고 잘 노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듣는 고함소리에 자다가도 환청이 들린다. 울고불고 싸우는 이유는 수만 가지인데, 한결같이 솔로몬이 되어야만 하는 엄마는 늘 머리가 아프다.
24시간 주 7일 근무를 하는 기분이다. 나도 퇴근을 좀 해야겠는데… 그런데… 갈 데가.. 없다…. 이런 고민 중에 우연히 보게 된 도자기 클래스 모집공고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설레는 가출?로 시작된 도자기 수업은 비록 일주일에 2시간뿐이었지만, 이 작은 일탈은 나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매일 살아내기에 급급하던 일상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이 조금씩 나에게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나 그저 다 같은 날들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도자기 수업을 기다리며 석방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5,4,3,2,1일 카운트 다운을 한다, 그 사이 작은 틈이 생기면 도서관에서 도자기 관련 책을 빌려와서 다음시간에 만들 작품에 영감을 얻었다.
공방에 가면 아무도 나를 엄마라 부르지 않는 것도 정말 큰 매력이었다. 옆에서 물을 쏟아도 흙을 엎어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일주일에 딱 2시간의 여유가 있는 곳. 그곳에서는 그저 나는 나였다. 세상이 붙여준 모든 타이틀을 떼어놓고 공방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흙과 나만 있을 뿐이다. 조물조물 힘을 주면 뭉개지고, 밀대로 밀면 펴지는 흙이 참 좋았다. 함께 수업을 드는 친구들의 기발한 아이디어도 나를 늘 설레게 했다. 누군가 재미있고 기발한 발상으로 기물을 만들면, 또 누군가는 A에 B를 더해 기막힌 뭔가를 만들어 냈다. 비록 초보들이라 금이가고 갈라지고 찌그러지고 울퉁불퉁한 작품들 천지였지만, 그걸 보면서도 서로 깔깔깔 웃으며 독특한 매력이 있지 않냐며 억지 칭찬을 해주면 그것이 왠지 모르게 응원이 되었다.
도자기를 만들면서 가장 설레는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유약작업 후 가마에서 나온 작품을 맞이하는 일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물레를 돌리고 꿉깍이를 하고, 한번 구워 왁싱작업 후 유약을 바르면 이제 남은 일은 가마를 믿고 빤짝빤짝한 도자기가 되어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다. 같은 유약을 쓰더라도 두께에 따라 색이 달라지고, 성분이 다른 두 가지 이상의 유약을 겹치거나 섞으면 또 다른 마법이 탄생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마의 뚜껑을 열면서 기다리던 도자기들을 하나씩 만날 때면 심장이 쫄깃쫄깃해진다. 때로는 생각대로 나온 결과에 만족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형편없이 실패한 모습에 속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보물의 탄생에 유레카를 외치기도 한다. 이렇게 완성된 도자기들과 만나면 그 모습이 하나하나 정말 아름답다. 흙덩이이던 녀석들을 내 손으로 하나씩 만지고 성형해서 세상에 나오게 했다는 생각에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 그릇에 무얼 담을까 미리 상상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설렘이다.
그때 내가 용기 내어 도자기 클래스를 신청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무엇으로부터 설렘을 느끼고 있을까? 변화는 늘 고민되어 선뜻 선택하기 힘들지만, 가끔 로또처럼 찾아오는 작은 변화를 통한 설렘이 막연히 기대되어 다음 도전을 할 용기가 생긴다.
<유일무이> 세라지니
설렌다는 생각 그리고 말만 들어도 내 눈빛이 달라지고 얼굴근육이 작게 미동한다. 특히 처음이라는 경험에서 오는 설렘은 좀 더 남다른 것이다. 유치원은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초등학교 입학 때, 어느 추운 교실에 앉아 이름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뭘 해야 하는지 몰라했던 게 기억난다. 6학년 졸업 때까지 설렘을 간직하지는 않았다. 촌지를 바라던 선생님들 사이에서 4학년부터 6학년 올라갈 때까지 전학시켜 달라고 울었던 기억뿐이다.
연말이 오면 설레기 시작한다. 새해의 계획들로 기대에 찬 설렘인 것이다. 그 설렘도 당연히 오래가지는 못했다. 작심삼일로 끝나는 금연과 1주일도 못 버티는 다이어트로 모든 설렘은 종지부를 찍는다.
가장 오래가는 설렘은 역시 사랑을 느낄 때인 거다. 하지만 이 것도 참 우스울 뿐이다. 짝사랑의 기억 때문에 설렘보다는 가슴 찢어지는 아픔이 더 기억에 남는다. 봄이 오는 것은 설렐까? 요즘은 봄이 있긴 한가 싶다. 추운 겨울이 너무 오래인 이 토론토는 봄을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오는 거다. 뭐가 설렘인지 당최 알 수가 없는 내게는 너무 당혹스러운 주제가 되어 버렸다.
설렘을 길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글을 쓰면서 문득 그 생각에 다다랐다.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지금 내 2023년의 설렘을 길게 가져갈 수 있을까? 설렘이란 단어는 분명 긍정적인 느낌의 따뜻함이다. 2022년부터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내 삶을 어떻게 바꾸어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설렘 가득한 2023년으로! 정리해 보려 한다
1월의 마지막날은 이사를 한다. 잠시 두어 달 머무는 곳이지만 새로운 마음 그 설렘으로 지내보자. “오늘 하루 아주 설레는 즐거운 날이 될 거야!” 2월의 첫째 날은 새로운 집에서 깨어난다. “오늘은 일이 너무 즐거울 것 같아. 그 일로 인해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위한 통장의 잔액들이 늘어나는걸?” 3월은 2월 한 달 동안의 새로운 업무로 적응기간을 끝내고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기는 거다. 나는 실행력이 아주 약한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달라질 거 같은 좋은 설렘을 안고 싶다. “오늘은 너무 좋은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어제와는 다른 결과물을 얻는 날이야!" 4월은 여전히 춥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의 토론토살이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그래도 이런 설렘을 외치고 싶다. “ 오늘은 조금 따뜻한 날이니 30분 일찍 걷기로 하루를 시작해 볼까?” 5월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력이다. “30분만 아침에 명상을 하며 하루의 설렘을 길게 가자!” 6월은 생일이 있는 달이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어버렸으니 이건 어떨까 싶다. “ 어제보다 피부에 더 생기가 생겼는걸? 웃으니 예쁘네~~.” 7월은 여름이다. 난 여름이 정말 좋다. 여름에 태어나서일까? 그냥 마냥 좋다. “오늘은 진짜 진짜 행복할 거 같은 즐거운 예감이 든다!” 8월은 태닝 하기 좋은 여름이다. 시커멓게 태우자. 물론 내 피부가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항상 태닝오일을 듬뿍 바르고 산책을 한다. 기분이 좋아진다.
나머지 9월부터는 적지 않는 것 이 더 설렘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매월 무언가 다른 설렘을 다짐을 할 것이다. 그래서 적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싶어 하는 그 설렘이 달라져도 괜찮다. “설렘“ 그 단어 하나로 행복해져 버리니까. 오래가지 않아도 괜찮다. 매일 설렘으로 아침을 맞이하면 그뿐이다.
<설렘> JAcKY
내 나이 환갑을 지나고도 두 번째 해를 맞았다. 60이 넘으면 몸의 변화를 확연히 느낀다는데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무릎이 새큰거리고 눈도 침침하며 아침마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은 아기 머리털처럼 가늘어만 간다. 몸의 변화를 보면서 마음도 따라서 가라앉을 때가 있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이 이따금 스멀스멀 가슴속을 파고들기도 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즐거워하고 감격하던 젊은 날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제는 어느 한 가지 새로울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었다. 남편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말아먹던 국수 한 그릇으로도 행복하던 그때의 나는 이제 내 안에서 떠나 버린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쉽게 행복해지던 그 단순했던 예전의 나를 되찾아 와야만 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해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남편이 데려가주지 않으니 떠나지 못한다는 구차한 소심이의 변명은 이젠 집어치울 때도 되었다. 60년간 수고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후쿠오카에 사는 사촌 동생에게 카톡을 보냈다. 며칠 가있어도 되느냐는 내 물음에 동생은 흔쾌히 대답했다. 마침 다음 주에 신랑이 출장을 가니 잘 되었다고. 즉시 비행기표를 끊고 '비지트재팬웹'에서 검역 신고를 하고 가방에 짐을 챙기면서 내 마음속에는 작은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읽을 책을 챙겼다. 창 밖의 사진을 찍으려고 좌석도 창가 쪽으로 잡았다. 오랜 세월 잊고 있던 설렘이 살며시 가슴속을 헤치며 봄바람처럼 찾아왔다.
몇 년 만에 만난 사촌 동생도 오랜만에 피붙이와 나누는 속얘기에 밤 깊어가는 줄 모르는 듯했다. 후쿠오카 시내를 종횡무진하면서 우리는 맛집을 찾아 회전초밥과 소면을 먹고 흑돼지고기로 만들었다는 돈가스를 먹었다. 중심가 쇼핑 거리에서 눈요기도 하고, 녹차 아이스크림과 팥이 든 모나카와 붕어빵을 사춘기 아이들처럼 히히거리며 사 먹기도 했다.
현지인과 함께 일본을 여행하는 것은 예전에 했던 패키지 단체 관광과는 확실히 다른 경험이었다.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예의 바르고 친절했다. 작은 일에도 목례를 하며 예의를 갖추었고 고맙다는 말과 미소가 몸에 밴 습관 같아 보였는데 어떤 사람이든 예외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어쩔 수 없이 일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많이 접했던 나에게는 충격에 가까운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근처 공원과 호숫가를 걸으며 서로 간에 몰랐던 비밀(?)도 털어놓았다. 누구에게도 나누지 못했던 아픔들을 서로 나누며 농도 짙은 치유의 시간도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그다지 자주 만났던 사촌간이 아니다. 이모의 딸이긴 하지만 워낙 나이 차이가 있기도 하고 이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사셨기 때문에 이따금 사촌 동생이 한국에 방문할 때를 제외하면 그다지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생과 지낸 그 닷새 동안 피가 섞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으로 진하게 느꼈다. 우리 속에 같은 피가 흐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속을 다 털어놓을 만큼 서로를 가깝게 느꼈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을 열고 소통한다는 것은 굳어졌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이다. 동생과 얘기하는 동안 전보다 새롭게 눈에 띄는 그녀의 아름다운 점을 말해줄 수 있었고 나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장점을 얻어듣게 되는 행복을 누렸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었다. 갇혀있던 세상의 문을 열어젖히고 설렘을 찾아 나선 이번 여행에서 나는 다시 새로움과 신비함을 경험했다. 작은 일에도 흥이 나고 행복하던 나는 어딜 가버렸던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 있는 구석진 어느 방 안에서 혼자 문을 닫아걸고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이제는 나를 가두어놓지 않으리라. 마음이 갑갑하고 가라앉아 기쁨이 없을 때 마음속 방문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설렘의 세상으로 걸어 나가리라.
<잃어버린 설렘을 찾아서> 빵 굽는 엄마
하얀 원피스 잠옷을 입은 나는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며 창밖을 내다본다. 앞집 할머니 정원에 크고 화려한 꽃들이 가득 피어있다. 특히 눈에 띄는 빨간색 목란 꽃은 가까이 가서 봐주지 않으면 실례가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보니 할머니댁에 방문해서 아이들과 함께 꽃구경 해본지도 오래 전인 것 같다.
“할머니댁 꽃 좀 봐! 너무 이쁘다. 뭐가 바쁘다고 꽃구경 한번 못 갔네, 오늘은 아이들 학교 끝나면 같이 앞집 할머니댁에 놀러 가야겠어.”
남편은 이런 나의 모습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살짝 웃어 보인다. 참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아침을 먹으며 출근준비를 하는 그 사람 옆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신다. 식탁 옆 통유리를 통해 보이는 우리 집 공터는 참 쓸모없이 넓기만 하다. 구릉처럼 지하까지 푹 꺼진 저 버려진 공터는 전체가 통유리로 지어진 우리 집을 프라이빗 하게 만들어주는 역할만을 충실히 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이곳을 다른 집과 분리시키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공터 같은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늘 아침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지만 오늘은 왠지 한층 더 들떠서 신랑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저 공터를 공원으로 만드는 거 어때? 어차피 버려진 땅인데 피크닉 테이블도 쫌 만들어 놓고, 여기저기 놀이공간도 설치해 놓고…. 또 여기가 동굴처럼 약간 지하로 가라앉아 어두운 느낌이니까 차라리 콘서트 홀처럼 만들어 놓으면 참 좋겠다. 나도 아이들도 여기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고, 동네 사람들도 이용하고, 멋진 아이디 어지?”
승승장구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신랑에게 이런 부탁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아 신나게 생각나는 대로 수다를 떨어본다.
“좋은 생각인데? 계속 아이디어를 생각해 봐. 다녀와서 들어볼게. 나 간다.”
뭔가 계획할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들뜬 아침이다.
콘서트 홀을 계획하다 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학시절 교회 친구들과 LOG라는 찬양 선교단에서 거의 4년을 살다시피 했더랬다. 음악 전공자 한 명 없는 그저 찬양이 좋아 모인 이 선교단은 매주 3번 모여 3시간씩 연습을 했고 나름 음반제작도 했으며, 일 년에 한 번씩은 나라를 지키는 국군장병들을 위해 부대로 위문공연도 다녔던 제법 규모가 큰 찬양단이었다. 매일 저녁마다 모여 찬양을 듣고 각자 자기 파트를 연습했다. 싱어들은 발성연습에 집중하고 선배들은 자기가 아는 것을 하나라도 더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마치 어미새가 아기새를 품듯 옆에 꼭 끼고 앉아 하나하나 전달해 주려 애를 썼다. 저녁 식사시간은 우리들이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다. 단골 식당에서 짜장면, 짬뽕, 그리고 마무리 서비스로 만두까지 배달되는 날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웃고, 장난치고, 까불며,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즐거웠다.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모여 가족들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귀여운 커플들이 나오기도 했다. 알콩달콩 달달한 커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우리가 모이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선후배들이 함께 모여 음악 연습을 하고, 기도를 하고 , 삶을 나누는 그 시간은 밖에 나가 미팅을 하고 술자리를 가지는 것 보다 더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의 기억 속 그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20대 그때 그 모습 그대로다. 가끔, 아주 가끔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잘 살고 있겠지? 그때 그 시절만 추억하면 다시 내 심장은 그 시간으로 돌아가 콩닥거리며 설레기 시작한다. 결혼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온 이후 난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다. 이민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고, 영주권을 받기까지 무너질 대로 무너진 나와 신랑의 자존감은 자연스럽게 한국과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초라한 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SNS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페이스북도 만들지 않았고, 카카오 스토리로 나의 비참한 이민생활을 공유하지도 않았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천국에 살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내 이야기만 듣고 신기하리만큼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잡지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주 멋진 놀이공간과 콘서트장이 완성되었다. 오프닝을 앞두고 가족과 지인들이 초대되었으며 여기저기 이벤트를 준비하는 직원들의 손길도 무척이나 바빠 보인다. 첫 공연은 감사예배 겸 찬양팀을 섭외했다고 한다. 조명들이 세팅되고 악기들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아마도 반주자 한 명이 참석을 못한 것 같다. 남편과 진행자와의 대화 속에서 약간 언성이 높아지고, 남편답지 않게 초초해하며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여 걱정이 되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진행자는 남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나에게 세컨드키보드 담당자가 불참했는데 혹시 내가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 ‘뭐야 이 사람…. 날 언제 봤다고 건반을 치래?’ 곡 리스트를 보니 어려울 것 같지 않아서 내키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오프닝 행사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런데......
‘어머! 나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몇십 년 만의 합주임에도 불구하고 큰 실수 없이 콘서트를 마친 나 자신이 너무 기특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메인키보드 반주자가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이손…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손. 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선배언니의 손이다. 나에게 하나하나 키보드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던 언니의 손이다. 이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내 기억 속 영원히 20대인 나의 선배들 후배들이 눈앞에 있다.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다들 나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다. 이들의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이제 다 기억이 났다.
난 치매환자이다.
내 기억 속에는 힘들었던 시간, 마음 아팠던 시간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매일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눈을 뜨고, 신랑을 위해 간단한 커피와 다과를 만든다. 매일 정성껏 옷걸이에 정리해 놓는 아이들의 옷에는 한 번도 입어본 흔적도 없이 상표가 그대로 달려있지만 난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이 옷을 입고 예쁘게 웃을 아이들만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 옷을 정리하고 집안일을 한다. 너무나도 꿈같이 반복되는 행복한 나의 하루하루다. 난 치매환자이다. 나만 행복한 것 같아 너무 미안하지만, 내일이면 하나도 기억 못 할 미안함 이기에 그냥 맘속에 넣어둔다. 그리고 내일이면 난 또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내 세상 속의 하루를 시작하겠지. 모두가 흩어지고 사라진 많은 감정중에 설렘 만은 내 안에 남아있어 감사하다.
<꿈> 패미로얄
18년 2월, 나는 우리 남편을 처음 만났던 날의 추억을 지금도 기억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미팅 장소로 나가서 남편을 보는 순간, '이 사람 괜찮네.'라는 생각이 들었고 만나는 동안에도 매너 있고 유쾌한 모습에 즐거웠다. 얼마 되지 않아 아기가 생겼고,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식까지 올렸다. 그때 당시에 나는 유학생이었는데 정말 숟가락, 젓가락만 가지고 남편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면서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벌써 4년 전 일이고 우리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첫째 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설렘보다 걱정이 앞선 반면 남편은 육아용품을 직접 준비하며 더 설레했다. 10개월 동안의 임신 기간, 남편의 극성(?) 맞은 태교로 아기를 위해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들을 멀리하며 연예인 샘 해밍턴 아들 사진들을 보며 태교 했다. 첫 아이를 만나는 날이 다가오면서 점점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영주권이 없었던 당시 캐나다에서 미드와이프를 연결해서 임신 기간 무료로 검사도 받고 출산을 준비했다. 2박 3일 동안 진통을 겪고 아이를 만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벌쓰센터에 도착해서 기대했던 수중분만으로 출산을 시도했지만 아기가 빠르게 나오지 않아 나의 몸은 점점 퉁퉁 뿔고 화장실 가려고 물 밖으로 나왔다가 오들오들 떨며 오한을 경험했다. 아기는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안 하는데 갑자기 벌쓰센터 건물의 전기가 나가버리는 통에 막바지 진통이 오는 상황에서 병원과 집 중에 선택해서 출산을 진행해야 했다. 우리는 집으로 선택하고 미드와이프와 함께 집으로 무사히 이동해서 수중 중만이 아닌 침대에서 아이를 만났다. 차 안에서 아기가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기나긴 진통으로 지친 나는 아기를 만나는 순간 눈물보다 웃음으로 맞이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생과 아픔이 무색하게, 나는 3년 만에 둘째를 임신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태몽을 꿔준 사람이 3명이었다. 친구가 꿔준 태몽은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고, 지인은 넓은 빨간 고추밭에 나를 데려갔다고 하고, 마지막으로 시아버지는 작고 예쁜 새가 집 안으로 날아들어왔다고 한다.
첫째가 아들이라서 둘째는 딸이길 바랐던 나는 노산이라 유전자검사 관련 피검사로 성별까지 빠르게 알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남편과 함께 들었는데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첫째 아이를 2박 3일 진통하며 미드와이프와 자연분만한 경험이 있기에 둘째는 산부인과 의사와 병원에서 낳기로 했다. 노산이라서 출산예정일보다 일주일 빨리 유도분만으로 아기를 낳을 것을 의사에게 권유받고 마지막 달에 출산 날짜를 정했다. 마지막 의사를 만난 날에 자궁이 2~3cm 열렸다고 했고 이슬도 비쳤는데 일주일 넘게 소식이 없어서 응급실까지 다녀왔는데 결국 유도분만 날에 둘째를 만났다. 1인실 입원실 같은 분만실에서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유도 분만을 준비하는데 4~5cm 열릴 때까지는 진통이 참을만했다. 천국의 맛(?)이라는 무통출산을 기대하며 싶어 5~6cm 열렸을 때 주사를 맞았는데 약이 듣지 않았던지 진통을 고스란히 느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생각보다 쉽게 아기를 낳았다. 무식하게 힘만 주면 낳을 줄 알았던 첫째 때 너무 고생해서 이슬 비치고 일주일을 기다리는 동안 힘주는 법을 유튜브를 보면서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둘째는 쉽게 출산한다며 경험한 엄마들의 말처럼 나도 유도분만 시작하고 6시간 만에 2~3번 힘주고 둘째를 만날 수 있었다.
간호사가 아기를 내 가슴에 안겨주었을 때의 첫 만남의 설렘이 잊히지 않는다. 자그마한 아기를 배 속에서 10개월 동안 품고 있다가 실제로 직접 만난 날, 아기가 태어나면 사라지는 길고 길었던 진통, 아기에게 처음으로 젖을 물렸을 때의 감동의 울림이 아직도 온몸으로 느껴진다. 고통스러운 진통에서 벗어나 예쁜 딸을 만난 기쁨도 잠시, 2배의 육아 전쟁(?)이 시작됐지만 아이를 만나는 날, 긴장 속에서 피어났던 그 설렘은 내 기억 속에 평생 살아 있을 것이다.
<아기를 만나는 날의 설렘> 캐나다아하
옛날에 즐겨 먹던 ‘설렘'이라는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네모나고 얇은 플라스틱 포장지 안에 약간 녹은 듯 슬러시 형태의 아이스크림이었다. 아랫부분을 짜듯이 누르면 짧고 굵은 빨대 위로 아이스크림이 밀려 나왔다. 바닐라 향의 달콤한 맛도 좋았고, 어떻게 아이스크림 이름이 ‘설렘' 일 수 있냐며 맛보다는 솔직히 이름에 반했다.
어느 날, 그 아이스크림 같이 달콤하고 향기로운 설렘이 찾아왔다.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린다'는 그 느낌. 사춘기 여고생은 '그 남자의 향기'로 진짜 설렘을 경험했다. 때는 고등학교 2학년, 잠깐 이모 친구의 아들에게서 수학 과외를 받았었다. 여중, 여고를 다녔기에 그 당시 내가 아는 남자는 친오빠와 남동생이 전부였다. 그런 내게 '낯선 남자와의 과외'는 충분히 가슴 떨리는 사건이었다.
그 대학생 오빠는 잘 생긴 건 아니었는데,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항상 톡 쏘는 듯한 향수 냄새를 폴폴 풍겼다. 우리 아빠는 향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사람에게서 나는 화학적인 향은 모두 향수라고 생각했다. 그 과외 오빠의 향도 아마 이름 모를 남자 향수 일 거라고 짐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어쩌면 애프터 세이브 스킨 또는 로션 냄새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대학생 과외 오빠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다녔다는 것 외에는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새삼스레 설렘이라는 단어와 함께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신기하게도 그 과외 오빠가 다녀가면, 수업 중 만졌던 학용품에서는 여지없이 그 오빠의 향수 냄새가 났다. 과외가 끝나고 나면, 나는 그가 만졌던 물건들을 코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며 그 오빠가 남기고 간 향기를 찾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나도 대학생이 되었고, 어느 날 거리를 걸어가다가 과외 오빠에게서 나던 그 향이 바람과 함께 쓱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 향의 근원지를 찾았다. 참 신기했다. 얼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내 코는 그 오빠의 향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오빠는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그림을 잘 그렸고, 글씨도 참 예쁘게 썼다. 가끔 수학 공부가 너무 하기 싫으면 만화를 그려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하루는 그가 약속한 과외 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다. 미팅(단체 소개팅) 중간에 빨리 나오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 늦었다며 사과를 했다. 미팅을 나갔다는 이야기에 이유 없이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나도 대학에 들어가면 미팅도 하고 남자 친구도 사귀어 보리라, 그렇게 그 오빠를 통해서 대학생활의 낭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수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몇 달 만에 수학 과외를 그만두었고, 좋은 향수 냄새를 풍기던 그 과외 오빠와의 설레는 짝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마치 인생의 최대 목표가 대학 입학인 듯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무조건 하라니까 하는 공부는 지루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게 과외 오빠는 미지의 대학생활에 대해 동경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그 오빠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나는 벌써 대학생이 된 듯한 황홀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을 무렵, 강남역 근처 카페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다. 그곳 카페 구석에 한 쌍의 연인이 앉아 있었는데, 알듯 말 듯 낯익은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부리부리한 눈매를 보면 분명 내가 아는 그 과외 오빠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그 사람이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었다니. '내가 잘 못 알아봤을 거야' 읊조리며 돌아섰다.
<그 남자의 향기> 소냐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