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진주 찾기

감정 글쓰기 5주 차

by 황서영

'감정 글쓰기' 코칭 수업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글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강의/코칭/편집

황서영 no.more.thinking.and@gmail.com


이번주가 시작되기도 전에 동료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오늘 내릴 눈의 양과 기온을 놓고 걱정 섞인 대화들이 오고 갔다. 직장 근처에 사는 영민은 사실 얼마만큼의 눈이 내릴 것이고, 얼마나 추워질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녀는 달력 위의 오늘 날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과연 한국 시간으로 새벽 5시 30분에 시작하는 북클럽에 참가할 수 있을지만이 주된 관심사였다. 달력에 크게 동그라미를 쳐놓고 시작 시간을 적어 놓았다. 무료 3회 참석권을 받았기에 어떻게든 참가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한국의 새벽 5시 30분은 영민의 근무 시간인 오후 3시 30분이다. “젠장, 어디 숨어서 줌미팅을 참여해야 하나? 집에 간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인데 어쩌나" 반쯤은 포기하고 있을 때, 옆자리 동료가 영민의 귀가 쫑긋 해지는 반가운 소리를 한다. “오후 3시에 병원 예약이 있는데, 눈 좀 치우고 차 좀 데우고 출발하려면 일찍 나서야겠어.” 2시 30분에 자리를 비워준 동료 덕분에 영민은 뛸 듯이 기쁘고 기쁘다. 갑자기 앞이 안 보일 만큼 눈발 날리는 날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사무실 방문에 ‘줌미팅 3:30-4:30’이라는 사인을 붙이고 마음 편히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대화가 오가는 북클럽인지 사전 지식이 전혀 없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줌미팅 화면의 작은 네모 상자 속 부스스 졸린 눈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영민은 새벽기상 이상의 쾌거를 이룬 본인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때였다. 시작한 지 불과 15분도 채 지나기 전에 사무실 방문 앞에 나타난 영민의 보스가 사무실 안을 기웃거린다. 들어올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다. 영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이어폰을 끼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보스는 조용히 들어와 영민의 자리 뒤에 있는 캐비닛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는 듯하다.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랩탑과 그에 맞는 코드를 찾는 중인지 철제 캐비닛에 뭔가가 닿을 때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영민을 불안에 떨게 한다. 영민은 뒤를 돌아보기도 민망하다. ‘ 지금 이 상황에서 줌미팅 화면을 닫고, 내가 도와줄 게 있냐고 말을 걸면 이상하게 보이겠지? 애라 모르겠다. 그냥 줌미팅이나 계속하자.’ 보스는 몇 분 간 혼자서 뭔가를 열심히 찾더니 빈손으로 나간다. 실제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영민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말로 떠드는걸 보스가 문밖에서 들었을까? 혹시 줌화면에 검정머리 동양인만 가득한 걸 보스가 눈치챘을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럼에도 오늘 미팅에 참석하길 잘했다는 결론에 이르자 쓸데없는 걱정, 염려는 집어치우기로 하고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선다.


주차장에는 하루종일 내린 눈으로 누구 차인지 구분하기도 힘든 똑같이 생긴 차들로 가득하다. 하얗고 두툼한 아이싱으로 덮인 생크림 케이크 같이 생긴 많은 차들 가운데, 멀리서도 차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차를 향해 걸어가는 영민의 머릿속으로 여러 명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누가 이런 착한 일을 한 걸까?’ 족히 10분 이상은 앞, 뒤로 덮인 눈을 치우고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 놓아야 출발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영민은 이런 행운이 믿기지가 않을 따름이다. ‘누구지? 누가 이렇게 나 대신 치웠지?’ 한 발짝씩 움직일 때마다 눈 속에 깊이 박히는 부츠 때문에 빨리 걸을 수는 없지만, 영민의 차 바로 뒤에서 시동을 걸고 떠날 준비를 하는 보스에게 고맙다는 말은 꼭 전하고 싶었다. 손을 흔들어 보이자 뭔가 할 말이 있음을 알아채고, 보스가 차문을 열고 나온다. “네가 내 차에 쌓인 눈을 치운 거야? 진짜 고마워!” 보스는 빙그레 웃으며 멋쩍어한다. 본인이 한 게 아니라며, 영민 더러 기분이 좋겠다며 치켜세운다.


영민이 전지전능해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비디오를 그 자리에서 멈추고 그 뒷부분은 지우고만 싶다.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서둘러 차에 올라탔었어야만 했다. 아니 대신 눈 치워준 거 맞는지 묻지도 말고 모른 척 시동 걸고 잽싸게 퇴근했었어야만 했다. 아니, 누가 눈을 치워줬건 간에 모르는 척 얼른 차에 올라타 그 자리를 떴어야 했다. 보스는 대뜸 줌미팅인 줄 모르고 사무실에 들어가서 미안하다며 정중하게 사과를 한다. 아까 그게 무슨 줌미팅이었냐고 묻는 질문에 영민은 그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10초가 지나도 머릿속이 하얀 게 뭐라 둘러 대야 할지 아무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 저기 그게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미팅이었어.” 본인이 뱉어 놓고도 참 어이가 없다. ‘뭐라는 거니?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그게 지금 네가 하는 일하고 무슨 상관인데?’라는 이런 후속 질문들을 보스가 하지 않은 게 영민은 그저 고맙기만 하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차로 돌아갔다.


영민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선도 보이지 않는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본인의 어이없는 대답에 대한 자아비판을 하다가. ‘다음번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인터내셔널 학생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중이었다고 둘러대야 하나' 벌써부터 다음 주에 있을 두 번째 미팅 참석을 위한 완전 범죄를 계획하는 본인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근무시간에 개인 미팅을 하고 있는 본인의 도덕적 양심에 찔림이 있는 건지 아니면 영어로 하는 줌미팅이었더라면 완벽한 범죄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인 건지 본인의 속마음이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직장생활 속 개인시간> <양심에 찔리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소냐민정



2022년 1월 1일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 514 챌린지를 하게 되었다. 이 커뮤니티에 함께하는 분들을 '짹짹이'라는 호칭이 만들어졌고 굿짹월드, 땡큐굿짹등 신조어가 생겨났다. 시즌1이 끝나고 시즌2에서는 사는 지역별로 나눠져 의왕짹짹이 카톡방도 만들어졌다. 작년 5월에 첫 오프모임을 가졌고 모두 밝은 에너지와 마음도 따뜻하고 각자 다른 달란트를 가지고 자신의 성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이었다. 작년 5월 첫 오프모임을 가졌다. 사람들 모두 밝은 에너지와 따뜻한 마음으로 자신의 성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분들이었다. 그중 노라 님은 운동하는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달리기를 매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는 분이셨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백운호수에서도 가끔 달리기를 한다고 하셨다. 계속 살이 쪄서 이대론 안될 거 같아 언제 백운호수로 달리기 하러 가시는지, 혼자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좀 외져서 혼자 가기가 무서워 같이 가면 좋을 거 같아 연락을 드렸다. 계속 살이 쪄서 나도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라 님께 밴운호수로 함께 달리기를 하러 가자는 연락을 드렸다. 처음 만나서 3km 되는 백운호수를 두 바퀴나 같이 돌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요일 아침 6시 30분 백운호수 걷달모임이 만들어져 결성되어 매주 의왕짹짹이분들을 분들과 일요일마다 만나 걷고, 달리고 이제 릴스춤까지 추고 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추석을 며칠 앞두고 마리'S피톤치드님이 처음으로 오프모임 백운호수 걷달모임에 오셨다. 의왕짹짹이분들과 함께 백운호수를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마리's피톤치드 님은 '숲해설사'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차를 가지고 오셔서 가는 길에 나를 집 앞에 내려주셨는데 어제 친구에게 받은 거라며 운동을 마치고 차를 가져오신 그분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차에서 내리 직전, 어제 친구에게 받은 거라며 식용유선물세트를 주셨다. 첫 만남이었고 특별히 선물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추석이 얼마 남지 않아서 주시는 건가 했다.


그 후 몇 개월 지나 2023년 1월에 첫 의왕짹짹이 오프모임을 틔우리 님 카페에서 가지게 되었다. 방장인 '책의 요정님'은 선생님답게 작년 2022년 한 해 동안 의왕짹짹이 분들의 각자 이룬 성과를 알려주셨고 언급해 주셨다. 함께 축하의 시간을 가지고 올해 각자의 목표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셨다. 나는 올해 목표는 책 쓰기, 국제재무설계사자격증 따기, 영어공부 세 가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왕짹짹이분들 중 '재옥 님'이 지금 감정글쓰기 멤버인 '세라지니 님의 영어필사' 수업을 듣고 인스타에 인증을 열심히 올리셔서 나에게도 자극이 되어 영어공부를 다시 할까 생각하다(사실 키다리아저씨 영어원서 수강도 다 안 한 상태였다) 세라지니 님 인스타에 들어갔다가 연결되어 있는 황쌤의 '감정글쓰기' 알게 되었고 열정이 느껴져 글쓰기모임을 바로 신청하게 되었고 사실 국제재무설계사보다 먼저 글쓰기수업을 신청을 하게 되어 놀랐다. 내 차례가 되어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의 2023년 목표는 책 쓰기, 국제재무설계사 자격증 따기, 영어공부 세 가지였다. 그러다 의왕짹짹이 멤버 중 한 분인 '재옥 님'이 인스타에서 세라지니 님의 영어필사 수업 인증을 열심히 올리는 것을 보게 되었고 목표였던 영어공부를 나도 시작해 볼까 하여 관심이 갔다. 인스타그램을 이것저것 눌러보다 세라지니 님의 인스타를 통해 황쌤의 감정글쓰기 수업을 알게 되었다. 황쌤의 열정이 진심으로 느껴졌는지 어느새 홀린 듯 글쓰기 수업을 신청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랐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어 국제재무설계사 수강 신청 후 수업을 훑어보니 너무 양도 많고 내용이 어렵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져서 내가 감정글쓰기 신청을 한 것이 맞나 고민을 했고 여러 상황상 영어는 바로 내려놓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암튼 재옥 님 덕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캐나다에 계시는 분들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렸다.


다른 분들의 올해 계획이나 목표 이야기를 들었고 그날은 두 분 건너에 앉아 계셨던 마리'S 피톤치드님 두 번째 뵙는 시간이었다. 마리 님은 작년한해 정말 많은 MKYU의 수강을 (대학교) 한 학기등록금만큼 수강을 신청했었는데 지만 자신의 중심이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고 올해는 흔들리지 않는 '오뚝이'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시면서 오뚝이를 사야겠다고 하셨다. 그때 내 머리가 이상해졌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올라 두서없이 말이 나왔다.

"오뚝이요? 저 사주 봐주시는 분이 저보고 오뚝이라 하셔서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고 넘어졌다 또다시 일어나고 나중엔 화가 났었다고 나중에 보니 진짜 계속 넘어졌다 일어섰다, 넘어졌다 일어섰다 그러고 있더라고요. 화가 났어요. 그냥 넘어지면 편하게 누워있는 오뚝이고 싶다고 그냥 흔들리지 않는 오뚝이고 싶었다고 말을 하고 보니 싶었어요."

단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많은 분들이 계셨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왜 그 말을 했을까? 했을까 싶었다. 너무 당황스러우셨을 거 같다는 나 때문에 당황스러우셨겠다 싶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내가 싫어하는 마라를 내가 말하고 있다니)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내가 하고 있었다니......



다음날 전화를 드려 말씀을 드렸더니 오히려 관심을 가져주셔서 본인은 좋으셨다고 좋았다고 말씀해 주셨다. 마리'S 피톤치드님이 오뚝이 인형을 사야겠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나 오뚝이 인형을 검색 보았다. 러시아인형처럼 생긴 오뚝이 인형, 도 예쁘고 나무로 만든 오뚝이 인형, 종류도 다양하게 많이 있었다. 다양했다.

작은 오뚝이 세 개가 한 세트로 되어 들어있는 있는 동물 오뚝이 세트를 사서 제일 먼저 마리 님께 고르시라고 우선권을 드렸다.

"셋 다 예뻐요 어디서 이런 걸 찾아내셨을까요?"

여우를 선택하셨고 다음은 고나 언니에게 선택권을 드렸다. 매번 신춘문예에 시, 소설에 응모하셨다고 이번 1월 모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 응원차 1월 모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고나 언니는 매번 신춘문예에 시나 소설을 응모하신다고 하셨다.

"오뚝이 고르세요"

했더니 언니는 부엉이가 너무 마음에 드신다고 부엉이를 데려가셨다. 내게는 귀여운 너구리가 왔다. 내 책상 곁에서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움직이며 반응을 해 주었다. 너구리 오뚝이는 책상 위에서 내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흔들며 내 곁을 지켜준다.

"마리 님, 아마 마리 님 하고 더 친해지라고 지려고 그랬나 봐요"

처음으로 동갑인걸 이번 기회로 통화하면서 알게 되었다. 의왕짹짹이방에 모임에 동갑친구가 있으니 왠지 좋다. 친숙한 느낌이 들어 더 정이 간다.



얼마 전 스치듯 보았던 문구가 떠올랐다.

"다시 되살릴 수 없는 네 가지는, 이미 뱉어버린 말, 쏘아버린 화살, 지나가 버린 시간 그리고 잃어버린 기회."

이미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쏘아버린 화살은 지나간 시간처럼 되돌릴 수 없다. 라는 문구를 다시 마음에 새기며 좀 더 말을 할 때 신중하게 다른 사람 입장에서도 생각할 수 있는 지혜를 또 구하게 되었다.

그 글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좀 더 신중하게 말하는 지혜에 대해 생각했다.


2023년 나의 너구리 오뚝이랑 함께 중심을 잡으면서 유연한 오뚝이로

까딱까딱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책상 위의 오뚝이를 바라보며 유연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2023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뚝이> GM김수정




매달 만나는 대학 동창 모임이 있다. 내가 그들 모임에 합류하게 된 것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가 모임에 나가기 시작할 무렵에 그들은 이미 13년이란 세월을 함께 여행도 하고 전시회 구경도 다니던 터였다. 사람을 처음 사귈 때 별로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 그룹의 분위기나 그들 개개인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익숙해 지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대학 시절에는 그들 모두를 알고 지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1월쯤에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내키지가 않았다. 1, 2월의 치앙마이는 공기 오염이 심하다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천식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이번 여행은 가지 않겠 노라고.


그러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까? 치앙마이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 알았던 그들이 일본 홋가이도행 단체 여행을 신청했다고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 며칠 뒤에 떠난다는 것이었다. 가끔 단톡방을 확인해 왔지만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따로 단톡방을 만들었구나 싶었고 여행을 갈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일본 여행에 관해 한 번 물어봐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슬며시 올라왔다.

'아니지. 내가 이번 여행은 안 간다고 했으니 나는 아예 안 가는 걸로 생각한 게지.'

나는 얼른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3박 4일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며칠 전의 일이다. 이번 달 모임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의 전시를 구경하기로 했고 예매를 이미 끝냈다는 얘기가 단톡에 올라왔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알았다고 답을 쓴 직후 내 마음속에는 불현듯, 그들이 틀림없이 따로 단톡방을 만들어 자기들끼리만 주고받는 내용들이 있구나 하는 의구심이 올라왔다. 불쾌감이 스며들면서 나도 모르게 단톡에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버렸다. “너희 혹시 따로 단톡방이 있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 마음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내가 한 질문이라는 게 뭔가? 너무 사회적 기술이 부족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일본 여행 건과 연결되어 내 마음속은 영 편치가 않았다.


어색하고 떨떠름한 침묵이 흐른 지 수 분 후에 예매를 담당했던 친구가 모임에 대한 공지 비슷한 것을 올렸다. 그것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는 것인지 걸까?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친구의 톡이 올라왔다. 이런 세상에…. 내가 속한 바로 그 단톡방에서 전시회 관람에 관한 얘기가 오갔던 기록이었다. 그것을 캡처해서 올린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을 하고 나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그때 이런 얘기들이 오갔었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내게 벌어졌던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도록 노력하면서 이유를 찾아보려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답의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았다. 내가 거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내 부모와의 관계는 ‘안정적인 애착 관계’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내 부모가 나를 흠뻑 사랑한다고 느껴본 기억이 없다. 수용되지 않고 밀쳐내지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나는 늘 마음이 서늘하고 외로웠다. 부모로부터 거부되었던 경험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친구들의 미세한 반응에도 예민하게 신경을 쓰곤 했다. 이번 경우도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 속에서 작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나이에도 말이다.


뭔 지 모르게 속을 답답하게 했던 일의 실마리가 풀리니 다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며칠 뒤에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들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를 대했다.


속 얘기를 다 털어놓을 만큼 깊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그냥 부담 없이 웃고 웃으며 수다 떨고 필요한 정보나 교환하는 식의 홀가분한 관계의 친구도 있는 법이다. 모든 친구 관계가 다 깊고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나 자신을 토닥여준다.


<내가 모르는 그들 만의 리그> 빵굽는엄마


초등학교 4학년 토마스는 몇 달 전 새로 등록한 신입생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의 손에는 역시나 피아노 교재가 들려있지 않았다. 벌써 2주 연속, 아니 그전에도 종종 아이는 교재 없이 수업에 들어왔다. 오늘은 참다못해 다소 엄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토마스! 너 교재 왜 안 가지고 왔니?"

"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찾아도 없던데요?"

"그럼, 일주일 동안 책이 없어서 연습도 하나도 못했겠네?"

"네!"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들어올 때부터 기침하는 모습이 신경이 쓰였는데, 피아노 앞에 앉아 연신 재채기와 기침을 번갈아 하며, 콧물까지 훌쩍거리는 것이었다. 아이 셋 엄마의 레이다망에 잡힌 이 기침소리는 영락없는 감기였다. 난 마스크를 꺼내 보이며 토마스에게 이야기했다.

"다음 학생이 5살 동생인데, 너의 감기바이러스를 동생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쓰는 게 좋겠지?"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재미있게 30분 레슨을 마치고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엄마에게 아이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토마스 엄마로 부터 뜻밖의 긴 메시지를 한통 받았다.

'토마스에게 방금 들었는데 네가 우리 아이에게 마스크를 강제로 착용하게 했다며? 나의 허락도 없이 그것도 강압적으로 아이에게 마스크 착용을 요구하다니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아이가 기침하는 게 불편했다면 나에게 전화를 해서 데려가라고 이야기했어야지. 만약 토마스가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했다면 레슨을 보내지도 않았을 거야. 단지 건조해서 기침한 것 가지고 마스크 착용까지 강요하다니 너무 불쾌하네. 앞으로는 조심해 주길 바라.'

메시지를 보자마자 아차 싶었다. 맞다! 잊고 있었다. 내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노인들과 환자들이 바이러스 때문에 줄줄이 죽어나갔던 그 코로나 전쟁통에서도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앞에서는 자신들의 인권이 엄청나게 침해를 당한 듯 큰소리치더니 뒤에서는 어찌나 화장실 휴지를 사재기하던지, 한동안 친구들에게 휴지를 빌리러 다녀야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침에 마신 커피 카페인이 이제야 슬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심장박동수가 빨라지고, 손가락이 바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그 떨리는 손으로 바쁘게 답장을 써내려 갔다.

'난 마스크 착용을 강요한 적도 없고, 강요할 생각도 없어. 토마스가 마스크가 싫다고 이야기했다면 당연히 씌우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레슨 내내 토마스는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어.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학생들도 배려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모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잖아?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 3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모두 같은 악기를 가지고 레슨을 받는데 토마스가 감기든 아니든 상관없이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줬으면 좋겠어. 기존의 학부모들은 아이가 기침을 하면 마스크를 씌워서 보내. 그러면서도 혹시나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나의 의견을 제차 확인하고는 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야기할게. 다음 주에는 피아노책 꼭 챙겨서 보내주길 바라. 난 30분 동안 토마스를 봐주는 베이비 시터가 아니거든......'

순간 내가 뭘 하고 있나 싶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화를 내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인걸 겪어놓고 말이다. 메시지를 싸악 지우고 다시 써내려 갔다.

'토마스에게 마스크를 강요할 생각도 없고, 강요하지도 않았어. 너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미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긴 말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두루두루 소문내라! 진은 기침하면 마스크 씌우더라!'라고.


지난 3년간 코로나가 앗아간 건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이 아니었다. 소중한 것은 사람들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신념이라는 거창한 이름아래 깨어진 서로 간의 신뢰였다. 10년 넘게 자가면역 억제제를 맞고 있는 나였기에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공포였다. 아이들은 엄마를 위해 당연하게 백신을 맞았고, 나 또한 위험군에 포함되어 제일 먼저 백신을 맞았다. 한인이 거의 없는 마을에서 10년 동안 살아오면서 우리 가족은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교회에서, 커뮤니티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우리는 가족처럼 서로를 돌보고 배려하고 사랑했다. 그런데 백신을 맞고 그런데 코로나가 마을을 덮치자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 백신을 맞고 맞고 마스크를 착용한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난 실망과 노여움, 슬픔 그 어디쯤인가 자리한 감정에 마음이 무너졌다. 존경했던 어르신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겨야지 정부를 섬겨서 되겠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날 뻔도 했다. 이렇게 난 가족 같은 사람들을 잃었다.


지금생각해 보면 감사한 일이다. 코로나 덕분에 아무도 모른다던 한길 사람 속을 알았으니 말이다. 떨리는 마음과 손을 진정시키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여 보았다.

"아만다(토마스엄마) 넌 내 인생 리스트에서 아웃이야!"


<아웃> <아웃당한 이웃들> - 패미로얄 -



어슴푸레 달빛이 창문을 비추는 통에 커피를 마시다가 머그잔을 손에 쥔 채 그대로 베란다로 나간다. 달무리다. 달 주위로 주위의 연한 보라색 아니 청회색에 가까운 아름다운 색깔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오래전 외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 오른다.

“ 야야 비가 올라 카나 보다. 어서 빨래 다 걷어 뿌라. 달무리 지면 비가 온다 아이가.”

이제 할머니는 가시고 없는데 말들은 여전히 살아 빙빙 가슴을 타고 흐른다. 프리즘 같은 빛을 뚫어져라 보며 생각놀이를 하느라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는다. 그러다 한때 내 인생의 그늘이었던 시간이 생각나 또르륵 눈물 한 방울이 커피잔 속에 떨어진다.


벌써 35년 전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짜증과 신경질로 범벅이 된 일상. 매일 활활 이글거리는 화산처럼 열꽃이 온몸을 타고 흐르던 그때를. 평소 같으면 아무 일 아닌 것이 왜 그리 감정을 찌르며 갉아 대는지. 아침엔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가 오후가 되면 기운이 떨어지면서 불쾌감과 우울의 늪 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날도 남편에게 전화가 와 “잊어버린 물건을 좀 가져달라” 했는데 이유 없이 짜증이 덮쳐 “왜 맨날 물건을 잊어버리고 다니냐?” 고 쏘아 부치고 전화를 끊었다. 투덜거리면서 그가 부탁한 물건을 챙기며 기분 나쁘게 전화를 끊은 자신이 미워 털썩 주저앉아 울어 버렸다. 그 당시 나는 가족에게 늘 아픈 사람이고 짜증 내는 엄마였다. 도대체 왜? 향수병이 걸렸나? 아님 뭐지? 왜 이리 감정 변화가 많은 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혹시…?? 수술로 인해 달라진 몸 상태가 감정변화의 이유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아이 임신 중에 난소에서 혹이 발견되어 난소 제거 수술을 했고, 서른이란 젊은 나이에 자궁을 들어내고 호르몬 요법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맘 놓고 하소연할 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된 친구가 곁에 있는 것도 아닌 황량한 이민 사회 속에서 비틀 거리며 내 마음은 날마다 무너져 내렸다. 마음 놓고 하소연할 친정도 마음 나눌 친구도 없는 황량한 이민 사회 속에서, 내 몸은 기댈 곳 하나 없이 비틀거렸고 내 마음은 날마다 무너져 내렸다.



신경을 다른데 쏟으면 나아질까 하여 집 근처 몰로 종종 아이쇼핑을 나가 보았다. 하지만 몸은 피곤하고 오히려 시간만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어서 그 짓도 그만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캐나디안 친구인 Karen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박사 논문을 쓰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곳 런던 빅토리아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중인 Karen은 < 아시아 여성들의 갱년기 중상에 대한 연구>를 한다면서 한인 커뮤니티 사람을 모아 달라는 거였다. 런던 왕 발로 통하던 나는 즉시 여기저기 전화를 해, 하루 만에 Karen이 말한 대로 열(10) 사람을 모았다. 그리고 일일이 그녀들의 사연을 듣고 인터뷰를 해서 Karen에게 전해주었다. 그 후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질문에 대한 답을 하며 토론을 했다. 이 모임으로 자궁 수술 후의 상태와 갱년기 증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에 따른 감정 기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아-그래서였구나. 이게 다 갱년기 증상이구나.’ 이해가 되니 마치 등대가 뱃길을 인도하듯,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마치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에 불이 켜지 듯 눈에 내 마음속에 환한 불이 켜진 듯했다. Karen이 말한 대로 그 당시 나는 매달 체중이 늘어나 이러다간 괴물이 될까 더럭 겁까지 났다. 게다가 늘 땀을 흘러대는 흘려대는 통에 부채는 필수품이 된 지 오래였다. ‘생전 더위를 안 탔는데 이게 무슨 꼴이람.’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면 낯설기만 했다.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웬 퉁퉁한 여자가 꼴사납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우습고 민망스러워 아예 거울을 안 보고 살았다. 내 인생 최대치 몸무게를 기록하고 당뇨란 놈까지 따라붙은 우스꽝스러운 몸. 만사 귀찮고 우울감에 젖어 모로 누워 잠드는 밤의 시린 등허리. 하지만 이유를 알고 나니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학대한 순간들이 떠 울라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미안해 성은아, 너를 이해하려고 하지 못했어. 앞으로 잘 사귀어 보자. 이젠 많이 사랑해 줄게. ’ 그 이후부터 몸에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며 감정변화를 살피게 되었다. 모든 갱년기 증상을 커튼을 걷어내듯 벗겨내려 애쓰며 기억창고의 문을 활짝 열고 겹겹이 쌓여 있던 묵은 감정들을 아낌없이 날려 보냈다.


‘내가 누구인지? 내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착잡한 심정으로 거실 한 귀퉁이에서 턱에 손을 받치고는 하염없이 창 밖만 바라보던 그때 그 시절의 내 모습은 이젠 없다.

“적을 알고 싸우면 이긴다” 는 말처럼 증상에 대한 사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자신을 위해주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Karen과의 공동작업이 아니었다면 계속 감정과의 싸움으로 지쳐 떨어졌을 것이다. 그녀의 박사 논문 첫 페이지에 내 이름이 기록된 것보다, 내가 겪고 있던 증상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알게 되어 몸과 마음이 회복된 기쁨이 더 컸다.


그 후 양로원과 CCLC , 호스피스에서의 자원봉사, 독서, 교회봉사, 팬샤 코러스 합창단 활동으로 정신없이 사는 동안 활기차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한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아프리카 어느 강은 깊진 않아도 물살이 너무 세서 그곳을 건너는 사람들은 등에 돌덩이를 지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팠던 기억마저도 내 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재료였음이 분명하고 그것을 가지고 '나다움'의 길을 열어가는 것은 내 크기에 맞는 돌을 등에 지고 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팠던 시간마저도 내 인생이라는 책의 소중한 한 페이지임을 이제는 안다. 무겁게만 느껴졌던 지나온 고통의 시간들이, 삶의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내 길을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나의 든든한 돌덩이가 되어 줄 것이다.


식은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달무리를 바라보다 한줄기 바람소리에 정신이 차렷 자세를 취한다. 여태까지의 지금까지 쌓여온 낡고 쭈그러진 내 안의 찌꺼기를 아낌없이 미련 없이 바람결에 실어 보내며 감정 폐업 신고를 한다. 오늘 나처럼 달무리를 보고 그 빛에 반하듯이 누군가가 내 인생의 향기와 빛을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을 밝혀 주는 길잡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인생의 길을 밝혀주는 등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삶을 살며 내 인생의 빛을 밝히고 싶다. 오늘 내가 반했던 달무리의 아름다운 그 빛처럼.



<폐업 신고> 최성은 Sue



“우리가 왜 가족이야? 남이지. 나도 가족만의 private 생활을 가지고 싶어.”

5년 전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눈물을 참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내가 쓰리게 짜증 난다.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지! 왜 병신같이 한 마디도 못해!' 나는 시간이 지나면 나쁘고 상처받았던 기억 모두 잊어버린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은 틈만 나면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걸까? 억울했을까? 작지만 나를 괴롭히는 무엇이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감정인거지? 차분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5년 전 토론토 도착, 지인의 소개로 잠시 그녀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혼자 이민 생활에 지친 나는 가족이 그리웠고 외로웠다. 불면증에 시달렸고 건조한 공기로 밤마다 피가 날 때까지 긁어대기 일쑤였다. 그런 데다가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이사를 했고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활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안정을 찾으려면 먼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을 열심히 뒤졌다. 다행히 일은 금방 찾았고 머무르게 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 좋았다. 영주권을 받게 되면 꼭 캐네디언 회사에서 일하리라 다짐했던 터라 이력서를 모두 한국인을 제외하고 제출했다. 한국 업주는 제외하고 이력서를 넣었다. 불면증도 심했고 아침형 인간이니 일찍 시작할 수 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에만 집착했다. 지금 떠올려 보면 그때 캐네디언들과 일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점장이 내가 일하는 스타일을 좋아했지만 유머코드가 당최 맞지 않아서 6개월 일하고 퇴사했다. 한국인의 장점이자 단점. 빠르게 일하고 더 찾아서 일을 하니 게으른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를 믿고 좋아해 주었다.


밴쿠버 삶이 외로움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면 이 집에서는 가족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한 사람들과의 정 속에서 외로움과 안녕을 고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북적북적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어 좋았다. 한 달 정도 룸렌트를 찾아보다 이 집에서 룸렌트를 해도 되겠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살면 왠지 가족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가 왜 가족이야? 남이지. 나도 가족만의 private 생활을 가지고 싶어.”

5년 전, 나는 무언가 말을 했어야 했다. 아직도 억울한 이 기분을 그녀에게 터놓고 말하면 후련해 질까? 5년이 지난 후에? "그때 네가 나에게 했던 말들로 난 상처를 받았고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요 며칠 이 찜찜한 기억을 글로 쓰기 위해 밤마다 고민을 했더니 꿈속까지 찾아와 나를 괴롭힌다. 그것도 모자라 종아리에 매일 쥐까지 나고 있다. 그 정도로 나에게 스트레스였던 사건이었나? 이미 지나간 일이고 묻어버린 과거 아니었나? 이 순간 그녀는 왜 내게 거절을 했을까?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니 당연한 이유이다. 늘 손님으로 북적북적 한 집인데 나의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나 좋자고 그 집에서 살고 싶다 말하니 당연히 거절할 수 있다. 거북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찜찜하고 억울한 걸까? 이건 바로 성격의 차이이다. 수 없이 많은 밤을 뒤척이며 내린 결론은 '거절 방법의 차이'였다. 나는 어떤 부탁의 이야기를 듣고 거절을 해야 할 때 직선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 5년 전까지만 해도 거절을 못하는 'yes man' 이였다. 그래서 나와는 다른 사람을 만나 거절을 당했기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지만 나는 외로움을 극복했고 더 이상 yes man도 아니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거절을 할 줄 도 알고 감정에 받쳐 일을 그르치지 않는 법도 안다. 뜨겁게 다가가지도 않고 차갑게 돌아서지도 않으며 상대방의 속도에 맞추어 관계를 유지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찜찜하고 억울하다. 그 사건을 말끔히 잊지 못하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여전히 그 당시로 돌아가도 아무 말도 못 할 거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해서 거절하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앞으로의 내 인생에 찜찜한 이런 일 들이 없을 꺼라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찜찜한 일들이 내 인생에 또다시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대답을 해야 한다는 지침서도 만들 수 없다. 다만 하나는 약속하자. 당당히 내 모습 그대로 나에게 쪽 팔리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자고! 그때는 거절당한 내 모습이 쪽 팔렸나 보다. 다만 하나는 확실히 나 자신과 약속한다. 앞으로는 나 스스로에게 창피한 모습으로 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며 생각해 보니 그때 찜찜했던 내 기분의 진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거절당했다는 사실보다 거절을 당하고 창피해하는 내 모습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가족이 있는 너에게 해주지 못한 말> JA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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