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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Apr 13. 2023

유홍선 인터뷰上 - 투뿔 등급 복지카드를 드립니다

황서영의 컬러풀 캐나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유홍선 씨는 1살 무렵 벽을 잡고 일어설 즈음 소아마비에 걸려 한 번도 두 발로 서보지 못한 채 휠체어 위에서 생활한다. 2005년 봄, 캐나다에 살고 있던 친구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현재까지 캐나다에 살고 있다. 그를 캐나다로 불렀던 캐나다 친구는 현재 그의 아내다. 통기타, 컴퓨터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통해 연이 닿은 성인장애인공동체에서 2014년부터 책임을 맡게 되었다. 4년의 회장직 역임 이후 2018년부터는 사무장의 자리에서 실무를 이끌며 공동체의 안팎을 돌보고 있다. 

 토론토 성인장애인공동체 25주년 행사 때의 유홍선 씨


황서영 (이하 황) : 안녕하세요.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처음에 사실 백민준 씨를 통해 연결 요청이 왔을 때 별생각 없이 하겠다고 했는데 작가님의 칼럼을 읽고 나서 오히려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내 이야기가 기사 거리가 될까? 난 별 재미없는 사람인데, 싶어서요. 도움이나 의미가 될까 싶었어요.


황 : 의미 없는 삶은 없듯이 의미 없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고요, 하하하. 제가 드리는 질문은 연결을 위해 사전에 준비한 것이에요. 질문과 관계없는 부분도 얼마든지 편하게 덧붙여주시고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에세이 책 <동행>에 수록된 사무장님의 글을 읽으며 가장 처음 든 생각이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분이시구나' 였어요. 세상에는 가장 가까운 가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그런데 사무장님께서는 부모님 뿐 아니라 형제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으셨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멋진 가족을 두신 것 같아요.


유 :  저도 지나고 보니 느끼는 건데 저는 제 가정환경이 참 평범해서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해요. 가장 큰 행운은 제가 장애가 있다고 해서 가족이 유난스럽게 저를 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리 막내아들이, 우리 막내 동생이 장애가 있으니 특별히 감싸거나 보호해야 해' 하는 대우나 취급을 받지 않았어요. 때로는 무관심하다고 느껴질 정도로요. 저는 특수학교에 다니지 않았어요.


황 : 아, 일반 학교에 다니셨군요. 불편함이 분명 있으셨을 것 같아요.


유 : 엄마의 등에 업혀 학교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물도 안 마시고 그랬죠. 혹시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안 되니까. 여유가 있던 가정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평범하게 자랐어요. 그런데 그게 이제 생각해 보면 큰 행운이었다 싶어요.


황 : '금쪽같은 내 새끼'같이 우쭈쭈의 가정환경은 아니었......


유 : 아이고, 금쪽은 무슨 요, 형들하고 얼마나 박 터지게 싸웠게요. 일반 형제들이 그렇듯이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던 정말 평범한 형제들이었어요.


황 : 아, 그렇군요. 아름다운 일화들만 책에 쓰여 있어서 제가 그 현실판 형제의 모습까지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유 : 미화된 것은 아니고 모두 실제 이야기입니다. 하하. 제가 가족의 평범한 대우와 무관심이 행운이었다고 말씀드리긴 했으나 저도 알고 있죠. 겉으로는 제가 특별하다고 느끼게 대하진 않았지만 부모님들이나 형들 모두 마음속으로 저를 특별히 신경 쓰고 고민도 많았을 거라 짐작해요. 어떻게 안 그렇겠어요. 그런 마음의 배려가 참 감사하다고 느껴요. 덕분에 제가 어렸을 때부터 '난 장애인이야'라는 의식에 갇혀 살진 않을 수 있었어요.


황 : 역시 멋진 가족이네요. 사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 사회가 바로 그런 모습 아닐까 생각해요. 무심하지만 필요할 때는 기꺼이 손을 내 밀어주는, 유난이나 특별대우의 대상이 아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 사무장님의 글에서 '가족의 등'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어요. 참 따뜻하고 든든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는데요, 혹시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유 : 저한테 '등'은 너무나 익숙한 존재예요. 제가 살던 시골에는 당시에 휠체어라는 것도 없었어요. 시골이라 사실 휠체어가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거든요. 계단과 울퉁불퉁한 길이 사방에 있었어요. 10대 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휠체어를 처음 봤는데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그뿐이었고 저에게는 그저 가족의 '등'이 전부였어요. 집 안에서는 기어 다녔고 외출이 필요할 때는 등에 업혀야 했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다 큰 아들을 업기 위해서 계속 포대기를 두르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저보다 어린 꼬마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히는 것은 저에게는 선택이 아니었어요. 사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모두에게 '누군가의 등'이 필요한 일이에요. 여기서 '등'은 상징적인 표현이지만요.


황 : '누군가의 등'이 사무장님께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네요.


유 : 그렇죠. 저는 '등'으로 관계를 생각해요.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 등에 업혔을 때 얼마나 불편한지, 얼마나 편한지에 따라 친함의 정도를 인식하게 돼요. '아, 이거 너무 미안하고 불편하다. 우리 아직 안 친하구나~' 이렇게요 하하.


황 : '등'에 얽힌 많은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아요.


유 : 아내와 결혼한 것도 '등'이 연결점이었어요. 캐나다에 친구(지금의 아내)를 보러 잠시 놀러 왔는데 그 친구가 나이아가라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관광버스를 타야 하잖아요. 관광버스엔 경사로가 없어서 굉장히 난감했어요. 그때 아내가 저더러 업히라고 하더라고요. 작은 체구였는데 저를 업고 버스에 올랐어요. 그렇게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됐죠.


황 : 갑자기 '누군가의 등'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낭만적으로 다가오네요. 한국에서 사업을 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일을 하실 때 장애로 인해 특별히 불편하거나 힘든 부분이 있으셨나요?


유 : 저는 컴퓨터 앞에서 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일보다는 확실히 벽이 낮았어요. 제가 하던 사업에서는 딱히 문제는 없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느꼈던 것은 내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나는 상상조차 못 하는 존재구나'하고 느꼈던 적이 많아요.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어른들이 항상 하시던 말씀이 '너는 커서 한약방 하면 되겠다'였어요. 저를 똘똘하게 보시고 그나마 희망적인 덕담을 해주신 거였죠. 당신들 생각에, 칠판에 서서 가르치는 교사나 서서 수술해야 하는 의사는 절대 못할 것 같으니까 방 안에 앉아서 약을 조제하는 이미지의 한약방 주인이나 되면 되겠다 하셨던 거죠. 장애인이라 꿈도 마음대로 꿀 수 없어 슬펐어요. 가장 곤란할 때가 학교에서 '너의 꿈은 뭐야?'라는 질문을 들을 때였어요. 다른 아이들은 '대통령, 군인, 과학자, 경찰, 선생님'이라고 적어 내는데 저는 꿈으로 써낼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꼈어요. 그렇다고 '한약방 주인'이라고 쓰고 싶진 않았어요.


황 : 옛 어른들 입장에서는 앉아서 약재를 써는 한약방 주인 정도가 다리가 불편한 아이에 대한 상상의 최선이었나 봐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이'라는 말이 좀 슬프게 들려요.


유 : 그렇죠. 악한 마음으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무지가 주는 상처도 꽤 크거든요. 특히 그런 일을 많이 겪을 때가 차를 타고 내릴 때였어요. 휠체어에서 차로 옮겨 타고 휠체어를 접어 올려 싣는 과정을 혼자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다가와서 신기한 듯이 바라봐요. '우와, 그거 어떻게 혼자 해요? 한 번 해봐요. 너무 궁금하네' 하면서요. 그 사람한테는 단순한 호기심이었겠지만 그런 시선과 관심은 제 입장으로는 참 불편하죠. 그래서 일부러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에 타곤 했어요.


황 : 순수한 무지가 어쩌면 더 악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궁금할 수 있고 뭐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걸 내가 겉으로 드러낼지 말지 적절한 결정을 하게 하는 지성이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사고 그리고 상처를 막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유 : 사회적인 차원의 교육이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무지로 인해 불편한 경우는 이런 것도 있어요. 장애인은 불쌍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식만 가진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만나면 다짜고짜 도와주려 하거든요. 갑자기 뒤에서 휠체어를 민다든가, 부축을 해주려고 옆구리를 잡는다든가......  진짜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면 너무 당혹스럽고 불편한 마음이 들죠.


황 : 도움이 필요한 지 의사를 먼저 물어보면 좋을 텐데 도와주는 분들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 불편할 뿐 아니라 불쾌할 수도 있겠어요.


유 : 저희를 사회적 약자로 프레임 씌우는 교육 말고, 장애인과 소통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올바른 방식을 알려주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껴요.


황 :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꼭 장애인이 아니라도 낯선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는 무턱대고 돕지 않고 웬만하면 물어보잖아요. '불편해 보이시는 데 도와드릴까요?' 하고요. 그런데 유독 휠체어 이용자들에게는 의사를 물어보는 절차가 생략되는 건 사회 차원의 책임이 큰 것 같아요. 악한 의도로 무시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보다 선한 무지로부터 받는 상처가 더 크잖아요.


유 : 정말 맞는 말이에요. 제가 2015년도에 친구(현재 아내)가 살던 캐나다에 처음으로 놀러 왔는데 친구가 일하러 가고 나면 심심해서 아파트 주변을 혼자 한 바퀴 돌았어요. 근데 너무 놀랐던 게 제가 휠체어를 타고 밖에 나가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그때 다가와서 도와줄까? 하고 묻고, 도와주고 나서는 고맙다고 할 틈도 없이 쿨하게 사라져요. 그때 느꼈어요. 나를 신경 쓰지 않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무신경함이 이렇게 편한 거구나, 하고요. 실제 캐나다에 와서 살아보니 휠체어에 대한 캐나다의 무관심과 무신경함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여기는 영구 장애인이 아니라도 일시적으로 몸이 불편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면 스스럼없이 휠체어를 이용해요. 그런 게 자연스럽다 보니 길에서 휠체어 이용자나 장애인을 만나는 게 별일이 아닌 거죠.


황 : 맞아요. 대형 마트에 가면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전동 휠체어가 항상 있더라고요.


유 : 캐나다는 장애인구 비율이 25퍼센트인가 그렇대요. 그렇게 높은 비율이 어떻게 가능하냐면 장애 기준을 국가에서 지정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몸이 불편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면 그 순간 장애인이라는 거예요. 이곳은 장애인이라는 존재를 특별히 불행하고 불쌍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황 : 불행한 '존재'가 아닌 불편한 '상황'일뿐인 거군요.


유 : 그런 편안함 때문에 캐나다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요.


황 : 캐나다에는 한국처럼 장애인 등록증이 따로 발급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럼 각종 혜택은 어떤 과정을 거쳐 받을 수 있나요?


유 : 그건 모든 혜택들을 각각 따로 신청해야 해요. 장애인 등록증으로 대부분 해결되는 한국과는 다르게 각 혜택마다 신청에 필요한 서류와 신청 방식이 달라서 그때그때 맞춰 신청하는 거예요. 혹자는 불편하다며 불평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어떻게 보면 이게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장애인 등급이란 게 사실 애매모호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억울한 사람도 생기고요. 근데 여기는 통합등록증도 없고 등급도 없다 보니까 각각의 복지 프로그램마다 해당 조건에 맞으면 혜택을 받는 거라 억울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느낄 일이 거의 없는 거죠. 장애인 등록증으로 장애인을 분류하고 묶느냐, 복지 프로그램마다 각각 따로 신청받느냐의 차이는 편의성을 떠나 사회적 관점을 다르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황 : 그런 제도들이 장애인에 대한 거리감과 벽을 허물어 주겠네요. 한국은 장애인 등급으로 갑론을박하며 논쟁하는 일들이 많잖아요. 그럴 때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투뿔, 원뿔 하며 한우 등급 매기는 것처럼......

장애인 비장애인 사이의 벽만으로도 힘든데 장애인들 세계 안에서 등급에 대한 갈등 때문에 벽이 2중 3중 세워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유 : 그렇죠. 그런 등급 제도가 사회적 인식과 궤를 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우리도 같은 인간'이라고 외쳐봐야 나라가 지정한 등급에 의해 분류되는 제도가 존재하는 이상 '다른 인간'으로 여기는 시선은 사라지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유홍선 씨와 장애인등록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돌아가신 할머니의 낡은 지갑이 떠올랐다. 그의 낡은 지갑 가장 안쪽에는 '복지카드'라고 적힌 장애인등록증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서나 당차고, 손녀에게는 엄격했던 그의 복지카드를 볼 때마다 누구보다도 강인한 나의 할머니가, 사회가 인정한 '약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어색하고 이상했던 나의 기분과 그의 등록증이 항상 지갑의 가장 안 쪽 칸에 꽂혀 있었다는 것은 영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지구에 외계인이 침략한다. 비효율적인 인간 세계를 무너뜨리고 외계인 그들의 편의에 맞춘 세상을 다시 건설한다. 10미터 높이로 점프하는 능력과 순간이동 능력이 있는 그들은 식료품점의 진열대를 10미터 높이로 세우고, 새로 짓는 건물에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만들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이 완성되자 외계인은 어딜 가나 도움이 필요해진 지구인들에게 '복지카드'라고 적힌 장애인등록증을 발부한다.


도시 시뮬레이션 게임 <심시티>처럼 사회를 건설하는 경기에서 소수를 이긴 다수는 권력을 가진다. 건설에 대한 결정권 행사는 당연히 다수의 편의에 기준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그들과 다른 소수에게 불편하고 불공평하다.


'장애'란 다수와 소수가 싸우는 게임에서 수적으로 유리한 다수가 합의 없이 만들어낸 '룰'이다. 그 일방적인 규칙은 어린이의 상상을 제한하기도 하고, 불편한 도움을 강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횡포는 미성숙한 인식과 문화라는 최종 빌런(악)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높이 점프를 하지 못하는 지구인도, 순간이동 능력이 없는 지구인도, 외계인이 마음대로 지은 세상에 속한 구성원이다. 합의 없이 건설된 세계에서 불편하고 억울한 이들에게 복지를 약속하며 쥐어준 '등록증'이 차별과 동정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2편에서 계속



해당 칼럼은 에이블뉴스(https://www.ablenews.co.kr/) 칼럼 <황서영의 컬러풀 캐나다>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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