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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봉씨 Dec 27. 2019

메리 크리스마스, 이나경!

오늘은 크리스마스 저녁.  
큰언니 집엘 갔다. 서로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거의 1년 만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조카가 생기면 이것저것 사주며 내 아이처럼 챙겨주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얼굴을 보지 않는 이상 조카의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가끔 있는 두 조카의 입학만은 챙긴다.)

그런 무심한 이모인데도 조카는 이모들이 보고 싶다며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촘촘하게 큐빅을 붙인 카드에는

막내이모랑둘째이모에게
막내이모둘째이모안녕하세요?
저나경이에요이모들사랑해요
메리크리스마스
-나경올림

봉투는 없냐는 말에 엄마까지 동원해 열심히 뒤적이다가 분홍 봉투에 입체 스티커를 붙여 전달해주었다.
워낙 오랜만이라 큰언니와도 밀린 얘기가 많았는데
이모! 내가 이모 캐릭터 만들어줄게요!
이모! 공기놀이해요! 엄마는 너무 잘해서 재미없어요.
이모! 꺾기 놀이해요. 잘해요?
이모! 이 거 제 화장품이에요.
끊임없이 말 걸었다.
나경이와 조금 이야기하다가 “나경아. 이모는 공기놀이 되게 잘해서. 너 이겨.”라는 말로 상황을 종료시키고 큰언니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시간 뒤쯤 조용해진 나경이는 내일 있을 학습지 숙제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나경이 방에 들어가 보니  산수 문제를 엉터리로 풀어내고 있었다.

하기 싫어서 빨리 끝내려는 게 뻔히 보였다.
 “나경아, 뺄셈 이렇게 풀면 안 돼, 다 틀린 것 같아. 왜냐하면 이렇게 이렇게....”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나경이는 짧게 ‘아’ 하더니 답을 벅벅 지워내고 또다시 대충 풀어냈다.
그런 방식으로는 틀릴 수밖에 없는데  이를 어쩌지 지켜보다가 큰언니에게 가서 작은 소리로
“언니, 나경이 공부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눈 똥그래진 언니가 “왜?”
“뺄셈 답을 뒷자리 먼저 죄다 풀고 앞자리를 풀고 있어. 그러면 틀린 답이 생길 수 있잖아.”
언니는 내 말 끝나자마자 바로 나경이에게 돌진하려고 했고 나는 막아섰다.
“지금 말하지 마! 내가 이른 거 알면 실망하잖아, 나중에 얘기해.”
하지만 언니는 들리지 않는 듯 나를 지나쳤다.
“이나경. 너 누가 그렇게 풀으래. 다 틀렸잖아! 선생님이 스스로 하게 두라고 해서 일부러 안 봤었는데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
하아... 계속되는 꾸중에  ‘말하지 말 걸.”  내 행동을 원망했다. 집안 교육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데.
혼자 지우개질 하며 훌쩍이는 나경이에게 다가가

“괜찮아, 하기 싫으면 그럴 수 있어. 이모도 억지로 한 적 많아서 이해해. 몰라서 그런 거 아닌 거 이모가 알잖아.”  
나경인 내가 집에 갈 때 얼굴을 보이지 않고 “이모, 안녕히 가세요!”라고 목소리 마중했다.
내게 화가 났을까? 원래 좋은 이모는 아니지만 오늘은 나쁜 이모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언니와 이야기 나누다가 알았는데,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까 말까 한 형부가 크리스마스에는 꼭 선물 들고 가겠다고 아이와 약속했는데 결국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경이는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이젠 안 믿어! ” 라며 세상 떠나가라 꺼이꺼이 울었고 큰언니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에 너무  화가 났다고.

그 걸 듣고 나니 나경이가 느꼈을 아빠의 배신감도 상당했을 텐데, 가끔 방문하는 이모가 함께 놀아주지 않은 허탈감과 꾸중을 듣게 한 실망감까지 가중되어 버렸다.
1학년 나경이가 기대한 크리스마스는 이런 게 아니었을텐데.


오랜만에 만난다는 건 뭘 먼저 풀어내야 하는지 판단을 잃게 한다.
큰언니와 마주 보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나, 그동안 자랑할 것이 쌓여있는 나경이.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조카를 더 위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큰언니랑은 전화로 대화할 수 있지만 나경이는 그렇지 않다.

무심한 이모에게  잊지 않고 카드를 써 줬는데 나경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더 소중히 했어야 했다.
내년엔 나도 나경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달해야겠다.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처 주는 이모가 되지 말기로.
메리 크리스마스 이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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