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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영 Feb 28. 2017

취향 존중

<다름>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하여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 - Voltaire


오늘 모처럼 밖으로 나가는 날이었다. 편하고 따뜻한 게 좋아서 레깅스에 짧은 니트를 입었다. 위에 외투를 걸치고. 딱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엄마가 여기가 미국이냐면서 나의 옷차림에 대해 엄-청 뭐라고 했다. 심지어는 동생을 불러서 '얘 옷 입은 것 좀 봐라' 라든지 '한국에서 이렇게 다니는 게 말이 되냐면서, 여긴 미국이 아니니까 제대로 입어라' 등의 말을 했다. 뭐, 부모와 자식 간 스타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가겠다고 했는데 굳이 제발 갈아입고 가라는 엄마의 말에 괜히 싸우고 싶지 않아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인가 하는 마음에 지하철을 타자마자 짜증 부려서 미안하지만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카톡을 보냈다.

엄마는 '오늘 짜증까지는 안 냈으니까 괜찮고, 날씨 추우니까 잘 가라. 근데 다른 사람이 너의 옷차림을 보는 시선도 제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답했다. 그 사람들이 네가 그렇게 입고 있는 걸 못마땅하게 혹은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 담긴 내용의 카톡이었다.

아침에 옷차림에 대해 뭐라고 한 것은 어쩌면 엄마의 나이와 세대, 경험에 의한 판단이었기 때문에 (나는 동의하지 않아도)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의 저 무시무시한 카톡은 몇 가지 안타까운 점들을 자아냈다.

첫째로, 엄마가 상정하는 '남들의 시선'이 오로지 엄마의 시각으로 빚어진 시선이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 해서 안타깝다. 어느 누구도 타인을 일반화할 수 없다. '남들이 그러던데' 의 '남들'은 오직 자신의 세계가 만들어낸, 자신의 자아를 투영한 제3자일 뿐이다. 엄마가 말하는 '남들의 취향'에는 나의 취향이 반영되지 않았다.

둘째로, 다양성에 대한 태도가 안타까웠다. 취향은 나이와 또래 집단, 경험 등 충분히 여러 요소에 의해 차이가 존재한다. 각기 다른 취향이 존재하는구나-라는 명제를 아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관습과 문화가 만들어낸 규칙처럼 행해지는 행위들(예를 들면, 장례식장에 갈 때는 검은 옷을 입는다던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규범으로 굳어진 예의와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속에서 생기는 취향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 취향을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옷을 입는 행위 자체는 오롯이 나에게 주어진 권리다. 온전히 '나'와 관련된 일이며 그것은 앞서 말한 특정한 규범들을 제외하면(장례식 등) 억압될 수 없다. '네가 그런 옷을 입으니까, (      ) 했지' 의 사고방식은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는 아주 당연한 권리를 실행한 사람을 마치 아주 큰 잘못이라도 저지를 사람으로 몰아가는 무책임한 생각이다. 대부분 저런 사고방식은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회적으로 약한 위치에 놓인 여성의 위치를 활용한 아주 영악하고 어이없는 행위다. 고칠 건 <내가 나의 권리를 행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권리를 행사하는 행위를 바라보는누군가의 삐뚤어진 태도>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취향 존중합시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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