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서영 Feb 19. 2017

취미는 수집

버려야 채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버리는 걸 잘 못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다이어리부터 누군가에게 받은 편지, 카드, 심지어 아주 사소한 쪽지까지 아직도 다 가지고 있다. 비행기 보딩 패스와 나라별 대중교통 카드, 관광지/박물관/미술관 입장 티켓을 모으는 건 여행 중 즐겨하는 쏠쏠한 취미다. 가끔은 영수증까지 소중하게 보관해서,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도착하면 지퍼백 가득 종이가 차있다. 


그런데 오늘, 많은 걸 버렸다. 갑작스러운 버림(?)의 계기는 단순했다. 커피를 좋아하면서 카페에 관심이 생기고, 카페에 관심이 생기니 '공간'에 관심이 생겼다. 인절미처럼 퍼져서 누워만 있던 내 방을 예쁜 공간으로, 내가 좋아하는 공간으로 꾸미고 싶었다. 내가 머무는 이 한 방에 부여된 <내 방>이라는 추상적 지위와 더불어 외면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단순한 욕심에 새벽 5시까지 '셀프 인테리어'를 검색했다. 어쩌다 '미니멀리즘 인테리어'를 봤는데 계속 궁금해서 검색하다 보니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스트, 미니멀 라이프'까지 도달했다.

미니멀리즘,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

작은 것 하나 마음 놓고 버리지 못하는 나에게 미니멀리즘 라이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흥미롭네-하면서 계속 찾아보다가 문득 미국 교환학생을 할 때가 생각났다. 짐을 줄이려고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한 학기를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종강 후에 여행 계획이 있던 터라 최대한 짐을 안 늘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아주 최소한의 것들만 갖추고 살았다. 평소에 쉽게 소비를 결정하던 만물 수집가(나...)에겐 사실 꽤 어색하고 답답했다.

더 이상 돈으로 무엇을 사고 모으는 재미는 즐길 수 없었다. 그런 일상을 지속하다 보니 무언갈 사는 거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쇼핑센터를 가도 딱히 구매욕이 안 들었다. 예전에 무언가를 보면 꼭 '갖고 싶다, 사고 싶다'랑 
연결되었는데, 쇼핑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니 이것은 옷이고 저것은 신발이구나, 하며 물건을 인지하는데서 생각이 끝났다. 물건을 알아보고 구경하고 구매하며 쓰던 시간을 반강제적으로(?) 다른 곳에 사용했다. 영화와 활자를 많이 보고, 운동을 매일 하고, 꽤 자주 글을 썼다. 모은 돈으로 여행을 했고, 낯선 문화에서 경험하는 작은 것도 기록하고 사유했다.


덕분에 꽤 많은 것을 수집했다. 영화와 활자를 읽으며 대학에서 배운 지식 너머의 다양한 배움을 수집했다. 글을 쓰고 다듬으며 나 자신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수집했다. 여행을 하며 경험을, 대화를 하며 배려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수집했다. 무언가를 갈망하고 욕심내는 시간보다, 온전히 나한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담이지만 운동도 매일 했는데 지방을 수집했다...이유는 모름...)

그렇게 문득 미국에서의 생활이 생각났다. 
아주 강렬히 방을 비우고 싶었다. 


방 벽지까지 흰색 페인트로 칠해서 아예 싹 바꾸고 싶었다. 조심히 의견을 말했더니 엄마와 아빠가 강력하게 반대했다. 뭐 어쩌겠나, 엄밀히 말하면 내 집이 아닌걸. 처음으로 독립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된 거 주어진 조건 안에서 잘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이상한 오기가 발동하는데, 이게 (유일하게 내입으로 말할 수 있는 장점인) 추진력과 맞물리면 걷잡을 수 없다. 그렇게 방 정리를 시작했다.

하나에 꽂히면 지독히 모으는 습관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모아 온 수많은 수집의 대상들(펜/도장/매니큐어/옷/가방/화장품)을 아주 많이 버렸다. 특히 고3 때는 매니큐어에 꽂혀서 족히 몇 백개는 가지고 있었다. 매니큐어를 위한 서랍장도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아이러니하지만 지금 나는 내 맨 손톱이 제일 좋다.) 옷, 화장품, 액세서리, 가방 등 소유하는 물건의 영역 대부분을 건드렸다. 낮 12시부터 늦은 6시까지 무려 6시간이나 정리했다. 엄밀히 말하면 버렸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1%라도 들면 과감히 다 버렸다. 100L짜리 종량제 봉투를 몇 개나 쓴 건지... 꾸역꾸역 안 버리고 갖고 있는 게 많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실 아직
도 서랍에 가득 찬 수많은 편지들과 신승범 선생님의 고쟁이를 보면 나는 미니멀리스트는 못될 것 같다. 아마 저것들은 평생 못 버릴 거다. 아니 안 버릴 거다. 굳이 미니멀리스트가 돼야지, 이런 큰 다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미니멀리즘 라이프도 여러 삶의 방식 중 하나인 것이고 우리의 인생에서 정답은 없으니까!

깨끗한 방을 보고 제일 좋아하는 건 부모님이셨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원했던 물건들을 몽땅 버리는 나에게 '정말 버리게?'를 여러 번 외친 엄마, 아빠. 


여하튼 그렇게 방을 비우니 마음도 아주 홀가분하다. 버릴 때의 망설임이 살짝 부담되긴 했지만 '언젠간 쓰겠지'하고 단 한 번도 안 쓰는 악순환이 똑! 끊어진 것 같아서 행복하다. 내친김에 방에 전구까지 이용해서 살짝 꾸며봤는데 반짝거리는 걸 보니 기분이 좋다. 

또 언제 변덕쟁이처럼 변해서 헤헤거리며 좋아하는 걸 잔뜩 모을지도 모르지만
배움을, 생각을, 경험을 수집하며 단순하게 살아야지 :>


작가의 이전글 내가 생각하는 진짜 뉴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