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참 힘들었겠구나>

XYZ: 얽힘 , 얽히고설킨 여러 세대가 공존할 방법

by 찬란한 하루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고통을 마주한다.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그렇지만 고통을 겪고 난 사람들은 모두 극복했든 그렇지 못했든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에서 매번 위로받지 못하는 우리는 종종 영화·드라마로 위로를 받는다.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은 주인공이 그 고통을 마주하며 좌절하기도 하고, 일어나려 애쓰고,

끝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마음 한구석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차오른다.


재미를 느끼고, 감동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영화·드라마·책은 모두에게 다르다.

누군가가 재미를 느낀 작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흥미가 없을 수 있다.

누군가가 감동한 작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을 수 있다.

누군가가 위로받은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 작품이 가치가 낮다 혹은 없다고 평가하는 순간,

그 평가는 누군가를 위로할 기회를 저버리는 행동이 돼버리고 마는 듯하다.


콘텐츠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은 나로서 인상적으로 봤던 두 작품이 있다.

바로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영화 <82년생 김지영>이다.

두 작품 모두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인이 된 후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가정을 꾸린 이들의 이야기이다.

그 과정에서 두 작품의 주인공은 각자 크고 작은 고통을 마주한다.

그들은 좌절하고, 나아지려 애쓰고, 잊어버리려고 하면서도 계속 살아간다.

해피엔딩이 아니고 똑같은 보통의 하루를 보내더라도 결국에는 살아가야 하는 그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껴져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젠더·세대에 따라 의견이 극명하게 나뉘었다.

내 주변에서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20-30대 여성들이 있었고,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40-50대 남성들이 있었다.

인터넷상에는 두 작품에 대한 그보다 더 격렬한 논쟁들이 오갔다.


하나의 콘텐츠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없기에 다양한 콘텐츠들이 필요하다.

각각의 콘텐츠를 본 후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나눈다는 건 바람직하다.

그로 인해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놓쳤던 것들을 알게 되어,

대다수에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고 생각해볼 기회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다양한 의견을 나누려는 자세가 아니라 평가·비난하려는 자세다.

나와 다른 의견,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의견에는 무조건 평가와 비난부터 하는 자세,

또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고 해서 이해해보고 들어보지 않으려는 자세

결국엔 그 자세가 다양한 콘텐츠가 존중받으며 존립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콘텐츠를 놓쳐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콘텐츠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혐오와 갈등이 더욱 커지는 요즘 한국사회를 보다 보면,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 평가·비난만 덜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와 다르더라도 듣고 이해해보려는 자세가 있어야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만 해도 울컥하고 마음이 녹는 우리인데,

그 한마디가 참 어렵게 만드는 사회가 우리를 위로받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내가 위로받고 싶다면 상대를 위로할 준비가 되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게 된다면 서로를 위로하고 품어주며 얽히고설키며 공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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