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두 아버지2
오늘은 시댁 아버지의 이야기다. 나와 시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딸과 시아버지의 이야기다.
나와 우리 딸의 돈독함에는 시아버지의 특별했던 손녀 사랑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시아버지는 참 성실한 분이셨다. 몇십 년을 똑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닫으며 성실히 가게를 일구셨고, 자신만의 재미와 즐거움을 위한 시간에는 인색하셨다. 5형제의 둘째이지만 큰 형의 사정으로 집안의 맏이 역할을 하고,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기르는 동안 자신을 위한 삶은 없던 분이셨다. 술도 두 아들이 장성해서야 아들들과 한 두잔 하며 배우셨다 한다. 조용하고 수줍움도 많으셨던 시아버지는 마음 표현에도 서투신 분이셨다. 결혼 초반 며느리인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못하시고 시어머님을 통해 전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손주들이 태어나고 조금씩 달라지셨다. 특히, 둘째 손주인 우리 딸이 태어나고 시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분이 되셨다. 시아버지는 우리 딸이 태어났을 때부터 ‘딱 내 스타일이다’ 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시아버지의 손녀 사랑에 특별한 이유라 할 게 뭐가 있을까 싶지만,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남자 형제와 자식들만 키우시다가 동글동글 귀여운 여자아이가 특별하셨을 것 같다는 추측이다.
시아버지는 하시던 가게를 정리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공부하는 며느리를 위해 우리 집을 왔다갔다 하셨다. 우리집과 시댁의 거리가 있었던 탓에 한 번 오시면 3~4일은 우리집에서 지내셨다. 시어머님은 우리 아이들의 먹거리를 챙기셨다면 시아버지는 우리 딸의 친구이자 비서(?) 역할을 자처하셨다. 그 무렵 큰아이는 유치원과 태권도장을 다녔고, 유치원도 안 갔던 둘째 아이는 낮시간 내내 시아버지와 함께했다. 손녀와 하루를 보내면서 시아버지는 수다쟁이가 되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그리고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딸이 새로운 뭔가를 알아서 해내거나 오빠의 한글 학습지를 따라서 읽기라도 하면 그 사소한 일화가 큰 사건인 것처럼 한참을 이야기하셨다.
한번은 휴강이 되어 일찍 집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시아버지는 머리에 손녀의 머리핀을 여기저기 꽂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종이 인형을 자르고 계셨다. 시어머니께서 간혹 나에게 시아버지를 손녀 비서라고 칭하셨는데,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평소 무표정한 시아버지는 환한 아이 얼굴이 되셨다. 돌아가신 지 7년이 넘었지만, 그때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시아버지가 우리 딸에게 표현해주셨던 사랑의 모습은 우리 친정아버지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친정아버지는 젊은 시절 낳은 언니들에게 사랑의 표현이 서툴렀고, 시아버지도 두 아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 모두 아버지는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흘러 두 분 다 애정 표현이 넘치는 딸바보, 손녀 바보가 되셨다. 가장의 무게가 두 분의 입을 무겁게 했던 게 아닐까.
그 옛날 친정아버지가 나에게 하셨던 말, “우리 진영이, 우리 진영이는 뭐든 잘할 거야”
그 말을 시아버지도 우리 딸에게 참 많이 해주셨다 “우리 손녀, 우리 손녀는 뭐든 잘할 거야”
나와 딸이 가진 사랑의 힘은 두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 표현 덕분임을 믿는다.
나와 딸은 쌓이고 쌓였던 두 아버지의 사랑 표현을 맘껏 받았던 행운아였다.
가끔 나는 딸에게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기억나는지 묻는다. 딸은 할아버지와 했던 놀이를 나열하며,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곤 한다.
시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우리 딸을 마음 따뜻한 아이로 크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