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으로 연인이 될 수 있을까요?
곰석을 처음 만난 건 어느 2월, 끔찍하게 시려운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연애를 직접 하기 보다 남의 연애를 방송으로 관찰하는 것에 열광하기 시작하던 쯤이었다. 바야흐로 간접 연애의 시대가 열린 것 같았다. 나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내어 연애에 쓸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질 않았던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이성에게 어필하고 싶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그럴 수록 스스로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일에 더 매달렸다. 일상과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회사에서의 일을 잊지 못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도 일상생활은 더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번아웃이 소리 없이 나를 덮치고 있었다.
연애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 하나를 책임지기도 이렇게 힘든데, 내가 누구를 신경 쓸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했고, 또 아직 만나지 않은 미래의 남자 친구가 좋은 사람일지를 의심했다. 그러던 중 대학 동기를 만나 소개팅 제안을 받았다. 집밖으로 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보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첫 번째 소개팅 자리에 나갔을 때 내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현하는 앞에 앉은 남자가 너무 낯설고 싫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사파리에 암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다.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 번 더 만나 봤지만 생각이 더욱 확고해질 뿐이었다.
그 남자는 두 번째면 그래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걷는 길에 슬며시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어깨도 아니라 허리라니. 그의 말에 웃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손을 빼 내었다. 그러고는 다음 또 만나자는 말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폭력성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 웃으며 그 자리를 마무리한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몇 문장의 메시지를 보냈다. 일말의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메시지였다.
** 씨가 별로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아요. 즐거웠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세요.
소개팅에 대한 인식이 더욱 안 좋아졌다. 나는 불쾌한 일에도 당장 정색하지 못하고 혹시 폭력적인 사람이 아닐까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행동했다. 이렇게 이성을 만나는 것이 가능한 걸까.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못할 짓 같았다. (소개팅을 했던 그분도 사실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텐데 선을 살짝 넘었다는 이유로 내게 그런 취급을 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소개팅을 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정의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같은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소개팅을 한 번 더 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 달 사이에 내가 내린 정의가 많이 흐릿해진 것인지, 그날 혼자 맥주를 홀짝이고 있어서 그런지, 곰석을 만날 운명이었던 것인지. 나는 왜인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소개팅을 하겠다고 말한 주의 금요일. 곰석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했고, 우리는 직장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일 중 하나인 금요일에 아무런 약속 없이 서로의 집에서 맥주를 한 캔씩 따며 메시지를 나누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섬세함이 돋보이는 남자라는 생각 외에 별다른 마음은 없었다. 그는 우리가 만날 날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미리 찍어 둔 셀카를 두 장 보내 줬다. 사진상에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실례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잘 찍었네.’ 훗날 든 생각이지만 사실 곰석은 사진을 잘 못 찍은 것이었다. 실물의 절반 정도밖에 담지 못한 것이다.
약속을 정하는 것은 속전속결이었다. 이상하게, 이전까지와는 달랐다. 곰석이 제안하는 대부분이 마음에 들었고, 대화를 나누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곰석은 속이 깊고, 계획적이었다. 나를 만나고자 낯선 동네인 연신내까지 오겠다고 했으며, 갈 장소까지 미리 찾아보았다. 물론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과정이 물 흐르듯 불편함이 없이 마땅히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주 일요일. 우리는 연신내역 7번 출구에서 서로를 처음 보았다. 어색하게 한 일식당에 들어서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날 나는 이런 기록을 해 놓았다. ‘곰석 씨를 처음 만난 날, ‘내 세상을 흔들러 찾아온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나보다 크지만 너무 작고 소중해서 나만 아껴 보고 싶었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지금까지 긴긴 시간 더 나은 사람이 됐구나 생각했다. 지난 모든 남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점이었다.’
그렇게 간접 연애에서 직접 연애로 가는 길의 포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