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그 소년이 온다.
2024년 10월 10일
마음이 혼란스러웠던 날이었다. 식탁에 앉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한강’이라는 작가를 몰랐음에도 눈물이 흘렀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에 벅찬 감동이 차올랐다.
노벨상 수상 후 서점가는 분주했고 책이 동나기도 했다. 그러나 차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가 쉽게 써지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던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쉽게 읽어 치우고 한낱 가십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무거운 글이라 생각되었다.(먼저 글을 읽은 이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혼잡한 내 마음이 그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호흡을 가다듬고 열풍이 가라앉기를 차분히 기다리고 싶었다.
12월
노벨상을 수상하며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영상이 담긴 유튜브를 보았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차림, 조용하고 차분하며 단정면서도 다정한 말들이었다. 긴장감 없이 쪼르륵 물을 따라 마시고 다시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가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알 수 없는 감동과 벅참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글이었구나. 그래, 역시 쉽게 읽어치우지 않기를 잘했어.’ 그렇게 겨울을 보냈다. 뜸을 오래도 들였다.
4월
노벨상 수상소감문이 담긴 책‘빛과 실’이 출간되었다. 단정하고 반듯하지만 묵직한 글이 마음을 움직였고 용기를 낼 수 있겠다는 다짐이 서게 했다. 자료 조사를 하며 광주에서 심장이 갈라지는 걸까?라고 생각했다는 작가의 글처럼 내 심장도 어쩌면 갈라졌는지 모른다. 시대의 아픔과 작가의 고통을 담을 준비가 조금은 되었다 느꼈다.
5월
첫 책으로 ‘소년이 온다’를 집어 들었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누군가는 사실이 아니라고 감추고 싶어 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려고 소년이 온다. 검은 숨, 어린 새가 되어 여기 이곳으로, 우리가 있는 밝은 이곳으로 온다.(현재형을 강조한 작가의 의도가 딱 떨어진다.) 수상 소감에서 ‘온다’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도 꾸준히 소년이 우리에게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그들과 살아남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져 가는지(’ 살아가는 ‘이라는 수동태로 쓰일 수 없다.) 고통이란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날을 피폭에 비유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로 결말 맺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일제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와 무엇이 달랐을까?)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를 묘사한다. 일생에 걸쳐 고통을 주고 피폐해지는 피폭.
담담하고 다큐적인 문체로, 차분하고 면밀한 표현으로, 작가의 조곤조곤한 말투로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 없이 담아 내놓았다. 이 글을 쓰기까지 그들의 고통에 밤잠을 설치고 아렸을 것이다. 글을 읽으며 뚝뚝 눈물이 떨어지다 흐느낌이 되어버리길 몇 차례 반복했다. 읽는 일도 이런 고통인데 쓰는 일은, 실제 겪은 그들은…. 고통과 아픔을 감히 가늠할 수 없다.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사실과 아픔을 끄집어냈다. 아니, 세상에 드러냈다. ’드러낸‘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안에 숨겨진 상을 드러낼 뿐이라고 했다. 이 표현을 여기에 쓰고 싶다.)
’신이 없는 것 같아, 여기 하느님은 없어‘라고 했던 그들의 외침에 이제야 신이 한 명의 작가를 통해 기도에 응답하셨다. 노벨상 수상으로 길이 열렸으니 많은 이들이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서 기억하고 마음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저기에서 오고 있는 소년을 두 팔 벌려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사과했으면 좋겠다.
잊지 않고 기록하고 알리고 남겨 세상에 제대로 드러나야만 한다. 더 많은 이들이 읽고 알고 기억해야만 한다. 제대로 사과해야 하고 더 이상 모독해서는 안된다.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어서도 안된다.
이제야 읽고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어 너무나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