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그냥 보기만 하는 것(창의적이지 않은 자세)과 창의적인 자세는 무엇이 다를까
공이 굴러가는 모습을 보고 이성으로만 인지한다면, 즉 지적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공을 던지고 굴러가는 모습을 백번이고 바라볼 수 있다.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추상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본질을 보고 온전한 인격으로 응답하는 것. 우리가 ‘나무’를 본다고 할 때 순전히 개념으로만 인지할 경우, 나무는 개성이 없이 그저 많은 나무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 나무는 완전한 구체성과 더불어 그것만의 유일성을 띠게 된다. 그럴 경우 세상엔 나와 인연을 맺고 내가 바라보며 응답하는 이 한 그루의 나무만 존재한다. 그 나무가 나의 고유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나이는, 직업은,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추상을 보며 핵심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내면의 성숙에 이른 사람,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의적으로 살 수 있다.
(투영과 왜곡 : 우리는 내가 화가 나면 다른 사람에게 투영해 그 사람이 화가 났다고 믿기도 한다. 탐욕이 원하는 대로, 화가 강요하는 대로,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
머리로 혹은 눈과 귀로 반응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내 온 인격으로 응답한다. 온몸으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보면 비로소 나는 그것과 하나가 되며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이런 식의 응답은 보는 자와 보는 대상,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는 완벽한 관계 맺음의 상황에서 가능하다.
감탄하는 능력
집중력 지금 이 순간에 몰입
독창성 ‘나’를 경험하는 능력
의견을 말할 때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을 말한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배운 것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타인이 나에게 거는 기대, 사회적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속된 집단이 아닌 독자적인 개체로서 스스로를 ‘나’로 느끼며 자아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그리고 자기 행동의 진짜 주인으로 경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타인과의 관계 맺음에서 자기 정체감과 자기감정을 키울 수 있다.
갈등과 긴장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능력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주체성과 독창성을 키우는 원천이다.(책에서는 주체성과 독창성이라는 단어 대신 ‘성격’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이게 위에서 말한 독창성과 더 비슷하다고 느낀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욕망과 우연에 지배당한다. 계획을 세우고 예방 조치를 취하는듯해 보이지만 의지, 계획과 전혀 무관한 우연에 지배당한다. 때문에 갈등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심도 있게 경험하며 이성뿐 아니라 감정으로도 수용해야 한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마음가짐
인간은 안전을 뜻하는 이전 상태를 떠나기 무서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고 완전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도전을 지향한다. 안전한 현재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과 성장하고 싶은 욕망 사이를 쉬지 않고 오간다.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안전을 버리고 단 하나만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물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 자신의 창의성만 믿을 수 있는 용기
안전을 버릴 용기, 타인과 다를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딜 용기
-
한 줄 생각
에리히 프롬이 표현한 창의적 자세는 결국 소로가 말한 '관찰', 시몬 베유가 말한 '관심'과 같은 맥락이다. 창의적이라는 단어만 다를 뿐 섣불리 판단하려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 하며, 오픈마인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많은 부분 시몬 베유와 닮아있다. 결국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근본은 다 비슷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