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뼈맞음과 깨달음이 왔다 갔다 하는 에리히 프롬 책의 베스트 챕터 <무력감에 대하여>
무력감을 느끼고 -> 합리화시키고 -> 역시 나는 안된다는 확신을 하며 무력감을 느끼는 악순환이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공부하라는 어른들의 잔소리처럼 결론이 너무 당위적 일지 모르겠지만, 사례와 역사를 통해 논리가 빌드업되다 보니 설득당하게 된다.
이 챕터는 꼭 책으로 다 읽기를 추천!
시민계급은 무언가를 열심히 생산하지만, 그는 그 사물의 주인이 아니라 시종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물질세계 전체가 인간 삶의 방향과 속도를 지시하는 거대한 기계 괴물이 된다. 인간을 편하게 해 줄 것이라며 탄생한 작품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세계가 되고, 인간은 그 세계에 비굴하고 무기력하게 복종한다.
사회와 정치에서도 똑같다.
무력감의 중요한 특징은 사람이 특정한 기능을 하지 못하며,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무능함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이 나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으며 내 의지로는 세상이나 나 자신의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고, 아무도 나를 대우해주지 않으며 모두가 없는 사람 취급한다.
자신은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확신한다. 다른 사람을 통제할 수도, 자신이 바라는 일을 그들이 하게끔 만들 수도 없다고 확신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자신은 그럴 수 없다는 깊은 확신이 그 원인이다.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자력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어떤 부류는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자신은 그 결과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깊이 확신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불안에 대처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감탄할 만큼 뛰어난 재능이 자신에게 있는지 강박적으로 고민한다. 하지만 무력감 탓에 노력하고 일하고 배워 타인이 정말로 인정하거나 감탄하는 것을 생산해내지는 못한다.
그가 한탄하는 상황의 뿌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이다. 그 결과 열등감이 생긴다. 인정과 존중을 향한 욕망도 마찬가지.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지 못하므로 이런 사람의 자기감정은 과대망상과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기분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
무력감이 커지면 비판이 부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방어하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극단적인 경우 무력감이 너무 심해서 비판이 부당하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모든 비판이나 비난을 정당하다고 여기는 수준에 이른다. 자발적으로 모욕을 감수하는 것.
자신이 무기력한 이유는 신체적 결함 탓. 자꾸 아파.
특정한 인생 경험으로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서 모든 활동성과 용기를 빼앗겼다는 확신. 트라우마설
상상으로 문제를 자꾸 만들어 실제 상황이 절망적이기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심정을 납득한다고 느끼려는 성향
기적에 대한 믿음과 시간에 대한 믿음. 비논리적으로 그냥 믿고 싶은 마음
분주함. 근데 정작 해결해야 할 과제의 근본과는 관련이 없는 게 문제
통제하고 지휘하려는 노력. 악순환. 그 어떤 명령도 따를 수 없고 매사 불만인 사람
변하고 싶고 변할 수도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것은 다 기대해도 오직 하나, 변화를 위해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만은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제대로 하는데 촉각을 곤두세운다. 지시를 정확히 따르고 규칙과 규정이 많을수록 만족한다.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마법처럼 자신의 인성이 바뀔 거라 믿는다(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근본 문제를 바꿀 각오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숨기기 위함이다.
분석가 역시 그가 의식하는 직업적 낙관론 뒤에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에 대한 깊은 불신이 숨어있다. 정신분석의 의례를 정확히 지키는 것이 치료 과정의 요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이는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는 생물학적 무능력 때문에 무시와 멸시를 뼈에 새기며 자란다. 사디즘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성향의 배경.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은 아이건 아니건 진지하게 대접받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자기 권한으로는 아무것도 지시할 수 없고 이룰 수 없으며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느끼는 사람은 이런 무력감을 보상하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강하고 우월하다고 느끼려는 성향을 키운다.
독자적인 삶을 살아야 할 시점에 부모의 친절이 모든 원칙적 반항심의 발전을 가로막아 아이를 점점 더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배운다. 성공도 실패도 다 그의 책임이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의 재능, 근면, 에너지가 승패를 가르는 거대한 게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는 실제 상황과 극심하게 대비된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성인은 실제로 매우 무기력하다.
대다수는 현실에 순응하고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며 사회성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나중에 성공한 사람이 될 소수 집단은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성공을 원한다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인정머리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성공의 비밀을 ‘엘리트’의 자식들은 제때 찾아낸다. 다수의 대중은 이 비밀을 몰라야 한다.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부족한 깨달음과 무지는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며 그 무력함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동원해 절망적으로 저항한다 해도 결국 개인은 무력감을 인식하게 된다. 올바른 사회 이론과 개인에게 적용할 올바른 심리학 이론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무력감을 부르는 중요한 원인이다.
이론은 행동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