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 변호사의 원고를 윤문 하며 배운 글쓰기의 기본기
변호사가 직접 판례를 해설해 주는 LECTURE는 법률 미디어 <로웨이브>*의 핵심 콘텐츠이다. 변호사에게 의미 있는 판결문을 선정하고 사건의 쟁점은 무엇인지, 재판부가 어떤 근거로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살펴보고 깊이 있게 분석한다. 때에 따라, 변호사 본인이 직접 수행한 사건을 해설하며 생생한 당시의 소회를 나누기도 한다.
필진 변호사님들이 판례 해석 원고를 보내주시면 편집부에서는 윤문을 진행한다. 윤문이 자신 있는 영역도 아닌데, 판례를 해설하는 글을 윤문 해야 한다니…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가벼운 교정·교열 정도로 접근했다. 하지만 해설 원고를 곁들여 판례를 많이 읽게 되니 차츰 법률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면서 판례 해설 원고가 재밌게 읽혔다. 그리고 『법률가의 글쓰기』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논리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방식을 고민했고, 책을 가이드 삼아 적극적으로 윤문 하기 시작했다. 점점 윤문이라는 행위 자체에 관심이 생겼다. 편집자를 위한 책부터 글쓰기 책까지 다양한 책을 읽고 한글의 문법이나 기본기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판례 해설 원고를 윤문 하는 과정, 그리고 윤문이라는 행위가 적극적인 읽기와 글쓰기 생활에 어떤 변화까지 만들 수 있는지 소개하고자 한다.
*법률미디어 <로웨이브>에 대한 소개 글 : 온라인 법률 미디어 <로웨이브> 기획부터 창간까지
로웨이브 편집부가 필진 변호사님과 협업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단계: 변호사님이 판례를 선정한 취지와 판례의 의의를 염두하고 읽으면서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한다.
2단계: 사건의 사실관계와 주요 쟁점 등을 중심으로 이 글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일러스트 이미지 소재를 고민한다. 원고 내용과 일러스트화할 수 있는 소재나 장면을 작가님께 전달한다.
3단계: 원고 도착하면 교정·교열과 윤문 작업
4단계: 이후 피드백 다시 받고 확정
이 글에서 언급하는 부분은 3단계 초고가 도착했을 때의 교정·교열과 윤문 과정이다.
처음 변호사님들의 원고를 받았을 때, 전문가의 관점에서 쓰인 글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대야 할지 판단이 잘 되지 않았다. 우선은 ‘한글 맞춤법 규정’처럼 명백하게 답이 정해져 있는 어문 교정(校訂)과 문서 전체의 맥락에서 오류를 확인하고 검열하는 교열(校閱)을 진행하며 가독성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교정·교열·윤문의 사전적 의미
교정 校訂
남의 문장 또는 출판물의 잘못된 글자나 글귀 따위를 바르게 고침.
교열 校閱
문서나 원고의 내용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치며 검열함.
윤문 潤文
글을 윤색함(윤이 나도록 매만져 곱게 함).
맞춤법, 문장기호, 띄어쓰기 등을 확인한다.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한국어 맞춤법/문법 검사기에서 1차 검증을 하는데 교정 내용과 도움말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니 어떤 기준에서 잘못되었는지 원리를 알 수 있어서 공부하기 좋다.
도움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나무위키로 5언 9품사를 찾아보기도 하고, 문법과 맞춤법규정 전체를 확인해보고 싶어 책을 보기도 했다. 책 편집자들이 참고한다는 『열린책들 편집 매뉴얼』을 통해 한글 맞춤법 규정(띄어쓰기, 문장부호 포함), 표준어 규정, 외래어 표기법 등 궁금했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 350 페이지의 두꺼운 책이지만,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머리에 담지 못해도 각 규정에서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법률 문장에는 자주 반복되는 단어나 법률 용어에 대해 일반적인 띄어쓰기 원칙과는 다르게 붙여 쓰는 어휘가 많다(예를 들면 유류분반환청구, 임대차보증금, 헌법체계 등). 한글 맞춤법 규정에 띄어쓰기 규칙이 있지만 법률 문장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로웨이브>만의 띄어쓰기 기준을 마련하고 별도로 관리한다. 판결문에서 주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여 규칙을 세우고 있다.
지나치게 긴 문장은 단문으로 바꾸고, 주술 호응이 멀어진 문장 역시 이해하기 쉽도록 수정한다.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표현은 일관된 용어로 통일하거나, 인용된 판례가 법규정 등의 내용이 맞는지도 주로 확인한다.
더불어 매체 기준에 따라 평어체로 통일하거나 문단기호나 문자스타일 등도 정리한다.
2개월 정도 교정·교열을 하면서도 늘 ‘비전문가인 편집부가 어디까지 고쳐도 될까?’ 명쾌하지 않은 고민이 있었는데, 좋은 기준이 되어 주는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되면서 교정·교열뿐만 아니라 윤문까지 진행하는 2기를 맞게 된다.
로웨이브에서 ‘변호사의 글쓰기’ 특집을 준비하면서 접한 김범진 변호사님의 『법률가의 글쓰기』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논리적 글쓰기를 위한 ‘법률문장의 논리학’과 설득력 있는 글쓰기를 위한 ‘법률문장의 수사학’, 그리고 간결 명료하면서도 우리말다운 법률문장 쓰기를 위한 가이드를 명확하게 제시한 책이다. 또한 법률문장의 특징을 설명하며 좋은 글쓰기를 위해 자주 하는 실수와 개선 방향을 상세하게 표현해 주고 있어서 교정교열과 윤문의 기준점이 되어 주었다. 책의 내용을 발췌하여 자주 수정하는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한다. 법조인이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이들 누구나 적용할 수 있는 포인트가 많다.
그동안 쉽게 접한 적이 없는데 법률문장에서 유독 자주 보이는 어휘나 표현이 있었다.
‘~한 쟁점이 다투어졌다, ~함에 있어서, ~는 이유 없다, ~것인 바, ~있는지 여부, 그러하지 아니하다’ 등. 법률문장의 특징인가 싶어서 함부로 수정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었는데, 왜 법률 문장에 그런 표현이 많은지 그 이유를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대법원 판결문은 언제 판결문인지에 따라 문체나 사용되는 어휘가 조금씩 다르다. 반면 학생들은 법공부를 하면서 그런 점을 인식하지 않고 20~30년 전의 판결문도 읽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옛 판결문의 문체를 무의식적으로 배우게 된다. 오래전 판결문에는 그러한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
김범진, 『법률가의 글쓰기』 박영사. 9쪽
이러한 맥락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문장이나 표현 중에 바꾸면 좋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떤 표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실제 판결문의 예를 들어가며 하나씩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참고가 된 또 하나의 자료는 ‘어려운 판결문, 쉽게 풀어 읽기’라는 카드뉴스이다. 대한민국 법원에서 어려운 판결문 용어를 쉬운 단어와 간결한 표현으로 바꾸자는 취지로 만든 콘텐츠로 관습적으로 쓰이는 판결문의 용어를 쉽게 읽을 수 있는 표현으로 제안해 주고 예시도 들어 설명해 준다. 여기서 소개한 표현 중 자주 수정하는 항목들은 다음과 같다.
있는지 여부(與否) > 있는지 (의미상 중복되어 불필요한 경우 생략)
~에 한하여 > ~만 (조사의 의미)
상당하다 > 타당하다. 합리적이다.
일응(一應) > 일단, 우선, 한번, 어떻든
~에 있어서 > ~에서, ~ㄹ 때
~에 다름 아니다 > ~와 다름없다. 다르지 않다.
~에 터 잡다 > ~에 근거하다
성부(成否) > 성립여부(풀어쓰기)
존부(存否) > 존재여부(풀어쓰기)
금원(金員) > 금액, 돈
납득(納得) > 이해
부동의하다 > 동의하지 않다
당해(當該) > 해당(該當), 지시어 ‘그’
법률문장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 법률문장은 그 자체로 여러 복잡한 논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삼단논법뿐만 아니라 A→B→C→D 식의 연쇄논증, A+B+C→D 식의 병렬논증 등 복잡한 논리가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글에 그러한 복잡한 구조를 담다 보니 자연스레 문장이 길어진다.
김범진, 『법률가의 글쓰기』 박영사. 21쪽
대략 2015, 2016년을 전후로 대법원 판결문의 글쓰기 스타일이 상당히 바뀌었다. 국어학자들의 많은 비판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대법원도 더 좋은 글쓰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특히 대법원 판결은 과거와 같이 한 문단을 한 문장으로 쓰는 관행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김범진, 『법률가의 글쓰기』 박영사. 18쪽
문장이 길어지고, 나열 항목이 많아진 경우, 주어와 술어의 거리가 멀어져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경우는 두괄식으로 변경하여 결론을 먼저 언급하고 근거나 인용문을 분리한다. 근거가 나열된 경우 글머리기호나 원문자로 나열하거나, 인용문은 글박스를 이용한다.
법률문장에 고유한 특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필가들이 제시하는 글쓰기 일반원칙은 법률실무의 글쓰기에도 대부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 판결문의 문체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현대형의 간결, 명료한 문체로 쓰인 판결문이 많아졌다.
김범진, 『법률가의 글쓰기』 박영사. 9쪽
순전접속사는 대부분 없어도 된다
중언부언 : 전액 완납, 자의적 남용, 직접 대면, 다시 재론, 기간 동안, 있는지 여부
상태/상황/모습을 보이고 있다 > ~이다.
이 사건 (맥락상 헷갈릴 여지가 없다면 생략)
위와 같은
개인적인, ~것 같다 등
글을 쓰다 보면 거의 모든 경우에 활용할 수 있는 ‘특효약’ 같은 어휘가 있다. 적절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을 때 그 어휘를 사용하면 대략 의미가 통하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존재에 의존할수록 글의 수준은 떨어진다. 선명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김범진, 『법률가의 글쓰기』 박영사. 65쪽
좋은 글은 읽어서 이해될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읽어서 곧바로 이해될 수 있는 글이다. 읽고 나서 무슨 의미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야 한다면 좋은 글이 아니다.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해되는 글, 생각할 겨를 없이 이해되는 글이 좋은 글이다.
김범진, 『법률가의 글쓰기』 박영사. 65쪽
두괄식으로 표현하기
한자어, 일본식/중국식 표현은 쉬운 우리말로 바꾸기
‘부분, 대하여/관하여, 하는바, 이유 없다’ 등 추상적인 표현과 완곡 표현은 선명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바꾸기
이중부정은 긍정으로 바꾸기 (특별히 강조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지시어를 생각해야 한다면 길어지더라도 명확하게 다시 언급해 주기 등
그동안 가독성에 초점을 맞춰 교정·교열에 중점을 맞췄다면 이 책을 읽은 이후부터는 자신 있게 교정교열을 하고 필자의 의도를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윤문도 할 수 있었다. 저자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파악하고 그 의도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흐름이나 순서, 그리고 제목 등을 수정하기도 했다. 본문에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사건의 특징이나 변호사님의 개인적인 소회가 있다면 ‘글머리에’ 부분으로 강조한다. 그리고 정확한 사실 전달을 위한 제목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제안한다.
그동안 내 문장이 만연체라 이해하기 어렵다는 피드백을 자주 들었다. 핑계라면, 단문을 쓰고 싶어도 ‘다다다.’ 하고 툭툭 끊기는 느낌이 싫어서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글이 길어진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보기엔 장문이라도 이해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 하지만 장문의 최고봉 법률문장을 다듬으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한 문단이 한 문장으로 된 글을 보면서, 어디서 끊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한 문장에 하나의 의미가 담기고, 주술호응이 멀어지지 않도록 수정하면서 왜 그토록 글쓰기 책이 단문을 쓰라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나 두루뭉술한 표현을 정확하게 바꾸어주는 건, 법률가가 아니더라도 글 쓰는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자주 수정하는 항목을 보며, 흔히 놓치기 쉬운 점을 알게 되고, 글을 쓸 때 참고하게 된다.
어렵고 복잡한 쟁점을 다루는데도 술술 읽히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왜지?’ 이유를 찾으며 글을 구조적으로 분석하게 된다. 글 전체의 구조부터 문장의 구조까지 파고들어가 본다.
첫 번째, 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쟁점(메시지)을 하나만 다룬다. 하나의 사건에 다양한 쟁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해당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하면 글이 난삽하게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으로만 흘러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두 번째, 근거를 이루는 여러 문단도 비슷한 구조로 반복하면 예측하기가 수월해진다. 예를 들면 두괄식으로 결론을 먼저 제시하고 근거를 나열하는 형태라던지, 다양한 판례를 근거로 결론을 도출하는 형태라던지 무엇이든 하나의 형태로 통일해 문단을 반복하면 복잡한 논리구조라도 패턴이 익숙해져 이해하기 쉽다.
세 번째, 체언(명사/대명사/수사)은 짧고 용언(동사/형용사)이 긴 글이 쉽게 읽힌다.『열 문장 쓰는 법』이라는 책에서 저자 김정선은 "한국인은 체언 위주의 글을 구사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인생은 아름답다’라고 써도 되는 걸 ‘인생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쓰는 식이다. 대표적인 체언 위주의 글은 보고서, 용언 위주의 글로 연애편지를 예로 들며 읽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용언을 많이 활용하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당시에 책을 보며 내 글이 보고서처럼 몸통이 큰 가분수의 글이라고 느꼈었는데, 쉽게 읽히는 문장을 보면서 몸통은 작고 다리가 긴 글이 주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익힌다. ‘이런 구조로 쓰면 머리는 작고 다리가 길어지는구나’
인문학이나 소설을 주로 읽으면서 “글 = 문학”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설득하는 목적을 가진 글은 문학적인 글쓰기에 갇혀있던 나를 논리적인 글로 이끌었다. 글쓰기의 기본은 아름다운 문체가 아니라 우선, 독자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는 데 있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나에겐 문학적인 글보다 논픽션이라는 장르가 더 잘 맞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윤문의 나비효과라니.
글을 잘 쓰고 싶어서 글쓰기 책도 많이 읽고 써보는 연습도 했지만, 좋은 글이라 말하는 이상향과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 사이에 간극이 너무 커서 어떻게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야 할지 길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다듬으면서 너무 멀지 않은 중간 지점에 깃발을 세우고 거기까지 가는 징검다리를 놓은 느낌이다. 문법과 맞춤법을 공부하면서 기본기를 익히고, 글 쓰며 하기 쉬운 실수들을 반복 학습하고, 게으르지 않게 스스로 수정하고 다듬으면서.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저 많이 읽고 쓰는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윤문을 하면서 확실히 배운 점이 있다면 글쓰기에도 분명 정답이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 어법과 맞춤법에 맞는 글쓰기를 위해 공부하고,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글인지 연구하면서 적극적으로 많이 읽고 내 글에 적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저 별생각 없이 많이 쓰는 것보다는 확실히 개선되는 게 느껴진다. 많이 써보고 있지만 뭔가 정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양보다 질에 초점을 맞춰보는 시간, 기본기를 다지는 시도를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