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초안 제2화
입사 후 3개월의 연수 시절, 첫 1개월 동안은 패션회사 입사자만 따로, 이후부터는 전 그룹 신입사원이 연수원에서 합숙교육을 받았다.
보리가 입사한 K패션회사는 국내 패션회사 top 3 중 하나였고 채용과정에서도 눈에 띄게 높은 경쟁률을 보였기에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소속된 K그룹에는 듣도보도 못한 회사들이 많았다. 업계를 대표할만한 회사도 없어 보였다. 그 시절 그룹 연수에서 흔히 진행되는 회사를 소개하는 유치한 퍼포먼스에서도 다들 누군가가 지키고 있는 1등 자리를 빼앗겠다는 스토리로 가득했다.
보리는 거만하게 팔짱 낀 채 눈을 내리깔며 다른 계열사의 동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수원에서는 주로 계열사가 섞인 채로 조 단위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다. 조 과제에서 항상 목소리 크고 나서기 좋아하는 보리의 패션회사 동기들이 재주를 부렸지만, 이상하게 매번 결과를 발표 때는 그룹의 대표회사라는 제조부문의 사람들이 공을 가져갔다.
보리에게는 그룹의 대표회사인 제조부문의 K인더스트리는 그런 피해의식과 함께 기억되어 있었다.
연수원에서의 보리가 무시하던 제조업 사람들,
이제는 패션회사가 있던 건물에서 나와 그들과 한 건물을 쓰게 된다.
합병과 동시에 신설된 IR팀에서 보리는 패션부문의 IR을 담당했다. 제조부문과는 영원히 구분되어 일하고 싶었다.
섬유화학 소재, 비닐과 필름, 다양한 원사와 원단, 타이어에 들어가는 소재인 타이어코드나 방탄소재, 에어백 소재 등등 첫 IR 미팅 때 들어보니 어쩜 이리 하나도 모르는 소재들을 만들고 있는지...
그러다가 재무제표의 숫자를 마주하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자릿수를 여러 번 확인한다. 억 단위를 '~개'라 부르는 생소한 단위 개념도 신기할 뿐이다.
다양한 종류의 소재를 만들어 2차 제조사에 판매하는 B2B 사업은 패션업과는 구조적으로 많이 달랐다. 애널리스트들은 생산공장의 확장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신소재 연구는 어떻게 되어가는지 신사업은 어느 방향을 바라보는지, 소비 쪽 보다는 생산 쪽을 궁금해했다.
전부인 줄만 알았던 패션 시장은 이쪽에 비하니 작은 우물이었구나. 재미있지는 않지만, 그룹 입장에는 이 업종이 훨씬 중요하긴 할 것 같아.
IR은 업무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업종의 넓혀 계속 헤엄쳐 나간다.
문제는 공시였다.
패션회사에 있을 때 3개사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보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회사의 정기공시만을 담당했었다. 공시라는 것은 투자자들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를 회사가 알리도록 법으로 정한 제도이다. 법에서 정한 기준에 의한 사건이 생기면 정해진 곳에 신고하듯이 알리는 것이다.
공시가 골치 아픈 이유는 법으로 만드는 주체가 여럿이고, 그 주체에 따라 같은 사건도 기준이 다 달랐기 때문. 그저 복잡하고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 공시문서를 작성하는 프로그램만큼이나 고루했고 융통성이 없었으며, 프로그램 속 사용 가능한 폰트만큼이나 촌스러웠다.
주주들의 전화를 받는 일도 고역이었다. 투자는 자기 책임 아닌가. 회사에 전화해서 왜 주가가 빠지냐고 화를 내고 한탄하는 한심한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떤 날 받은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곧 터질 것 같은 빨간 풍선이 떠올랐다. 사장을 바꿔라 대표를 바꿔라, 한참 실랑이를 하더니 "내가 당장 너네 14층 사무실로 가서 보리 너의 목에 칼을 꽂아버리겠어!!" 펑!! 얼굴 앞에서 풍선이 터지기라도 한 듯 나는 이유 없이 울었다. 이 업무에 정을 붙일 수 있었겠나
또 하나의 문제! 두세 달이 지났지만, 이상하게 회사 속 사람들과 보리는 자연스레 섞이지 못한다. 스스로도 계속 이방인 같다 느낀다. 그럴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 나름 보리를 많이 배려하고 챙겨주었던 같은 팀 선임과의 트러블.
다른 계열사에서 공시를 담당하는 어떤 직원에게 전화가 걸려온 날이었다.
"각 사에서 각각 다 조사해야 하는 일인데, 대표회사에서 일괄로 공지하고 진행해 주시면 어때요?"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는 공지할 메일을 작성해 선임에게 보고한다.
"이런 일을 왜 보리 주임이 마음대로 결정해요? 이런 선례를 남기면 이게 앞으로 우리의 일이 되는 거 몰라요? 각사에서 다 알아서 하라고 해요! 공지하지 마요!"
"아... 네....."
합리적인 수준에서 내가 판단하면 안 되는 거구나. 선임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보리에게 맞서 싸울 용기는 없었다.
팀장님 포함 총 세명인 IR팀에서 어딘가 정 붙일 요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두 번째 사건.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주워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웃거리다가 옆 팀과의 저녁 식사자리에 따라가 본다.
기대만큼 생산적인 정보는 없고 잡다한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술자리가 싫어 더 이상 가지 않으려는데 옆팀 과장님이 자꾸 같이 저녁 먹자며 불러낸다.
"왜 야근하는 것도 아니면서 저녁을 회사에서 먹고 가세요?"
"집에 가기 싫어. 마누라는 잔소리하지. 얘들이랑 놀아줘야지 어휴~"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불쌍했다. 그리고는 그 사람과 더 이상 저녁 먹기가 싫어졌다. 이상하게 이곳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세 번째 사건은 경영본부 회식 날 벌어졌다.
1차 회식 후 노래방을 갔는데, 부장님이 갑자기 지갑을 꺼내며 처음 보는 행동을 한다. 만 원짜리 지폐를 노래방 TV에 붙인다. 와 신기하다. 정전기 때문인지 지폐가 텔레비전 화면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멘트.
"아! 아! 자 지금부터 여직원들은 한 명씩 춤을 추고 이 만원짜리를 한 장씩 가져가도록!"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혼란스러워 좁은 노래방에 울러 퍼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웅웅 거리는데, 옆 팀 막내 동생이 한마디 거든다.
"언니, 저거 택시비예요~ 얼른 하나 부르고 가져오면 돼요"
그때의 보리는 참 사회생활에 적응 잘하는 순응적인 사회초년생이었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그 자리에서 가방을 들고 나와 버렸다. 그날부터 공식 회식자리에서도 절대 노래방은 가지 않았다. 노래방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서 가라고 하는 팀장님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고리타분한 회사 너무 싫어,,,
그나마 주 2회씩이던 회식이 없고 대부분의 날 칼퇴를 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뿐이다. 덕분에 칼퇴 후 보리는 좋아하는 야구를 보면서 하루 두세 시간씩 러닝머신을 달리고 그렇게 난생처음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훌륭한 워라밸과 다이어트의 힘으로 1년 가까이 버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룹이 지주사 체제로 개편하는 해 지주사로 발령이 났다는 과장님과 오랜만에 저녁 식사 약속이 생겼다. 과장님은 패션회사에 있었을 때 보리의 사수였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게 되어 사람이 필요한데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누군가는 지주사로 가면 연봉이 올라갈 거라며 가라고 했고, 누군가는 일이 많아지고 힘들어질 텐데 괜찮겠냐 했다.
흠... 보리는 그저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보다는 낫지 않을까 기대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한다는 지주사라서 그런 권력욕에 가는 건 전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게 보리는 다시 본관 14층에서 이 건물의 주인이 쓰는 제일 높은 층 지붕 밑에 근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