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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Nov 19. 2020

목적을 생각하며 일하기 - 일의 기본기를 배우는 시간

브런치 북 초안 제3화

“금감원에서 이 서류를 제출하게 만든 이유가 뭘까요?”


보리가 지주사에 온 지 한 달 정도 된 어느 날, 보리를 살뜰히 챙겨주던 차장님이 휴가로 부재중인데 갑자기 공시해야 할 일이 생겨 부랴부랴 서류를 작성해 부장님께 결제를 받으러 간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는다. 

하라니깐 할 뿐인데 왜 하느냐는 질문이 귓구멍을 통해 들어오다가 어디에선가 턱 걸려 넘어졌다. 


“왜 회사의 임원이 주식을 사고파는 걸 회사에서 투자자에게 알리라고 할까?”

서류를 살펴보면서 혼잣말처럼, 마치 본인도 잘 모르겠다는 듯 다시 한번 질문이 이어진다. 정답을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 보리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다. 

“회사의 내부정보를 이용해서 시세차익을 노리는 걸 막으려는 목적으로…”

“그럼 왜 같은 내용으로 5%*도 하고 임원주요주주*도 공시하나?”

*5% : 지분 공시 중의 하나로, 정식 명칭은 주식등의대량보유상황보고서. 최초 공시 기준이 되는 지분율인 5% 라고 흔히 부른다. 

*임원주요주주 : 정식 명칭은  임원주요주주특정증권소유상황보고서, 너무 길어 임원주요주주라고 줄여 부른다. 

“5%는 회사 이름으로 나가는 공시이고, 임원주요주주는 임원 이름으로 나가는 공시인데… 왜 인지는…”

차이는 알겠는데 목적에 대한 이해는 없었다. 임원이 주식을 거래하면 두 가지 공시를 해야 한다고만 외워두고 있었다. 


"5% 공시는 적대적 M&A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어요. 누군가가 우리 회사 주식을 야금야금 사 모아서 우리보다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 경영권이 넘어갈 수도 있겠지? 서로의 합의 없이 강제적으로 경영권을 가져가려는 방식을 적대적 M&A라고 하는데, 시장의 투명성과 투자자 보호를 위해서 누구든 그 회사의 지분 5%를 넘게 취득하면 공시하도록 한 거지.

임원주요주주공시는 아까 보리 주임이 이야기한 것처럼 내부자 정보를 활용한 단기매매차익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제도고.."

“각각 두 개의 공시일 기준이 어떻게 되나요?”

“5%는 체결일 기준 5 영업일 이내, 임원주요주주는 결제일 기준 5 영업일 이내입니다.”

이번엔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렇지.. 5%는 체결만 되어도 주식에 대한 권리가 생기기 때문에 체결일을 기준으로 하고, 임원주요주주는 실제 돈이 결제된 날짜를 기준으로 하는 거죠”

아! 스스로가 바보 같아 차마 입 밖으로 감탄사를 뽑아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두 공시의 첨부자료도 달라져요.  5% 공시에는 주식 체결에 대한 내용만 증빙할 수 있으면 되고, 임원주요주주는 결제단가가 꼭 포함된 서류를 넣어야 하지. 우리는 귀찮으니깐 체결과 결제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긴 서류를 요청해서 그냥 그 하나로 두 개의 공시의 첨부서류를 갈음해 버리지만, 원래는 그래요.”


와… 감탄사를 연발하던 보리는 생각한다. 

'공시가 이렇게 과학적인 것이었나, 그동안 나는 왜 이걸 하는지 이해도 없이 단순 무식하게 일하면서 하기 싫다고만 생각해오고 있었네.'  

부장님은 줄줄이 칸이 나눠진 네모칸에 사인을 하면서 계속 말씀하신다.

“공시를 외워서 하려고 하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요. 어색하더라도 근거로 하는 법을 보면서 공시가 만들어진 배경을 이해하면 훨씬 쉬울 거예요. 예를 들면, 임원주요주주 공시에 대한 규정은 자통법에서도 불공정거래의 규제 편 아래 조항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걸 보면 아 이공시는 불공정거래를 막기 위한 거구나 라고 알 수 있는 거지”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복잡한 법은 들여다보기도 싫어서 해설서만 보면서 빈칸을 어떻게 채울지만 생각했다. 이 복잡한 것 빨리 해치워버리려고만 했을 뿐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부장님을 바라보는 보리의 두 눈에 존!경! 이라는 글자가 띄워졌다.

와 이곳은 뭔가 다르다. 나도 꼭 이렇게 성장하고 싶다. 나중에 누군가 후배가 생기면 이렇게 알려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두 분의 부장님이 주축이 되어 굴러가는 지주사의 경영관리실은 정말 스마트하게 일하고 있었다. 

차장님과 함께 소소한 일들을 실행하는 막내 직원인 보리 눈에 그들은 그룹의 크고 중요한 문제들의 답을 찾아내고야 마는 해결사들이었다.  


복잡한 문제로 회의가 길어질 때면 항상 왜 우리가 이걸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결하려고 하는 건지 다시 한번씩 상기했다. 치열하게 고민하여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 앞에서도 조급하지 않으며 멀리 내다보며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리더십도 탁월했다.

며칠 씩 야근을 하는 직원들이 있으면, 무슨 일 때문에 자꾸 야근을 하는지 확인하며 위로가 필요할 땐 위로를, 조정이 필요할 땐 문제 해결을 해주었다.


할 때는 하고 쉴 땐 제대로 쉬었으며, 단합이 필요할 땐 회식도 화끈했다. 심지어 이들은 가정에도 충실한 아빠들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리도 똑똑해져서 이들처럼 팀과 회사에 기여하는 직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이곳에 온 첫 해이니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막연히 그러고 싶다는 바람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회사의 만족도가 높아지며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다. 


6개월이 지나 맞은 새해 그리고 1분기.

상장기업의 경우 2월에는 주주총회를, 3월에는 1년간의 사업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사업보고서를 공시한다. 덕분에 1년 중 이 1분기가 가장 바쁘고 고되다. 3월 29일이 생일이 보리는 공시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 생일 당일에 케이크 대신 200페이지짜리 서류를 뽑아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검토하고 또 검토하고, 그렇게 그 주간은 매일 사무실 불을 끄고 퇴근한다. 힘들지만 본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차장님과 부장님들은 그 바쁜와중에도 꼭 책거리를 해야 한다며 고생했다고 토닥여주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우리 보리 주임이 처음으로 책 만들어낸 날이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공시가 잘해야 본전인 지랄 맞은 일이지만, 우리도 상무님도 다 공시 업무를 해본 사람들이라 이게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 그래도 보리 주임이 와서 잘 해내고 있어서 대견하고.." 

본인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자주 상기시켜 주며, 잘하고 있다고 칭찬까지 해주시니 그동안 혼자 야근한 시간을 보상받는 느낌이다. 다음에는 더 잘 해내고 싶고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주사에서 처음 경험해보는 전쟁 같던 1분기가 끝나고 보리는 밀린 생일파티를 즐겼다. 인생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충격적인 사건이 다가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지나가는 짧은 봄을 만끽하며 4월을 후회 없이 즐기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차장님의 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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