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 Bori Nov 23. 2020

차장님의 빈자리

브런치북 초안 제4화


곧 점심을 먹으러 나가야 하는 시간인데도 사수인 차장님이 출근을 하지 않는다. 전화도 안되고… 아프신가? 집에 일이 있나? 일하다 빈자리를 힐끔거리며 잠시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오는데 부장님이 결제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회의실로 오라고 하신다. 부장님은 서류도 한 장 없는 책상 위에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고 두 손에 머리를 파묻고 계셨다.

‘무슨 일이지? 차장님도 안 계신데 복잡한 일이 생겼나? 계열사에 사고가 생겼나? 상무님에게 무슨 일이 있으신가?

엇.. 혹시 차장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찰나 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온다.


“보리 주임… 이 차장이 오늘 아침에 심장마비로…”


부장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라고 묻고 싶었는데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설마 했고, 침묵이 대답을 대신했다. 한참을 아무 말이 없이 앉아있었다. 방음이 안 되는 회의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지금 장례식장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오늘까지 꼭 해야 하는 일들 있나?"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이야기하고 있는 부장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어서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다.

“... 오늘... 대출이자 지급이랑 자금이체 건 있어요. 차장님이 안 오셔서 결제를 못 받았는데…”

“그럼 보리 주임은 그거 처리하고 오후에 넘어와요. 우리는 먼저 가있을게.”

“네…”

그날 차장님의 결제 칸에는 代 라는 글자와 함께 부장님의 사인이 남았다.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온다. 옆팀의 대리님이 울고 있다. '내가 차장님이랑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나도 지금 눈물이 흘려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나 들뿐.. 이상하게 실감 나지가 않는다. 오늘내일 뭐해야 하지? 급하게 공시할 일 생기면 어떡하지 하는 류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뿐이다.


자리에 앉아서 할 일을 처리하고 오후 늦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착하여 장례식장 입구에 웃고 있는 차장님의 사진을 보니, 그리고 빈소를 지키고 있는 차장님의 어린 아들을 보니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다가 정신이 들어 스스로를 다독이려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울음을 참아본다.

허탈하고 어이가 없는 건 모두에게 똑같았기에 장례식장을 찾아오는 사람마다 눈물바람이었다. 차장님과 보리가 1년여 동안 함께 한 팀으로 일했던 패션 재무팀 사람들이 왔을 때, 친정엄마 품에 안긴 듯 엉엉 울며 쏟아냈다.

그날 보리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음날 다시 회사로 출근을 했다. 평소와 같은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다시 장례식장을 갔고, 차장님과 함께였던 사람들을 보며 울었다. 다음날도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니 몸안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났다. 일요일 오후였다.


내일 출근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너무 막막했다. 당시 차장님과 보리는 지주사의 자금관리와 공시/IR을 함께 담당하고 있었고, 보리는 차장님의 모든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공시와 IR은 부장님들이 계시니 걱정되지 않는데, 자금관리는 막막하다. 부장님들 중에서 자금관리를 해보신 분들이 없다. 지주사가 그동안은 하나의 회사가 아니었기에 살림살이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 분이 없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졌다. 어린 보리는 본인이 문제없이 해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일요일 저녁, 불안한 마음이 주체가 안되어 무작정 사무실에 나갔다.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불을 켜고 자리에 들어오는데 차장님 책상 위에 하얀 인형 같은 게 올려져 있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국화 꽃바구니가 올려져 있었다. 괜히 무서워졌다. 차장님의 영혼이 의자에 앉아있을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자리에 앉아서 자금수지 파일, 차입금 관리 파일 등등 자금과 관련된 모든 파일을 확인한다. 차장님 자리에서 관련 서류도 모두 찾아 꺼낸다. 소름 돋는 와중에 일을 하겠다고 앉아있는 스스로가 제일 소름 돋는다고 느끼면서...

차장님이 정리해놓은 파일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차분하게 공부할 마음의 여유가 없고, 빨리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일단 회사 계좌의 입출금 내역을 모두 확인한다. 1월부터 4월까지의 모든 통장 내역을 살펴보고 자금 입출금 내역을 분리해서 월별로 정리한다. 4월의 마지막일이 포함된 다음 주와 5월의 회사 자금 내역을 하나씩 정리한다. 순수지주회사라 다행히 입출금 내역이 많지는 않다.

A4 용지를 벽에 붙여가며 매월의 흐름을 정리하고 보니, 차장님이 관리하던 월 자금수지 파일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보리가 해야 할 일을 중심으로 새로 파일을 만들고 하루하루의 지출내역과 입금내역, 그리고 월 흐름을 파악하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진다.

이 정도 정리했으면 다음 주 하나씩 꼼꼼하게 살피면 될 것 같다.

국화꽃은 외면한 채 불을 끄고 사무실을 도망치듯 나왔다.


다른 듯 같은 하루가 시작되는 날, 부장님들은 차장님 후임으로 누구를 추천하는지 물었다.

"공시와 자금을 다 해본 사람은 그룹에 없어서 자금 담당자로 한 명을 충원하려고 해. 공시는 O부장과 보리 주임이 담당하면 될 것 같아서. 자금 담당자 중에 J과장, H차장, K과장.. 정도 있을 것 같은데, 누가 제일 좋겠어?"

"가장 좋은 건 J과장님이지만 J과장님을 지주사로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아요. 그분이 빠지면 거기도 큰 공백이 생길 테니.. 그리고 J과장님이 아니라면 그냥 누구든 빨리 오실 수 있는 분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 L과장님만 빼고요"라고 덧붙였다.


초조하게 치러지는 매일의 하루가 보리에게는 지옥 같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어찌어찌 혼자 마감도 하고, 1분기 보고서도 공시하고, 처음 해보는 지주사 대표 공시도 준비하면서 그렇게 무한 야근과 함께 하루하루를 치러내고 있는데 차장님의 자리는 아직도 빈 채였다. 두 사람이 하던 업무를 혼자 한 달이 넘게 하고 있는데, 심지어 3년 차 주임 나부랭이가 차장이 하던 일을 같이 하고 있는데, 왜 사람을 안 뽑아주는 거야!

상무님 방을 찾아갔다.

"5월 말은 1년에 한 번 하는 공정위 대규모기업집단현황공시도 해야 해서 물리적으로 시간이 너무 부족한데, 저 혼자는 도저히 이렇게 다 못하겠습니다. 이러다가 업무에 구멍이 날 것 같아요. 빨리 선임을 뽑아주세요."

당차게 말을 꺼냈는데, 못하겠다는 단어를 내뱉으면서 설움이 복받쳐 꾸역꾸역 참던 방울이 또르르 흘러버렸다.

정말 진지하게 말했는데, 상무님은 어린이를 쳐다보는 눈으로 쓰윽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힘들지. 거의 다 됐어. 보리 주임이 제일 좋다고 했던 J과장 데려오려고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보리가 잘 버텨주고 있으니깐 우리도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사람 데려오려고 하는 거니까 조금만 버텨보자. 응?"

"네..."


그렇게 전쟁 같은 5월이 지났고, 차장님의 자리에 J과장님이 왔다.



다음 이야기 

지주사에서 공시담당자가 하는 일 



작가의 이전글 목적을 생각하며 일하기 - 일의 기본기를 배우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