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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Dec 17. 2020

지주사에서 공시담당자가 하는 일

브런치북 초안 제5화

J차장님이 오시고 자금은 짐을 덜었다. 물론 든든한 두 분의 부장님들이 계시지만 두 분은 원래 하시던 일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니 공시는 어느 정도 본인이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다.


보리 주임 자산매각 공시 조건이 뭐지?

계열사에서 공장을 추가로 짓는다는데 이거 공시해야 하나?

계열사 IPO 프로젝트를 위해 교육을 받고 와요.


책임감이 밀려왔다.

두꺼운 공시 해설서 몇 권을 손이 닿는 곳에 쌓아두고 내 것으로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책상에 앉아 끊임없이 책장을 넘기는 사이 창 밖으로 사계절이 지나가는 시간.


성격에 따라, 시점에 따라 공시를 구분하고 공시처에 따라 어떤 공시들이 있는지 각 공시의 목적이 무엇인지 숙지한다. 수시공시의 경우는 회사에 어떤 이벤트가 생기면 공시를 해야 하는지 반복적으로 외워두고, 공시 기준은 따로 정리해 붙여놓는다. 자주 헷갈리는 것들도 그때 그때 표로 비교해 추가한다.

정기공시의 경우 분기마다  중요한 부분들을 하나씩 하나씩 수정하고 보충해 나가는 시간의 반복을 통해 빈약하던 부분들을 계속 개선해 나간다. 오래 살아가면서 내 집을 조금씩 보수해 나간다는 느낌으로..


점점 공시가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운전도 할만하다고 느낄 때 사고를 조심하라 했던가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사고의 시간이 찾아왔다. 금감원에서 과거의 공시를 점검하며 누락/지연 내역을 확인하는 전화를 처음 받았던 날을 보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익숙한 발신번호로 온 전화. 두 건의 공시의무가 발생했으나 한 건을 누락했으니 경위서를 제출하라. 누락이라는 단어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경위서라는 단어에 머리카락이 쭈뼛서는 순간을, 금감원 담당자는 따분한듯 그렇게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계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책을 휘적이며 실수를 내손으로 확인하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자괴감과 함께 역시 나는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는 부정의 단계를 거쳐, 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부장님들과 상무님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고 죄송하다.


잔뜩 풀이 죽어 상무님께 보고를 하던 날, 조용히 내용을 다 들으신 상무님이 말했다.

"보리, 지금 그 보고서에 결제라인이 어떻게 되나?"

"대표이사까지 입니다."

"아니 그 전에는?"

그 전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 굳이 왜 물어보는 것일까 의아하다.

"제가 부장님께 결제받고, 상무님께 결제받고 그리고 대표님께..."

"그 칸에 매번 공시할 때마다 사인을 받는 건, 사인을 하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겠다는 표시야."

"공시 누락이 생겼다는 건 거기에 사인하는 사람들이 보리가 작성한 내용 중에 빠뜨린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하는 역할을 못 한 거야. 죄인이 된 것처럼 그럴 필요 없어. 이 큰 회사에서 누가 주임에게 이런 책임을 묻나. 다만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잘 확인해서 다음에 또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만 하면 되는 거야. 응? 알겠지?"

좀처럼 마음속의 따뜻한 말은 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장 이미지인 상무님에게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갑자기 딴 사람이 된 듯 말씀하시는 상무님이 어색했지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했고 더 죄송해졌다.

같은 날, 퇴근하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책상 구석에 쪼그라진 보리를 보며 본인들의 공시 뽀시래기 시절 실수담을 늘어놓으시는 두 부장님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위로 중이었다.

역시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그만큼 책임감에 무거워졌다. 이 감사한 분들이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공시담당자가 되고 싶다!


경영학 수업을 듣던 시절 법은 쳐다도 보기 싫어 상법도 들춰본 적이 없는데, 팔자에 없는 고시생이 되었다 생각하고 자통법, 상법 등 조그만 글씨가 빽빽한 법률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은 익숙해진 공시 건이 생길 때마다, 해설서보다 먼저 법률의 관련 조항을 모두 읽고 어떤 공시에 어떤 내용을 포함하여 작성할지 정리한다. 그리고 정답을 확인하듯 해설서와 비교했다.  


지주사에 있다 보니 서른 개가 넘는 계열사들의 이슈도 모두 체크해야 했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많은 공시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유사한 단어가 복잡하게 얽혀있던 조문의 구조가 정리되었다.

처음 경영관리실에 왔을 때 부장님이 했던 질문, 왜 이 공시를 할까?라는 질문을 떠올리며 내가 이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니 각 법률의 흐름이 머릿속에 지도처럼 살포시 그려졌다.

이제는 무슨 내용을 확인하려면 어느 법률의 어느 부분을 찾으면 될지 대략 파악이 되었다.


아마도 그즈음부터 인 것 같다. 부장님이 이제 대표님 결제도 보리에게 직접 들어가라고 말한 게…

이제 믿고 맡길 정도는 된다는 인정을 받은 듯하여 성취감이 몰려왔다.


그 사이 보리 주임은 대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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