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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Dec 13. 2020

음악 속에 켜켜이 포개어진 과거의 나에게서 충전

밑미 온라인 리추얼 -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최근에 읽은 유병욱 작가의 <평소의 발견> 


책에 등장했던 카피 중 '노래는 현존하는 최고의 타임머신'이라는 표현이 무의식에 깊이 새겨졌던 듯하다. 당시 책을 읽다 말고 글로 묘사된 음악들을 찾아 감상했던 기억이 해거름 따뜻한 햇살처럼 기억에 남았다. 


이런 무의식의 끌림이었을까, 믿고 보는 취향을 가진 사람의 추천 때문이었을까

모두 다 하고 싶었던 밑미 온라인 리추얼의 여러 프로그램들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막상 결정은 충동적으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를 신청했다.


첫 2주간은 아침에 음악 한곡을 집중해서 듣고 10분 동안 음악과 감정을 기록한다.

출근 전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음악을 듣고 글을 써보겠다는 다짐은 작심삼일보다 빨리, 단 이틀 만에 깨졌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보며 음악을 듣고 노트에 손글씨를 쓰는 상상 속의 나는, 출근길 지옥철 사람 사이에서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 메모장에 글을 쓰고 있었다.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 효과에 감사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최근 2년 정도, 나에게 출근길은 하루 사이 잔뜩 찬 이메일과 SNS에 그득한 각종 새로운 정보들을 머릿속에 흘러넘치게 부어 넣어 주어야 하는 시간이다. 가장 정신이 말똥 할 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털어 넣어 주었다.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생각을 하다 보면 1시간이 훌쩍 흘러가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더 일찍 일어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물을 주는 것을 포기했다. 잠시 내려놓고, 나의 선택을 우선하기로 했다.


그렇게 2주간 음악으로 출근을 했다. 어느 날은 음악이 존재도 잊고 지내던 나의 과거 SNS로 인도하기도 했고, 감명 깊게 읽었던 소설책으로 연결되어 출근 전 잠깐 꿈을 꾸고 최면에서 풀리듯 깨어나는 듯한 경험도 했다. 신기하게, 어쩌면 당연하게도 정보의 인풋은 줄어들었는데 생각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바지런하게 뭔가를 읽고 배우며 가득가득 채워 넣어도 항상 부족하다 느껴져 동동거렸는데, 음악을 들으며 갖는 잠시 멈춤의 시간은 주변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게 만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즘, 일을 할 때도 대화를 나눌 때도 어디서 들어본 듯한데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막상 할 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진짜 알맹이는 모르는 겉핥기. 최근 나는 그랬다. 그동안 쉬지 않고 불안한 마음에 욕심만 앞서 보내왔다. 이직을 하는 과정에서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고, 외부적인 탓도 있겠지만 올해 여행을 다녀온 적도 없었다. 쉬지 않고 물을 주니 숨을 쉬지 못해 곧 뿌리가 썩어버릴 지경이었다.


마음으로 빛과 바람이 통하니 오히려 회사 생활도 안정되어갔다. 월요일 아침 회의 시간에도 고슴도치처럼 온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유하게 팀의 분위기에 숨을 불어넣어주고, 힘들어하는 팀원들을 위로해 주고, 내가 도와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



3주 차부터는 저녁시간에 리추얼이 이어졌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음악을 듣는 시간은 램프의 지니가 보물상자를 열어준 느낌이었다. 집에 가만히 앉아서 온전히 음악에 집중하니, 마음이 그렇게 풍요로워질 수가 없었다. 아티스트라도 된 냥, 영감이 퐁퐁 샘솟았다. 쓰고 싶은 글도 정신없이 적고, 그 음악이 인도하는 나의 과거와 마주하며 추억놀이를 했다.


존경하는 아이유가 그랬다. 작사를 할 때 과거의 자기 일기장에서 글감을 찾아서 활용한다고, 본인은 과거의 나를 꺼내 먹고 있다고... 음악을 듣고 매일 짧은 글을 쓰는데 나의 과거를 먹고 산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음악을 들으며 떠오른 나의 과거를 풀어 글을 쓰고 있었다. 남이 만든 남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구겨 넣는 게 아닌 내가 만들어낸 나의 창작물을 짧게나마 하나씩 만들어내는 게 뿌듯했다. 개인적인 감정과 흐름이 맞아떨어졌고 너무 행복했다. 


감정이 풍부해져서 저녁시간 거실의 백색 형광등 대신 노란 조명을 갖고 싶었고, 블루투스 스피커도 갖고 싶어 졌다. 그렇게 '더 스피커'가 내게 왔다. 내 집 마련을 위해 영혼까지 모아보겠다며 애쓰다가 오랜만에 소비를 하니 간만에 피가 거꾸로 도는 느낌이다. 역시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이 시즌 함께 읽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에 나왔던 문구처럼,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생각나지 않으니 나는 행복했다. 


밑미 온라인 리추얼을 통해 내 채널에도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고, 조금 충동적이었지만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엄마의 환갑 기념 속초 여행도 다녀왔다. 엄마가 행복해 한 만큼 또 내 마음은 풍요로워졌다.


더 시간이 지나 과거가 될 지금의 나를 꺼내먹을 수 있게, 물만 잔뜩 부어 넣지 않고, 햇빛도 쏘이고 바람도 씌워주고 음악도 들려주고 그렇게 살자.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와 함께한 음악과 글 


11/9 

Merry Christmas Mr.Lawrence - 류이치 사카모토 

일요일 오후 오랜만에 BGM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듣던 중에 귀를 사로잡는 멜로디에 머릿속이 간질거린다. 아!! 이거 내가 아는 건데, 엄청 좋아했던 음악인데… 뭐더라…  기억 처리 속도를 기다리지 못하고 제목을 확인해버렸다. 

그렇게 좋아했던 음악을, 아무리 오랜만이라 해도, 제목도 기억을 못 하다니 ㅠㅠ 아니 그의 음악이라는 것을 기억 못 하다니,,

첫 음악은 이걸로 해야지! 

3년 전쯤엔가 새로운 공간을 보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알게 된 류이치 사카모토. 

전시장의 공기도 좋았고, 5:5 가르마의 빛나는 백발을 흩날리며 연주하는 그의 외모도 인상적이었다.

감성적인 음악도 좋았지만, 그보다 그의 삶의 태도가 존경스러웠다. 유연한 그의 태도와 열린 마음이 각인되었다. 

집에 돌아와 검색해 그의 연주 영상을 보면서 작업에 온 힘을 집중하면서도 연주하고 행복해 보이는 그 웃음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 미소가 오버랩되며 소리에 더 의미부여를 해주었을지도..

묘한 긴장감이 도는 가늘고 조심스러운 피아노 소리, 자학하듯이 자꾸 듣고 싶은 불협화음 소리, 그러다 마음이 차르륵 가라앉는 첼로 소리.

이상하게 이 음악을 들으면 내가 보았던 어느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만난 듯한 한 장면이 떠오른다. 벚꽃이 흩날리는 어두운 밤 사무라이의 쓸쓸한 뒷모습 같은 거...

아 소년 같은 백발 할아버지의 미소 

그처럼 유연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고 늙고 싶다.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며 출근하니 월요일 아침이라도 좋네


11/10 

Flower Face - Angela

처음 들어 본 음악인데 보드랍게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라 집중해서 처음부터 다시 듣기로 한다.

Daylight,으로 시작하는 노래에 자연스럽게 창밖을 멍하니 보는데 햇빛이 아파트 벽을 스팟라이트처럼 비추면서 어느새 밝아지고 있는 이 공간과 노래가 연결되는 된 것 같다.  

무슨 뜻인지 잘 안 들리는 가사지만 괜히 일상의 소소한 것들도 소중히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을 것 같은 느낌, 나른하지만 단단한 느낌.

가사를 보니 너무 애절한 노래였다. 하지만 왠지 조제처럼 강할 것 같다.

음악 끝의 멜로디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11/16  

Si Tu Vois Ma Mère - Midnight in Paris

어제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두고 청소를 하다가 이곡을 듣고는 영사기 이미지와 함께 시네마 천국이 떠올랐다. 제목을 확인하려다 파리의 풍경에 넋 놓고 서서 3분 동안 행복한 파리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출근길에 마을버스를 놓쳐서 마음이 조급 해지는 아침이었는데 종종거리기 싫어서 이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어제 봤던 평온한 파리가 기억에 남아서인지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집 앞의 평범한 풍경이 다 평온해 보인다. 공사 중인 포클레인까지도 ㅎㅎㅎ

지각할지 모르겠지만 출근하는 한 시간 동안 마음이 말랑해져서 오늘 아침은 행복하다.

내내 너무 신기한데 이 음악의 소리에 한 1950년대쯤의 이국적인 풍경이 떠오르는 이유가 뭘까 


11/17 

돌이킬 수 없는 걸음 - 이병우

싸이월드 시절 내 미니홈피의 최대주주였던 음악 

그 시절에는 독특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에 설정해두었던 것 같은데, 이 음악에 자주 공허해지고 인생무상을 느꼈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려는 한동안은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올해 봄, 엄마와 을지로 데이트를 즐기고, 빈대떡을 사 와 막걸리와 함께 즐기고 있었다. 

밖에서 음악소리가 들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문득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본 공지가 기억났다. 아 오늘 은행나무 앞에서 테라스 음락회를 한다고 했지. 오케스트라라는 단어에 피식 비웃었었는데 나름 알찬 관현악 소리가 들려온다.

창문으로 가을바람과 클래식이 춤을 추며 들어오고, 엄마는 막걸리에 빈대떡을 먹으며 천국 같다 했다. 

그러다 익숙한 멜로디에 잠시 멈췄다. 외롭고 쓸쓸하다 느꼈던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노래였다. 계절 탓인지 노랫소리에 초록의 기운과 수분크림 광고마냥 촉촉한 기운이 가득했다. 음악이 너무 좋아 영상도 남겼다. 봄날 엄마와 함께한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은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몽글몽글했다. 20대의 불안과 공허의 상징이었던 이 노래는 10년 후 따뜻한 봄기운으로 풍성해졌다. 

한 곡이 여러 번 변주되며 여러 번의 계절, 기분의 변화, 인생사를 담은 느낌이다. 

그날의 브이로그를 만들었던 것 같아 찾아보니 있다! 아 좋다 :) 


11/18

환상곡 - 에피톤 프로젝트 (vocal. 선우정아)

아직 새벽도 오지 않은 것 같은 비 내리는 깜깜한 아침

어제저녁 어쩌다 옛날 사진을 찾게 되어 페이스북에 오랜만에 로그인을 했다. 찾는 사진이 2011년에서 13년 어디쯤일 것만 같고 기억이 가물가물해 편안한 마음으로 쭉 내려봤다. 2014년까지는 거의 포스팅이 없어 자주 듣던 음악의 앨범 재킷 이미지만 잔뜩이다. 맞다 이때 내가 에페톤 프로젝트도 브로콜리 너마저도, 선우정아 음악을 무지 좋아했었네…

2013년을 7~8년 전의 회사생활과 연애스토리가 적나라하게 적혀있는데, 이전엔 부끄러워 차마 쳐다보지도 못했을 글들을 읽고 있자니 그때의 내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당시엔 전부였고 치열했던 잊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상기되어 좋았다. 오히려 솔직한 기억이 없는 이후의 시간이 아까워... 일기를 잘 기록하여 남겨둬야겠구나 하는 생각

뭐 이런 생각을 했던 어제의 기억에 여유로운 아침에는 선우정아가 노래한 에피톤 프로젝트의 환상곡을 계속 반복해서 듣는 중이다. 멜로디는 경쾌한데 가사는 아린 이런 노래가 좋다. 담다디 같은 느낌.. 

집 안에 있는 날은 비도 너무 좋다.


11/19 

Seasons of love

오래전 보았던 뮤지컬 렌트의 흐릿한 장면들이 그려지는 음악, 그리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알토 파트의 멜로디 

마냥 밝고 유쾌한 희망적인 뮤지컬만 보다가 어두컴컴하고 뭔가 모르게 심오한듯한 내용에 있어 보이는 좋은 공연이었다 정도로만 기억한다. 오랜만에 다시 듣는 노래에서 팍팍 꽂히는 가사에 다시 뮤지컬의 줄거리를 찾아보게 한다. 이번 주말엔 렌트를 다시 봐야지~ 지금의 내가 보면 왠지 무지 좋아할 것 같다. 

문득 요즘은 글을 쓰면서 계속 과거의 나를 열심히 빼먹고 있다는 느낌이다. 요즘은 거의 집과 회사를 반복하며 음악 듣고 책 읽고 계속 글만 쓰는 것 같다. 더 먼 미래에 지금의 나에게 빼먹을 게 있을까?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시간은 적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많이 배우고 성장하고 있을 거다.

올해의 파이브헌드레드투웨니파이브다우전드식스헌드레드미닛은 열심히 열심히 기록으로 채워가는 새로운 전환점의 한 해가 되기를 :) 


11/23 

Aruarian dance - Nujabes

재무팀에서 일하다가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하겠다고 발버둥 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어느 날, 

빨리 잘해 보이고 싶은데 생각보다 힘들었고 모르는 것도 많아서 다리가 찢어질 것 같은 시간 

강남역에서 차장님과 어느 잡지사 편집장님과의 미팅 중에, 다음 공간을 이러이러하게 만들어보자는 논의를 하는데, 누자베스 이야기가 나왔다. 이 때는 정말 대부분의 미팅과 회의 때 모르는 용어와 단어를 적는 초라한 시간을 지나던 때였는데, 음악이야기로 차장님과 이분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둘이서 달나라를 떠났고 나는 모르는 단어를 다 적을 수가 없었다. 누자베스에 시부야케이에… 둘은 신나 이야기를 하다가 감상에 젖은 듯했다. 캬~! 캬~! 해가면서… 그날은 누자베스의 날이었다.  

일도 초보인데, 취향도 안 받쳐주는구나 한숨을 쉬고 무거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누자베슨가 뭔가나 함 들어보자며 검색해서 음악을 들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듣는데, 어둠 속에 반짝거리는 불빛들 속에 사람들이 내가 있는 버스 안 공간과 분리되면서 영화같이 느껴지고 쫀득한 기타 소리는  슬프면서도 따뜻하고 아련했다. 외로우면서도 위로받는 것 같은 묘한 매력이었다.

한동안 빠져서 이 음악을 자주 듣지만, 이상하게 지치고 힘든 노곤한 느낌의 어두운 시간에만 그때의 그 기분이 느껴진다. 오늘 같은 치열한 월요일을 마친 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많이 힘들었다. 지금의 올해의 내가 못나고 부족한 게 아니다. 그러니 힘을 내시오. 또 잘 해낼 것이니 

옛날의 나에게 위로받는 요즘이라니 :)


11/25 

I fall in love too easily - Chet Baker

오늘 융님의 SIDE 뉴스레터에서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맞아 쳇 베이커의 계절이 돌아왔어!!

날씨가 쌀쌀해지고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면 듣는 음악, 나에게 캐롤같은 음악이랄까 

문득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은은한 조명과 음악에 케이크와 와인과 함께 한 해를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참 안 하는 짓이지만,,

나는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다. 왜일까, 일단 기념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그 기념의 과정이 부산스럽고 요란해 보여서~

음력이라는 핑계로 부모님의 생일도 잊고,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내 생일도 할인쿠폰과 함께 날아온 문자로 인지하기도 하고, 남편의 생일, 결혼기념일도 자주 잊어버린다. 심지어 남편 생일과 결혼기념일은 연달아 있는데도

어쩌면 내가 기념일을 챙기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건 기념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 대한 면피 같기도 하고 솔직하게는 쿨해 보이고 싶었던 심리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게 소소한 날들도 모두 기념하고 싶다. 요란한 서프라이즈나 이벤트가 아니더라도 맛난 밥을 먹으며 그때를 생각하고 지금에 감사하고, 하루하루를 기념하며 살아가고 싶다. 

요 근래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며 예전의 나에게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니 매일의 추억이 소중해졌다. 매일에 의미 부여하며 열심히 살아가 보고 싶다 :)


11/26 

The Great Pumpkin Waltz - It's The Great Pumpkin, Charlie Brown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 리추얼을 하면서 삶의 여유가 생긴 느낌이다. 

2년 정도 된 것 같다. 음악을 듣지 않은 게 

출퇴근하는 길에도 생산적으로 시간을 써야만 할 것 같다는 압박에 온라인 강의도 듣고, 책도 읽고, 퍼블리, 북저널리즘도 읽고 뉴스레터도 읽고… 정말 부쩍 눈이 나빠졌다 느껴질 만큼 자꾸 머릿속에 정보를 쏟아부었다. 

한 달 전, 밑미 온라인 리추얼을 신청하는 날

신청하고 싶은 게 5개나 되었는데 유난히도 플레이리스트가 끌렸다. 혜윤님과 예시님의 이미지가 띠용 떠오르면서 훅 신청했었던 듯하다. 아마도 그날의 끌림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을 나의 무의식이 픽한 게 아니었나 싶다. 몸에 어떤 영양소가 부족할 때 그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 땡기는 것처럼 

플루트의 왈츠를 듣고 있자니 목욕탕 뜨끈한 물어 들어간 듯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피너츠 만화도 보고 싶다. 세상의 다양한 맛들을 다 즐기며 살 테다. 

낮은 플루트 소리 너무 좋다. 영상에 흐르는 고스트도 너무 사랑스러워 


11/27

Mild Orange - Freak In Me 

일주일간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친구를 만났다. 지쳐 보이는 친구의 밀린 일주일치 회사 이야기를 듣자니.. 나만 죽겠는 줄 알았는데 너도 새까매졌구나 싶다. 나만 내 안에 암세포를 키우는 줄 알았는데 너도 그랬구나 하며 토닥인다. 암세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음 건강검진은 대장내시경도 해야겠다며 이왕이면 날짜를 맞춰보자 한다. 그러다 문득 둘 중 하나가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 거냐는, if로 시작하는 우리의 시나리오 시간이 시작된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역시나 결론은 올해의 우리의 유행어로 마무리한다 : 고성에 가서 살자

버스에서 내려 집에 가는 길 치킨 냄새에 서로 통한 듯 눈을 맞춘다. 

치킨 봉지를 들고 15층에 도착했다. 집 앞에 놓인 두 개의 택배 상자를 사이좋게 나눠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치킨을 맛나게 뜯고, 신서유기를 보면서 배꼽 잡고 깔깔거린다. 잠자기가 아쉬운 눈에 들어온 택배 상자!

나는 주말부터 읽을 세 권의 책을 보며 행복하고 친구는 게이밍용 조명을 설치하며 행복하다. 

행복이 뭐 별건가

금요일이 행복이다.


11/30 

The Marías - We're The Lucky Ones

은수님이 공유해주신 우리가 만든 리스트를 들으며 퇴근하는 길

노래를 듣는 날에 따라 같은 곡도 그때그때 느낌이 매우 다른데 책을 읽으며 듣는 BGM 속에서도 유난히 귀에 반짝거리는 음악이 있었다. 재생목록에 추가하려 핸드폰을 떠내 화면을 열었는데 와 뮤직비디오를 보니 엄마 아빠 생각이 났다. 어렸을 때나를 이렇게 카메라로 찍어주셨겠구나. 그리고 침대 위에서 방방 거리는 모습에 우리 조카 생각도 났다. 그 옛날 아빠가 찍어준 비디오 속에 내가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으면서, 동생이 찍는 우리 조카들이 나이 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지난주 이곡을 듣고 공유해주신 수지님의 글과 댓글들을 보니 이번 주 나만의 플레이리스트 만들기가 끝난다는 생각에 갑자기 슬퍼졌다.

이번 주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워봐야지 


12/1 

작전명 청-춘! - 잔나비

리추얼을 만들면서 현재에 충실해지고 있다. 

저녁에 리추얼을 시작한 이후 노란 조명 아래서 음악을 너무너무 듣고 싶었다.  지난 주말 안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가 조명과 스피커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발뮤다 더스피커를 질러버렸다. 그리고 오늘 그 녀석이 왔다. 

온라인 리추얼을 시작한 지 두 달여, 나의 책상엔 소중한 나의 감정일기도 두 권째, 유튜브에는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도 생겼다. 소장 욕으로 사들인 책을 다 정리하고 이북만 읽던 내가 다시 책을 들이기 시작했고, 다 읽어도 새것 같았던 책은 이제 박박 밑줄과 별과 나의 생각이 함께 쓰인 책이 되었다. 책상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도 쌓여가고 기분에 따라 밑줄 긋는 색이 있는 펜도 생겨났다. 글도 모두 디지털로 남겼었는데 손글씨를 쓰며 일기장을 늘려가고 있다. 미니멀하게 살던 나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개같이 모아서 내 집 장만해보겠다는 꿈도 이제 에라 모르겠다. 

내 책상 옆으로 낮은 책장 하나를 옮겨왔다. 평상시에 읽는 책으로 채우고, 나의 일기를 두고, 음악을 듣는 아이패드도 두고 오늘부터는 반짝이는 스피커도 둘 거다. 아니다 스피커는 이불속에서 책 읽을 때 침실에 데려가야지.

현재를 더 해피하게 즐기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오늘은…. 영 음악에 집중이 안되네 음악보다 음악에 변하는 이 불빛에 자꾸 집중하게 된다. 

집에서 즐기는 불멍 :)


12/2 

꽃무늬 벽지 - 신지훈

이번 주는 뭔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선곡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내 귀에 꽂혔던 노래 말고 모르는 아티스트의 곡을 찾아보다가 다린, 바닷가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틀었다. 목소리도 가사도 영상도 너무 좋아서 재하의 새벽이 아티스트명인 줄 알고 클릭했다. 일단 구독하고 여기서 오늘의 노래를 찾아보기로 했다. 

기모노를 입고 떨어지는 벚꽃을 올려다보려는 꼬마 배경의 핑크 음악이 메인에 걸려있었다. 너무 청량하지도 허스키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뮤지컬처럼 쏙쏙 박히게 가사를 읊조려 준다. 

작은 방, 뭐라도 해내라 하네 

똑같은 무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애쓰던 내 마음 같아요

이 가사들이 유난히 마음에 쓰인다. 우리 모두가 다 이렇게 사는구나 싶어서 괜히 위로가 된다. 

한 달간 음악은 나에게 숨 쉴 수 있는 틈을 주었다.

이번에 음악이 준 감동은 과거의 내가 음악사이에 쌓은 시간을 꺼내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화장하는 과정에서 왔던 듯했다. 

그리고 너무 좋았던 것은 아주 오랜만에 음악 안에 나의 새로운 시간을 쌓았다는 뿌듯함

세상을 처음 맞이하는 아이처럼 새 음악에 켜켜이 저장된 나의 모습은 나중에 어떻게 또 나에게 감동을 줄는지...



12/3 

Tu - maye

혜윤님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알게 된 주옥같은 노래들이 정말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곡이자 나의 아침 플레이리스트 1번이 되어버린 tu

가사의 뜻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지만, 물미역처럼 나른하게 풀어져 버리는, 따뜻한 나라에서 느껴지는 게으름이 흐르는 곡. 아침에 이불속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지만 이 곡이라면 춤추기 위해 몸을 흔들면서 빠져나오게 되는 그런 곡이다. 

음악이란 참 신기해서 언어를 알지 못하는 노래도 그 느낌이 전해지나 보다. 비긴어게인을 보며 우리나라 가사의 노래를 보며 감동받는 외국인이 신기했는데, 뜻도 모르면서 연상하던 그 느낌이 이 노래 가사와 비슷하다 :)

지난 주말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완성했다. 1~2주 차 주말에는 정말 엄선해서 너무 좋은 곡들만 넣었는데 나중에 잊어버려 못 찾을까 두려워하며 거의 다 그대로 넣은 듯했다 ㅋㅋㅋ 나는 어쩔 수 없나 봐 

CAS, 나이트 오프 새로 알게 된 아티스트들도 한 때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잊고 지냈던 지브리 음악들, 누자베스, 디어클라우드, 라쎄 린느, 에피톤 프로젝트… 오랜만에 만나 참 행복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함께 하는 사람들의 해석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 아무리 좋은 곡들을 추천받아도 결국 나에게의 의미와 스토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나와 비슷한 시간 어떤 곡을 통해 생각이 연결되는 느낌이 좋았다. 

마지막 주 함께하는 사람들의 글과 그들이 느낀 음악을 많이 열어보지 못해 아쉬웠다. 

마음이 충만해졌다. 언젠가 또 하루하루에 지쳐 만신창이가 되면 돌아온 탕아처럼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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