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초안 제6화
그렇게 대리가 되어 익숙하게 업무를 해나가던 어느 날이었다.
공정위로부터 대규모기업집단현황 공시 점검결과 공문이 내려왔다. 약 3년간의 그룹의 모든 공시 중 위반사례를 지연공시/미공시/누락공시 등으로 구별하여 경고와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과태료가 부과된 회사들은 모두 발칵 뒤집혔다. 본인이 처리한 업무와 관련하여 회사가 벌금을 물게 되었기에 담당자들이 죄인이 되어있었다. 어느 회사에서는 "니가 실수해서 벌금 물게 되었으니 니 월급에서 내"라고 소리친 임원도 있다고 했다.
보리가 공시한 지주사도 몇 건 해당되는 내용이 있었으나, 다행히 경고 수준에 그쳤다. 일단 등줄기에 소름이 쏴악 돋는 순간을 넘기고 정신 차려 계열사의 과태료 부과내역을 확인했다. 그리고 소명자료를 정리하여 제출하고 공정위 담당자와 통화하며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감정에의 호소도 덧붙여가며...
몇 가지는 인정을 받아 경고로 전환되었지만, 그럼에도 과태료는 꽤 되었다. 한 가지 위안을 삼자면, 공정위가 내보낸 보도자료에 공시위반이 높은 불명예의 그룹명에 우리는 이름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그룹 전체가 공정위에 탈탈 털려 벌금 맛을 처음 본 어느 날, 부장님이 질문한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걸까?”
“일단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공시라서 담당자들의 실수가 많아요. 계열사 간 내부거래도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거라 공시사유에 해당한다고 느끼지 못하고 이전처럼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장사 위주로 의무가 있던 기존 공시와 다르게 비상장사도 모두 공시 의무가 있다 보니, 공시라는 업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기존의 업무를 진행하면서 이 업무를 추가적으로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공시담당부서나 담당자가 없는 회사가 대부분이고, 때문에 공시라는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제가 한 시간 가까이 전화를 붙들고 몇 번을 설명을 해도 다음 분기가 되면 담당자가 바뀌어있고 인수인계가 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번에 공정위 점검 결과를 보니 작은 이슈라도 장기로 지연되면 문제가 커 보이더라고요. 일단 이벤트 발생 시에 놓치더라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공시에 대한 의무가 발생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제가 담당자들에게 공시 사유에 해당하는 리스트를 정리해서 보내주면서 월말 정산 시에 체크하도록 하면 적어도 한 달 이상 지연되는 건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몇십 개의 리스트를 보내주면 스팸처럼 안 볼 사람들은 또 안 보게 될 텐데, 시스템을 만들어서 항목 하나하나에 체크하도록 하고 마지막에 제대로 확인했다는 서명까지 받게 하면 어떨까?”
“그런 시스템만 만들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오케이. 이건 내가 계열사에 확인해 보고 무조건 해달라고 할게. 그럼 또 다른 건?”
“이번에 과태료를 부과하는 회사들이 나오면서 이 업무가 얼마나 무서운 업무인지 다들 인지를 했을 테니 이 기회에 비상장사도 공시책임자와 담당자를 명확히 지정하고, 가능하다면 저는 공시 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필요하다면 제가 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시스템 구축하고 시스템 설명과 함께 전 계열사 공시담당자들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할까?”
순간 판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생각에 멈칫했지만,, 본인 말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이었으니 진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네. 좀 부담스럽긴 한데 한번 준비해 볼게요.”
그렇게 약 두 달을 준비하고 전국의 모든 계열사의 공시책임자와 담당자가가 한 곳에 모였다. 부장님께서 주도하실 거라 철석같이 믿고 설명회를 준비했는데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직접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교과서적인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보리가 직접 진행하게 되었다.
대리 나부랭이가 재작년 함께 일하던 사수와 팀장님을 포함하여 흰머리가 가득한 부장님들까지 앉혀두고 설명을 하려니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손들고 나서서 발표하는 걸 좋아했던 꼬마적부터의 본성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설명회를 리드한다.
한 번의 설명회로 개선될 문제였으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을 터, 이후에도 종종 지연공시들은 발생했지만 확실히 그 건수는 줄어들고 있었고, 담당자들도 지속 개선되면서 안정화되어 갔다. 과연 이 문제가 해결이 될까 싶은 생각을 했던 보리는 제대로 배웠다. 내가 지주사에 있으면서 해야 하는 건 이런 거구나!
하나의 작은 과정을 경험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그 해 연말인 12월 임원인사로 회사가 시끌시끌한 때, 그룹 차원에서 지연이나 누락 공시가 자주 발생하는 지분공시는 프로세스도 이런 방식을 통해 개선했다.
지주사에서 일하는 5년 동안 보리는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고, 프로세스를 개선할 일은 없는지 고민하는 습관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