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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전환에의 첫 도전 - 저 다른 일 하고 싶습니다

브런치북 초안 제7화

by 보리 Bori

보리에게 공시업무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결코 많지 않을 공시담당자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표현 - 잘해야 본전인 업무.

대학시절부터 마케팅에 관심이 있었고, 자유로운 기업문화를 꿈꾸며 패션회사에 입사하고, 그리고 주식이나 투자/돈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그에게 공시라는 업무는 일단 하고 싶은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민할 여지도 없이 싫은 쪽의 저 끝에 있을만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일도 아니고 재미도 없었던 업무를 담당하며 약 5년이라는 시간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유명한 말이 있다. 일/돈/사람 중에 최소 하나만 만족되어도 회사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는...

보리의 경우에는 사람이 그 답이었다. 존경하는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대하는 태도, 일과 삶의 밸런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한 자세 등을 자연스럽게 보고 느끼며 배워나가는 것이 좋았다. 유능한 실무자이자 커뮤니케이터였고 동시에 보기 드문 훌륭한 리더인 이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을 키워 주는 분들이었다. (생각보다 실무자로 일 잘하는 사람이 좋은 리더십을 갖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리는 그들을 롤모델 삼아 유능한 직원이고 리더가 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또한 회사 업무를 벗어나 인생 선배를 통해 삶에 대한 가치관을 만들어가는데도 큰 영향(긍정적인 쪽으로)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로 성과를 내는 것이 함께 일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나름대로 도움을 주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물론 회사에서 받는 월급에 대한 대가이기도 했다. 숫자를 좋아하는 성향과 논리적인 성격은 재무와 공시업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했다. 하지만 적합하다는 표현 딱 그 정도.

보리는 항상 생각했다. 만약 본인이 하던 그 업무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누군가가 온다면 본인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며 모두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시간이 흘러간 만큼 열심이었던 만큼 업무는 너무나 익숙해졌고, 이제 큰 어려움 없이 크게 머리를 쓰지 않고 자동반사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근데 그렇게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이 영 재미가 없다.

힘들고 어려운 무언가를 수행하면서 따라오는 성취감과 스스로가 조금씩 성장한다는 느낌이 어느 순간 정체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5년 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번 더 거치며 그제야 익숙함과 안정이라는 것에 지루해하고, 자꾸 새로운 도전을 찾아가는 성향이 보리는 본인의 천성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는다.)


지주사에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룹의 계열사에서 일하다 온 사람들이었고 3~5년쯤 일하면 모두 친정으로 돌아간다. 물론 보리에게는 지금 이곳이 친정 같은 곳이지만, 새롭고 재미난 일이 넘쳐날 것 같은 패션회사로 가서 마케팅이든 영업이든 해보고 싶다. 보리가 원하는 것은 커리어를 전환하여 새로운 업무를 배우며 수행해나가는 것이니 물론 쉽지 않다.

막연하고 당연하게 쉽지 않겠다는 추측의 정도를 직접 체감한 적이 있었다.

지주사에서 약 3년쯤 되었을 때인가 패션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알았다. 나름 일머리와 센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커리어 전환을 하면 그저 나이 많은 신입사원일 뿐이고, 머리만 큰 신입사원을 모두가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은 기본이요 내가 떠나고 싶은 이곳에도 내 업무를 내 자리를 대신해줄 사람이 올 수 있는 타이밍! 소위 아다리가 맞아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반 포기상태였다. 언젠가 그런 기적 같은 기회가 오면 다시 노려보자. 나를 받아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또한 상당히 씁쓸하고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가는 일이었으니 잠시 덮어두었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난 만큼 더더욱 간절함은 커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중에 존경하는 두 부장님이 곧 계열사로 발령이 날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박수치며 보내드려야지 하는 마음 뒤에 부장님들 없이 나는 어떻게 여기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앞으로 남은 인생을 계속 이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고민한다.

사람 때문에 버티던 직장생활이라 사람이 사라지니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 자체를 즐기지 못하면 똑같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2년 전, 전배가 무산되었을 때 내 자리에 올 사람만 있다면 내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보내주겠다는 상무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일단 내 자리에 올 사람부터 찾았다. 그룹 내 공시 담당자 중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사람으로. 보리는 나름 배수의 진을 친 것.

스크래치 입을 각오도 단단히 하고 상무님께 다시 한번 말씀드렸다. 인수인계도 필요한 기간만큼 충분히 하겠다 했다. 상무님은 그때와 달리 한 번만 더 고민해보라.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보리의 확고함이 느껴졌을 것이다.


상무님은 며칠 뒤 보리를 불렀다. 그룹 내 호스피탈리티 관련 신사업과 공간기획을 하는 부서가 있는데 그곳에서 일하다 보면 패션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보리는 지주사를 떠나 새로운 조직에서 새로운 업무 커리어 전환에 성공했다. 자처하여 가시덤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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