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의 터닝포인트

엄마와 속초 여행

by 보리 Bori

Intro

속초 여행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올해 초 코로나가 덮쳐오기 바로 직전. 엄마는 아빠와 제주도에 오랜만에 여행을 갔다가 제주의 매력에 풍덩 빠져 돌아왔다. 그리고 올해 내내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다며 자주 말했었다. 5월에 가겠다는 계획은 6월로 미뤄지고, 가을이 되었다. 워낙 엄마가 지르지 못하는 성격이라.. 난 엄마가 제주 살이를 꿈꾸기만 하다가 결국 못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전 엄마는 돌아오는 날이 정해지지 않은 제주살이를 떠났다.


엄마의 생일은 음력 11월 말.

올해 날짜로 12월 23일이다. 그리고 올해는 엄마의 60번째 생일을 제주에서 맞는다. 의미는 퇴색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환갑인데, 떠나기 전 세레모니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 온 가족이 모이기도 애매하고 나는 고민하다 동생에게 제안했다. 엄마 아빠랑 우리 둘만 조촐하게 가족여행이나 다녀오면 어떨까? 우리가 결혼하기 전 옛날처럼~

그렇게 우리는 속초 여행을 계획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어


호텔 기획을 하면서 몇 번 출장으로 파인스테이를 경험해본 나는 꼭 엄마 아빠를 모시고 그런 편안한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보고 싶었다. 절대 엄마 아빠가 스스로를 위해 하지 않을 소비. 5성급 호텔 같은 으리으리함 보다는 집안에서 햇살을 느끼고 창밖으로 바람을 구경하면서 하루 종일 쉬고 머무르고 싶은, 고즈넉하고 감성적인 그런 곳에서 소위 호캉스라는 걸 왜 하는지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숙소를 예약하려니 잠은 어떻게 자야 할지 침대가 몇 개인 곳으로 예약하는 게 좋을지 상상이 안되었다. 서른이 넘은 누나와 남동생이 한 침대에서 잘 수 있나? 엄마 아빠 품에서 자라던 옛날처럼 오랜만에 넷이 떠난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어색했다. 새삼 한방에서 깔깔대며 자라왔는데 어느 순간 각자의 가족과 삶으로 분리되어 살아가고 있었구나.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스테이폴리오에서 강원도를 가면 꼭 예약해야지 했던 숙소를 찾아 가예약을 하고, 이번 여행의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며 숙소는 내가 예약하는 곳으로 무조건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알뜰살뜰 살아온 이분들은 역정을 내신다. 언제 쓸지도 모르는 마일리지로 리조트 예약이 가능한데 왜 생돈을 쓰느냐는 것이다. 카페에서 커피 사마시는 돈이 세상에서 제일 아깝다는 분이다. 아니 자식이 본인들을 위해 쓰는 돈은 아직도 아깝고 미안하다.

숙소에만 머물러도 행복할만한 멋진 곳에서 시간을 계획했지만, 결론은 실패였다. 그렇게 결국 마일리지로 리조트를 예약했다.



나에게도 올해 첫 여행


이직하고 적응하느라 꽤나 애를 먹었던 올해, 12월의 속초가 나의 올해 첫 여행이었다. 여행 갈만한 시국이 아니었으니 뭐 억울하진 않았지만 막상 오랜만에 여행을 간다고 하니 날짜가 다가올수록 설레었다. 인스타에서만 보던 서점들도 가보고 싶고 유명한 칠성조선소도 가보고 싶었다.

다행히 유튜브로 열심히 속초 조사를 하던 엄마도 가보고 싶었다고 한다. (간 김에 딸이 가보고 싶었다는데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거다.)

올해 서랍 속에서 빛 구경을 못한 무거운 망원 렌즈도 챙겼다. 내 방에 걸고 싶다 생각하던 겨울나무, 바다의 윤슬, 그런 사진을 담아오고 싶은 마음에...


아침 7시에 출발


금요일 휴가를 내고 2박 3일로 우리는 속초 여행을 시작했다. 새벽잠이 없는 엄마에게 아침 7시는 이른 시간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나는 첫 소풍을 기다리던 아이의 설레는 마음이었다. 겨울이라 7시도 캄캄해 새벽에 일어나 여행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바리바리 짐을 싸서 꼭두새벽 출발하는 여행. 엄마가 싸온 삶은 계란과 사과와 커피를 마시며 차로 시작하는 여행. 뭔가 꼬마 시절 가족여행을 떠나는 그때 같았다.


차라는 공간은 대화를 나누기 참 좋은 공간이다. 딴짓할 거리도 별로 없는 작은 공간에서 어쩌다 자연스럽게 올해 나의 힘들었던 이직 적응기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내 브런치의 글을 통해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겠지만 엄마도 많이 궁금했을 터.

다행히 잘 극복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 나도 마음이 편했다. 감사했다.

5분 거리 바로 앞에 보이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누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여행이란 이런 것이 구나


유튜브로 속초에서 가볼만한 곳을 열심히 조사하던 엄마는 도착하자마자 속초중앙시장을 가자고 했다. 엄마는 닭강정, 아빠는 술빵이 먹고 싶다 했다. 9시에 도착해서 각자 먹고 싶은 메뉴 앞에 다소곳이 줄을 서고 강정 두 박스. 술빵 5개를 샀다. 그리고 차 안에서 독특한 구성의 메뉴로 우리끼리 행복하고 재미진 조식 타임을 즐겼다.



엄마는 등대


속초 여행의 시작으로 속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등대를 가보기로 했다. 미리 챙겨 온 등산화로 야무지게 갈아 신고 우리는 등대를 향해, 찬란한 아침 조각을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걸었다.


외할머니가 맏딸인 엄마에게 지어준 별명이 있다. 집안의 등대. 딸로, 언니와 누나로, 며느리로, 엄마로, 고모로 그리고 할머니로 … 연이어 파도처럼 다가와 쌓이는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등대처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할머니가 지은 별명이 정말 엄마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엄마는 미션을 부여받은 듯 한편으로는 의무감과 부담을 가지고 살아온 건 아닐까

그렇게 등대는 등대에 올라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에 반짝거리는 윤슬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자식 입으로 음식 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듣기 좋다던 할머니, "엄마! 할머니랑 똑같아"

맛있는 회와 매운탕을 먹여야겠다며 팔딱거리는 생선을 직접 골라 두 손 가득히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어쩐지 짐이 많더라니 자식들 먹일 음식이 한가득이다. 어렸을 적부터 먹고 자란 엄마표 음식들~ 부풀어 오는 배를 둥둥거릴수록 엄마는 행복하다. 술도 한잔씩 하며, 알코올 힘을 빌어 진솔한 대화도 나누는 그런 밤이다.



나는 전생에 나무였나 봐

분명 잠들 때는 여유롭게 늦잠 자고 쉬기로 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부산스럽게 일어난다.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가 바지런한 한국인의 기질을 발휘하여 나갈 채비를 한다.

산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을 저격한 아빠의 추천 코스 설악산 드라이브! 차가 갈 수 있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 엄마는 산을 향해 계속 가잔다.

"나는 전생에 나무였나 봐. 산이 보이면 그쪽으로 자꾸만 가고 싶어."

찬 바람을 품고 한 시간 넘게 산을 향해 걷다가 엄마는 지쳐버렸다. 자석에 끌리듯이 산으로 산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길이라 해도 아쉽지 않을 것처럼 산속을 향해가는 엄마는, 맞아 아무래도 전생에 나무였을 거야.



제주에서 읽고 싶은 책 내가 선물할게

이번 속초 여행에서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동아서점과 문우당서림.

서점에 가면 엄마가 심심할까 봐 나는 제주에서 머무르는 동안 읽고 싶은 책을 선물하겠노라 했다. 엄마의 급한 성격까지 미쳐 계산하지 못해 레이첼 카슨의 바다 3부작은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정해져 버렸다. 그리고 아쉽게도 이 책은 두 서점에 모두 없어서 속초에서 사 오진 못했다.


엄마는 세련된 문우당서림보다 따뜻한 동아서점이 더 좋았단다.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앉아서 책 읽고 싶게 만들었다고.. 책을 문의하는 나에게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찬찬하고 친절하게 책 세 권을 검색해서 알려주는 주인장에게 나는 그 따뜻함을 느꼈다.


여러 가지로 계획한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햇빛을 머금은 종이 냄새로 콧바람을 쐬고 왔다. 나는 조만간 서점 투어를 위해 다시 속초를 찾아오겠구나 하며 기대했다.



Outro

올레길 대신 순례길

이번 주에 엄마는 본인의 60번째 생일과 동시에 함께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잘 도착했는지, 잠자리는 편안한지, 내가 준 일기장은 잘 쓰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많은데 전화만 하면

"이따 전화할게~" 왠지 바빠 보였다.


삼일 만에 여유롭게 나눈 통화.

아침저녁으로 미사를 보고, 오래된 냉담 기간의 잠을 깨우려 수녀님과 면담하고 신부님과 고해성사도 보고, 하루 세네 시간씩 오름을 걷고...

8시면 잠들어 새벽 3시면 일어나던 엄마가 11시에 잠들고 아침 7시 알람 소리에 깨고 깜짝 놀랐단다. 잠자리는 괜찮냐는 질문에 피곤해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어떤지도 잘 모르겠단다.

"육체를 쉬러 왔는데 영혼까지 채우려니 너무 빡세네 :) 그래도 성당 근처 오름이랑 순례길을 다니는 게 너무 좋아서 올레길 대신 순례길을 걸어보려고 해"


엄마 인생의 의미 있는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바라며, 또 다음엔 나도 이런 여행을 함께 해보기를 바라며 :)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