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초안 제7화
1종 일반주거지역
용적률
건폐율
헤베?
마스터리스
ADR
랙네이트
어메니티
ROH
워크인
DND
턴다운
신사업기획을 하는 부서의 첫 주간회의 때 보리의 메모장에 기록된 단어들. 부동산과 공간 관련 비즈니스를 다루는 곳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는 것이 생소한 용어들과 함께 실감 난다. 다시 신입사원이 된 느낌.
보리가 합류했을 때 팀에는 두 개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컨테이너로 만든 복합문화공간과 라이프스타일 호텔. 컨테이너 200개로 만들어진 커먼그라운드는 론칭 후 인플루언서들의 포토스폿이 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인기 덕에 여기저기서 추가 개발 제안을 받고 있었고, 호텔은 오픈을 6개월 남기고 객실팀장, 식음팀장, 세일즈 매니저 등 오픈 멤버들이 조인하고 있었다.
한 달 전 보리는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공간을 보러 갔었고, 넓은 광장에 푸드트럭 그리고 쿨하게 퉁퉁 세워진 드럼통 위에 맥주를 올려두고 비스듬하니 몸을 기대어 여유롭게 시간을 즐기는 모습에 여기 한국 맞나? 딴 세상에 온듯한 느낌을 받았다.
신선한 충격을 준 그 공간을 기획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는 설레는 기대감으로 출근했는데,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이해할 수 없다니, 걱정과 부담감이 밀려온다. 나이 많은 신입사원은 어서 빨리 퍼포먼스를 내서 메모장의 용어를 적절하게 구사하며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차장님이 회의실로 불렀다.
“보리가 처음으로 담당할 프로젝트를 줄게. 지금 우리가 개발 제안을 받으면서 우리 브랜드에 대해 많이 소개하고 있잖아? 근데 CG의 제대로 된 소개서조차 없는 상황이란 말이지. 입점 브랜드를 모집할 때 사용한 이 리플릿 쪼가리로 소개하기는 가오가 안 서잖아?”
책상 위에 올려진 컨테이너 비율의 10장이 채 안되어 보이는 소개서를 가리키며 차장님은 말했다.
“커먼그라운드 브로셔를 기획해보고 업체를 선정해서 제작하는 것까지 전 과정을 한번 리딩 해봐. 간단한 일처럼 보여도 이 과정 자체가 하나의 기획이니까 PM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한번 해보자고. 필요한 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언제든 편하게 말하고.”
IR을 수행하면서 여러 업종의 회사소개서를 작성해봤고, 주주총회를 위한 리플릿을 만들어 본 적 있는 보리에게는 별 일 아닌 듯 보인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구구절절 설명해 주는 차장님이 마치 꼬마애의 눈앞에 초콜릿을 흔들어대며 "이 초콜릿은 말이야 어느 브라질 농장에서 공수한 고급 카카오로 장인이 하나하나 직접 만든..." 애써 의미 부여하며 말하는 듯 느껴졌다.
보리는 ‘이 정도는 내가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라는 특유의 자신감에 콩닥거렸다.
그날 밤 보리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아이디어가 없을지 고민했다. 침대에 누워 아이디어를 잊을까 메모장을 열어 기록하고, 핀터레스트에서 레퍼런스를 찾고, 브로셔에 대한 생각으로 쉽게 잠들지 못했다.
몇 시간 못 잤지만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잠이 부족해도 힘이 불끈 솟는 건 재미나서 일할 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출근해서 브로셔 기획의 배경과 방향성을 정리한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담아낼까?
<어떤 내용을 담을지> 정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브랜드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동안 IR을 하면서 익숙하게 진행한 기업을 소개하는 것과 비슷했다. 차장님과 함께 자주 미팅에 참석하면서 사람들의 FAQ도 이미 정리해 두었기에 정리만 하면 되었다. 컨테이너의 특성과 팝업 비즈니스에 대한 설명, 공간과 각 공간에 특화된 콘텐츠, 입점 브랜드 소개 그리고 향후 확장 계획의 형태로 구성하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을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살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이 부분은 직접 론칭 작업을 한 대리님과 함께 고민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대리님과 원하는 방향을 이리저리 고민해 보다가 흔히 보던 브로셔가 아닌 하나의 책 혹은 매거진 형태의 브로셔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제작하고자 하는 브로셔의 방향성을 정리하고 이제부터 이 방향성을 잘 이해하고 공감하여 아웃풋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전문가를 찾는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브랜드 소개서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는 안정적이긴 하지만 결과물이 뻔할 것 같았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잘 어울리는 스트릿 소울 충만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업체는 브로셔 작업은 진행해 본 적이 없어서 리스크가 커 보였다. 우리의 아이디어 중에 하나인 매거진의 형태를 잘 살릴 수 있도록 매거진을 직접 발행하는 대표님들도 두 분 만났다.
그중 사진 매거진을 발행하는 대표님은 보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를 빠르게 캐치했다. 그 자리에서 매거진의 형태를 살릴 수 있도록 입점 브랜드 소개를 인터뷰의 형태로 제안했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잘 살려 줄 디자이너와 추가 미팅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모습에 이 분과 일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뒤에 미팅 때는 성에 차는 업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브로셔의 제작 방향성과 업체 선정에 대한 내용을 보고했고, 차장님은 보리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사실 차장님 마음속에는 다른 업체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적극성에서 분명 결과물이 다를 거라고 자신했다.
담고자 하는 콘텐츠 초안을 우선 작성하고, 공간에 함께하는 파트너들의 인터뷰도 진행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날 브로셔에 담을 사진 촬영도 추가로 진행했다. 초안과 인터뷰 그리고 사진 등은 전문가의 손을 거쳐 그럴듯하게 정리된 듯했고 차장님께 보고했다. 보리는 당연히 컨펌 후 디테일한 부분을 정리하고 표지 디자인에 집중하여야지 하고 나아갈 순서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장님의 피드백은 처참했다. 글이 만연체라서 한 번에 읽히지 않아 전체적으로 다시 수정이 필요하다고 했고, 개념의 이해를 돕는 이미지도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고, 사진도 공간 중심으로 촬영되어 생기가 없다고 했다. 피드백은 매우 디테일했고 그중에는 내가 업체와 이미 여러 번 수정을 통해 조정한 내용을 번복하는 그런 것들도 있었다.
아무리 촬영 원본을 뒤져도 차장님이 만족할만한 컷을 찾지 못했고, 고민 끝에 결국 보리는 해가 따가웠던 어느 주말 직접 카메라를 들고 찾아가 사진을 촬영했다. 수고스럽긴 했지만 기꺼이 나의 주말을 투자할 만큼 재미있었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날 촬영한 사진 중 몇 장은 브로셔에 실제로 실렸다. 사진 찍는 취미가 생산적으로 연결된 첫 성과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은 사진 하나에 불과했다.
본인이 쓴 글에 대해 매우 디테일한 수정 요청을 받고, 수정에 수정이 거듭되면서 대표님은 지쳐가며 점점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고, 차장님과 대표님 사이에서 보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기 시작했다. 표지 디자인 작업에서 결국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디자이너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야심 차게 준비했던 디자인의 결과가 생각보다 기대에 못 미쳤다. 커버를 벗기면서 컨테이너의 결이 홀로그램처럼 변해가는 그런 느낌이었는데, 의도가 명확하게 살지 않았다.
이 안을 준비하느라 시간은 많이 지체되었고, 결국 보리는 차장님의 의견대로 이 안을 버리고 무난하게 형압으로 컨테이너의 올록볼록한 질감을 살려 표현하자는 결정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스스로 이렇게 뻔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납득하기 힘들어했고, 보리의 마음을 흔들었던 디자이너의 적극성은 그대로 실망과 분노로 돌아왔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리도 그렇게 평범한 디자인으로 결과물을 만들려고 그 오랜 시간 고생했나 하는 자괴감이 스치고 지나가긴 했으니까… 이런 결과물을 만들게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힘 빼지 않았을 텐데 싶었으니깐.
보리는 죄인이 된 양 대표님과 디자이너의 눈치가 보여 차장님에게 SOS를 요청했다. 함께 미팅을 통해 남은 업무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논의했고, 막상 그들 앞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차장님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 주말 보리는 길었던 머리를 30센티 정도 짧게 싹둑 잘라 버렸다.
정리 후 업무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시작만큼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얼마간은 생각도 하기 싫어 덮어두었던 브로셔가 제작되어 사무실로 배송된 날. 혹시라도 문제는 없는지 두근거리는 마을로 브로셔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작업 초반 차장님께 보고했던 시안과 비교해보게 되었다. 뜨거운 햇빛 아래서 삐질삐질 땀 흘려가며 찍었던 사진, 의미를 연결 짓기 어려웠던 일러스트. 디자이너가 고집했던 디자인 그리고 차장님이 수정한 문구들…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고난의 시간을 거치면서 퀄리티가 높아졌구나! PM으로서 이번 작업을 관리하는 데 있어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기획단계에서 정말 중요한 기본을 챙기기 전에 눈에 띄는 독특한 디자인, 화려한 무엇인가에만 너무 집중하지는 않았나
브로셔를 받아 볼 사람들의 입장에서 한 페이지, 사진 한 장, 문장 한 줄에 최선을 다했는가
상사들이 그리는 결과물에 대한 생각은 고민하지 않고 내가 만들고 싶은 모습에만 집중하지는 않았나
이런 갭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업체를 제대로 리드하지 못해 오락가락하는 모습에 스스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무언가를 기획한다는 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필요한 콘텐츠를 작성하고 숫자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했던 방식과 결이 달랐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의사결정권자의 의견을 모아 목표를 정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최적의 방법을 찾고, 함께 효율적으로 같은 곳을 보며 나아갈 수 있게 조율한다. 그리고 디테일! 결과물을 접할 사람의 눈높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기획이라는 단어가 멋지고 거창해 보였지만 실제는 상식의 연장선과 성실의 반복에 가깝다고 느꼈다.
보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브로셔를 기념으로 가지고 있으며 5년째 유지하는 헤어스타일을 시도하게 해 준 프로젝트로 기억한다. 그렇게 새로운 일을 맡아 몸살을 했지만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