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초안 제1화
보리가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동아리 연습이 끝나고 여느 날처럼 찾아간 뒤풀이 자리. 모자를 눌러쓰고 반바지 차림으로 누군가 요란하게 들어온다. 같은 테이블에 있던 선배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한다. OB선배라는데 어째 그동안 봐오던 부류와는 달랐다. 다들 어색한 정장을 입고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어째 그냥 대학생 같아 보인다.
K패션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그 선배는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는 민소매에 쪼리를 신고 다니는 직원들도 있단다. '오~ 패션회사는 확실히 기업문화가 자유롭구나. 나도 패션회사에서 일하고 싶다.'
4년 뒤, 보리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한 회사에 최종 합격한다. 바로 그 선배가 다니던 회사였다. K패션회사 - 이 회사가 소속된 그룹은 왠지 이름만 들어도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나는 패션회사임에 차별화와 의미부여를 했다. 나름 우리나라 3대 패션회사 중에 하나라고!
학생 때부터 재미있어했고 관심 있었던 마케팅을 지원한다.
지루했던 신입사원 공채 교육기간 3개월이 지나고 부서 배치를 위한 면담시간
인사팀장님이 묻는다.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가 뭔가요?”
“고객을 제대로 분석해서 잘 팔리는 옷을 만들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학생 때부터 소비자 조사, 시장조사 등 통계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숫자를 좋아하나 보네요?”
“문과생 치고는 수학, 과학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좋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혹시 IR이라고 알아요?”
"... 잘 모르겠습니다."
“재무팀에서 IR 담당자로 보리 주임을 원해요.
투자자에게 기업의 경영활동을 알리는 활동인데 마케팅과 비슷해요."
“패션회사에서 마케팅을 하려면 영업팀 경험이 필수적인데 여자 신입사원이 영업팀에서 살아남기 정말 힘들어요. 본인을 원하는 팀에서 일해보는 게 어때요? 일하다가 마케팅부서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그래 이왕이면 내가 필요하다는 곳이 좋겠지.. 신입사원을 마케팅에서도 잘 안 받아 준다고 하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IR이라는 것을 해보자.
그렇게 보리는 2008년 4월 1일 자로 K패션회사 재무팀에 배치되었다.
재무팀 출근 첫날
회계팀, 인사팀, 기획팀 등 스탭부서가 모여있는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하고 공기가 무겁지? 대표님과 한층을 사용해서 그런가?
재무팀에 도착해서 인사를 하는데,, 싸~하다. 왜 이 팀원들은 다 정장을 입고 있지?
재무팀이라는 곳은 보리가 기대한 패션회사와 달랐다. 돈을 다루는 부서라 그런지 보수적이고 재미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기본 일주일 2회씩 있는 회식이었다. 특히 월요일 회식, 월요일부터 술을 마셔야 일주일이 빨리 간 데나 뭐래나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기는 보리지만 그는 뭐든 억지로 하라면 오기로 안 하고야 마는 꼬인 데가 있다. 술 먹이는 게 너무 싫어서 술 먹고 다음날 아프다고 안나가 보기도 하고, 월요일 회식은 정말 너무 힘들다고 말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보리야~ 술도 먹다 보면 늘어. 김차장 봐~ 쟤도 옛날엔 술 한 방울도 못 먹었어. 지금은 그래도 두 잔은 거뜬하잖아. 어쩌고 저쩌고 ㅇㄹ히ㅡㅏㅇㄹ;ㅓ차나자ㅜㄴ너"
IR은 나름 재미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투자자가 알고 싶은 자료를 작성하고 설명하는 일이다. 크게 패션업과 관련된 내용, 그리고 회사와 관련된 내용으로 나뉜다.
1. 패션업
- 미들스트림(패션사업) : 남성복/여성복/아웃도어/골프웨어/스포츠/캐주얼 등 업종별 시장의 흐름과 자사 브랜드들의 특징, 강점, 성장성
- 업스트림(섬유산업) : 원사나 직물 등 업스트림과 관련한 생산공장과 생산기술
- 다운스트림(유통) : 백화점/대리점/직영점/아웃렛 등 형태별 특징과 현황, 확장 계획
2. 회사
- 자체 회사 : 연간/분기별 손익과 재무상태(특히 패션업은 재고가 중요하고 우리 회사의 경우는 부채율이 높아 부채도 중요했다), 발행한 주식에 대한 히스토리
- 소속 그룹 : 내 타 계열사와의 사업구조 등
패션업과 회사를 둘러싼 폭넓은 환경을 이해할 수 있고, 80밖에 몰라도 120을 아는냥 말할 수 있는 특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끔 마케팅이 여전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른거렸다.
가끔 영업팀으로 배치받아 선배들에게 까이고 까대기에 지친 여자 동기들을 만나면,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와 깜짝깜짝 놀랐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래. 저렇게 힘들었을 거야.'
IR과 세트처럼 따라다니는 업무 공시는 영 성격에 안 맞다.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보리는 분기마다 제출하는 정기공시만 하면 되었다. 90년대를 연상케 하는 프로그램에 잔뜩 칸 채우기와 글짓기를 해야 한다. 족보처럼 물려받은 지난 분기보고서를 붙여넣기 한다.
그렇게 3번의 분기보고서를 복붙 했으려나? 내가 일하던 패션회사는 그룹 내 주력회사이자 제조업 기반의 계열사와 합병을 하게 되었다. 나의 동기들에게는 소속된 회사명만 바뀔 뿐 큰 차이가 없었는데 나는 달랐다. 회사의 주요 내용을 공시하고 IR 하는 주체가 달라졌다. 주식시장에서 종목명이 바뀌었다. 동기들과 일하던 별관 건물을 떠나 나만! 그동안 일했던 자료와 함께 짐을 싸고 옆에 본관 18층짜리 건물로 이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보리는 팀장에게 눈엣가시였던 골치 아픈 공시업무와 함께 팔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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