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연말정산
1분이 60초라는 것도, 한 시간이 60분이라는 것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도,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저문다는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의식도 모두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창안해낸 가상현실이다.
김영민 작가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글에서 쿨내가 풍겨 냉큼 밑줄을 긋고 생각했다. 그래 한 달, 일 년에 의미 부여할 필요 없지. 매년 연말이면 쏟아지는 누군가의 연말정산을 보며 의미부여일 뿐이라며 게으른 마음만을 갖던 나였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올해의 책, 올해의 영화 등은 저장해두기도 했다지...
그러던 나에게 올해는 이상하게도 연초부터 연말정산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한 해였다. 모티비를 통해 알게 된 소호님의 브런치 글에서 처음 그 마음을 품었고, 화룡점정은 올해의 인연 예시님을 통해서였다. 여름에 만났을 때도 한번 연말 인터뷰 이야기를 해주셔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12월 연휴를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너무나 적절한 시기에 인스타에 연말 인터뷰하는 방법을 올려주셨다.
그렇게 나와 친구는 올해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우리의 연말 인터뷰를 시작했다.
친구의 인터뷰와 함께 한쌍의 글을 남기고 싶었으나, 온통 회사일로 가득한 친구의 2020 인터뷰는 회사 기밀 유출이 걱정되어 포기하기로 했다. ㅋㅋㅋ
2020년의 김상아는 어떤 사람이었나?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한다.
먹고살기 위해 마케팅이라는 일을 한 사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삶을 계속 고민한 사람,
2020년의 김상아는 이런 고민들을 글로 남기고자 했던 작가 “보리”였다.
2020년의 인생 그래프는?
검은색 선이 처음 그린 그래프이고, 잊고 있었던 사건이 있어서 보라색 선으로 다시 그렸다.
1월: 겨우살이 진행. 일에 대한 만족감을 느꼈던 때
2월: 이직. 마음먹었을 때 원하는 회사로 이직을 성공함
3월: 이직한 회사에 대한 만족감
4월: 비밀
5월: 새로운 시도를 여럿 시작함. 컨셉진 에디터 스쿨, 브런치 작가 등록하면서 글을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당신의 브랜드는 무엇인가]에 참여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됨
6월~10월: 지금까지의 인생 중 최악의 시기. 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갔었던 힘들었던 기간. 이때 위안으로 삼았던 일들이 매주 한편 씩 글쓰기, 반반차 쓰고 카페에서 글 쓰기, 혼자 성수동 돌아다니기, 글 쓰는 모임에서 읽은 만한 책 추천받기 등이었음. 하지만 무엇보다도 친구가 언제든 회사를 그만둬도 된다고 말해준 것이 가장 큰 위로였었고, 대안 없이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임
10월~11월: 감정일기를 쓰기 시작.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한 달 된 날, 출근길에 그동안 썼던 글들을 쭉 읽어 봤는데 나의 문제가 보였음. 이직 후의 나는 부족한 모습을 보이면 남들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인정받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음. 마침 그 날 면담이 있었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나의 의사를 표현,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됨. 돌이켜보면 이 날을 계기로 6월부터 어두웠던 시기를 일시에 극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듦.
11월 이후: 일도 손에 익기 시작했고, 내가 못한다고만 생각했던 시기를 극복하니 나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도 하나 둘 눈에 보이기 시작함. 바닥을 쳤던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걱정했었는데 힘들었던 만큼 회복했을 때의 기쁨도 컸었음.
올해 잘한 것?
첫 번째, 글을 쓴 것이다. 특히 일기 쓰면서 나를 알게 되었는데, 난 내가 자존감 높은 사람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남의눈을 많이 의식하고 있었다. 내가 쓴 일기를 통해 나의 그런 모습을 깨달았고, 지금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기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올해 힘들었던 시기에 글을 썼던 게, 감정에 많은 치유가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글을 쓰면 자기 치유가 된다고 했었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둘째는 책을 많이 읽은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하기도 했고, 밑미에 참여하면서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동안의 독서는 주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관대함이 늘어난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어떠한 목적이든 책은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올해 아쉬웠던 것?
글 쓰기 위해서 집에만 있다 보니 밖을 돌아다니지 못했다. 마케팅 일을 하려면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직접 가서 유의 깊게 보기도 해야 하는데, 일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했다.
운동 열심히 못 한 것도 아쉽고… 역시 글을 쓰기 위해서 포기한 부분이긴 하다.
이건 지속적으로 아쉬운 건데 건강한 음식 못 먹었던 거. 나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주는 기쁨보다 건강하게 먹다가 웰다이 하는 게 의미가 더 크다. 올해 최고로 많이 배달 음식 시켜 먹지 않았나 싶다.
내년도 목표?
목표라고 하기에 소박할지 모르겠지만 올해랑 거의 똑같다.
일주일에 한 번 글 쓰는 것.
평균 이틀에 한 번은 운동하는 것.
건강한 음식 먹는 것.
그리고 독립출판하는 것.
다양한 초고들을 써보고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아, 읽고 재밌어할 만한 글을 추려서 각색해보려고 한다. A4 용지로 출력해서 찝어서 내더라도, 처음과 끝이 있는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보는 것이 목표이다.
올해 나의 10년 사회생활에 대한 글을 쓰고 나니 쓸 만한 소재가 없는 것 같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건, 회사에서의 제한적 경험을 벗어나서 다양한 경험을 해 보며 그러한 것들을 글감으로 삼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다.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여행을 다니면서 조금이나마 내 마음에 바람을 쐬어 주고 싶다.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있어서 매우 놀랐다. 인터뷰가 끝나면 올해 연말정산을 하는 글을 써보려 했었는데, 인터뷰 사전 질문 작성을 하다 보니 기억하고 기록으로 남길만한 일들은 이미 모두 브런치에 글로 작성해 두었더라.
힘든 일들도 많았고 아쉬움도 많았던 한해였지만, 미천한 나의 글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했던 문구를 오늘 이 글을 쓰려 다시 찾아보니, 기억에 없던 마지막 문장이 보이면서 묘하게 아주 다른 온도의 뉘앙스가 이제야 보였다.
1분이 60초라는 것도, 한 시간이 60분이라는 것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것도,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저문다는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의식도 모두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창안해낸 가상현실이다. 인간은 그 가상현실 속에서, 그렇지 않았으면 누릴 수 없었던 질서와 생존의 에너지를 얻는다.
우리가 우리 삶을 견디기 위해 만든 가상현실 속에서 질서와 생존의 에너지를 얻는다. 이제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연말 인터뷰를 하는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