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과 마케팅에 대한 기대와 실제
“스타트업 괜찮겠어? 마케팅이 왜 그렇게 하고 싶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업무의 일부분일 뿐인데~”
내가 이직한다고 했을 때 같은 부서에 있었던 선배가 했던 말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이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왜 스타트업에서 마케팅이 하고 싶었었나
실제로 일해보니 어떤가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로 일한 1년을 복기하며 막연하게 오랫동안 희망하던 업무를 수행해본 사람으로서의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남겨본다.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싶었던 이유
산업의 판이 바뀌는 중요한 시점인 만큼 제조업 기반이 아닌 앱 서비스 기반의 스타트업에서 빠르게 변화에 대응하며 수익성 창출을 목표로 비즈니스 하는 회사를 경험하고 싶었다.
회사
매출도 조직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이미 많이 성장한 10년이 된 회사는 더 이상 스타트업이라 부르기 애매하다. 파릇파릇한 아이디어로 생기발랄하게 일하는 회사도 아니었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며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전문적이고 빠르고 스마트했다. 서비스만큼이나 합리적이고 이과스럽고? 비즈니스적인 마인드가 기본으로 장착된 사람들이 많았다.
마케팅 본부
약 3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마케팅본부는 브랜딩, 퍼포먼스, 디자인, CRM 등 전문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개인사업자처럼 일하는 듯했던 기존의 비즈니스와 달리 매스를 타깃으로 하는 만큼 예상했던 것보다 세분화되어 전문적으로 일한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업무량도 책임감도 컸으며, 꼰대와 또라이가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은 내가?;;) 데이터를 통해 결과를 분석하고 의사 결정하며, 실행까지 빠른 호흡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높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나는 왜 그런가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마케팅이 하고 싶었던 이유
공간기획과 운영을 담당하면서 디지털 마케팅을 독학해 SNS를 통한 콘텐츠 마케팅, 퍼포먼스 마케팅 등을 시도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방식이 맞는지, 효율적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마케팅만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팀에서 마케터로 일해보고 싶었다.
예상하고 기대한 마케팅
- 브랜드(그리고 서비스 브랜드)의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
- 커뮤니케이션과 브랜드 캠페인 기획과 실행
- 온드 채널 관리
대략 예상은 되지만 두루뭉술했고 막연히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나도 TVC를 기획하고 실행해보는 건가 기대하기도 했으며, 공간기획을 했던 이력을 가진 내가 채용된 걸 보면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위한 스페이스 프로젝트도 진행하지 않을까 예상해 보았었다. 사회초년생 마냥 화려한 면만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활동들도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실제 수행한 업무는?
1. 고객 터치포인트 파악 및 개선
브랜드와 서비스를 인지-탐색-경험하는 전 과정의 고객 터치포인트를 파악하고 개선방안을 고민한다. 이 프로젝트는 자기 회사의 서비스를 실제 이용해 보며 개선점을 찾아가는 개밥먹기로 이어지고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 이용자와 브랜드의 모든 접점을 파악하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문제점과 개선사항을 찾아내는 일로 항상 고객의 시각으로 브랜드를 점검하는 기본기를 익혔다.
2. 브랜드 인덱스 조사
BI조사의 목적과 방향성에 따라 조사 문항을 기획하고 분기별로 조사를 진행해 고객이 생각하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현 위치를 파악하고 그 추이를 분석했다. 사회적 이슈나 트렌드, 회사의 전략방향에 따라 고객이 그 변화를 감지하고 긍정 혹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결과를 수치로 확인한다. 이 결과를 고려해 다시 회사의 전략 방향에 반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의미 있게 느껴졌다. 1차 조사 시에는 결과를 분석하는데 그쳤던 초보자였던 나는 세 번의 과정을 통해 조사 결과에서 인사이트와 전략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배웠다.
3. 커뮤니케이션 기획 및 실행
600만 회원 달성 기념 커뮤니케이션을 기획하면서 뻔한 메시지 전달이 아닌 그리고 기발한 이벤트를 기획해 보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제약에 부딪혀 (그보단 능력이 부족해서..) 결국 어디서 본듯한 경품 지급 이벤트를 진행했다. 별거 아니라 예상했던 이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대상자를 선정하고 선물을 지급하는 오퍼레이션 하나하나 손이 가는 것이 많아 신기할 따름이었다. 처음 진행해보는 앱 서비스의 대규모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A to Z를 경험하고 바람과 현실의 차이도 함께 깨달았다.
4. 서비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수립 및 프로모션 기획 및 실행
서비스 브랜드의 사업 방향성 조정으로 인해 마케팅 전략을 새로 수립하고 그에 따라 매달 프로모션을 기획하여 실행했다. 앱 내 게재할 배너/페이지와 각종 푸시와 SNS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프로모션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기획-문구 작성-디자인 요청-검토-업로드]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모바일 기반 앱 서비스의 채널별 커뮤니케이션 전략과 실행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잡혀갔다. 세일즈를 위한 후킹 문구를 작성하면서 자괴감이 들 때가 가끔 있었더랬다.
브랜드마케팅팀의 서비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기획 & 실행
5. 콘텐츠 카피라이팅 개선
대고객 문구들에 대한 윤문도 진행하면서 카피라이팅에 대한 고민과 디테일을 강화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하찮은 일이라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복잡한 서비스를 이해하는데 개인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마케터로서의 마인드셋과 기본기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브랜드 아래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른 하위 서비스와 상품의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이 있었고, 다양한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만큼 신규 서비스와 상품 출시와 조정이 잦아 네이밍을 고민하는 일도 빈번했다.
6. 브랜드 아이덴티티 정립
입사 후 두 달 정도가 되었을 때 브랜드 그룹 워크숍을 통해 직원들이 생각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DNA, 미션과 비전, 핵심가치, 페르소나, 톤앤매너 등을 논의하고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연말에 마스터 브랜드와 각 서비스 브랜드들의 그것을 다시 논의하고 다듬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이전 회사에서 짧은 기간 5개 이상의 신규 브랜드를 론칭한 나는 브랜딩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변하는 환경과 브랜드를 접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치는 모습을 고려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개선해가는 과정이 진짜 브랜딩이었다.
7. 쏘카카드 론칭
현대카드의 PLCC인 쏘카카드 론칭 커뮤니케이션 준비로 연말연초를 활활 불태웠다. 금융상품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제약사항이 많았고(모든 커뮤니케이션의 문구를 2주 전에 심의받아야 하는 것 등) 갖가지 아이디어를 많이 고민했지만 실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 아쉬웠다.
하지만 코엑스에서 쏘카카드의 광고 영상을 마주하던 순간, 지인들에게서 버스정류장의 쏘카카드 사진을 받는 순간들은 힘들었던 만큼 성취감을 주기도 했다.
브랜딩보다는 세일즈
팀명이 브랜드마케팅팀이다 보니 당연히 브랜딩에 관련한 업무가 주를 이루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마스터 브랜드와 서비스 브랜드들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했지만 아무래도 더 자주 반복되는 작업들은 세일즈를 위한 프로모션이나 이벤트 기획과 실행이 많았다.
브랜딩 강화와 브랜드 경험 개선을 위한 작업보다 빠르게 시도하고 개선하는 다양한 서비스들의 세일즈 증대를 위한 작업들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 가끔 소모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크리에이티브보다는 논리 그리고 카피라이팅
브랜딩이라 하면 막연히 브랜드를 매력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TV광고나 팝업스토어, 대형 프로젝트 등의 기획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나 역시도 아닌 줄 알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런 것들을 훨씬 크게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정작 브랜딩의 핵심은 브랜드를 얼마나 멋있게 포장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차별화된 이미지가 그대로 고객에게도 잘 전달되는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관된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고민하고 논의하고 가다듬고 정리하는 이 과정을 질릴 만큼, 수도 없이 반복해야 가능하다는 것도!
더불어 내가 수행했던 브랜드 마케팅의 많은 업무는 문구를 작성하고, 고민하고, 검토하는 일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우스갯소리로 문구 봇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할 정도로 업무를 하는 많은 시간을 카피라이팅으로 보냈다. 브랜드 마케팅의 기본은 글쓰기, 그중에서도 카피라이팅이다.
제너럴리스트보다는 스페셜리스트
스타트업에서는 적은 인원이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경영관리-기획-운영의 경험을 가진 제너럴리스트로서의 경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조직도 크고 이미 시스템도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럴 기회는 거의 없었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동했지만, 내가 속한 조직의 특성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상장을 준비하는 10년 차 스타트업의 마케터는 담당한 업무를 빠르고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할 수 있는 스페셜리스트가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나의 성장과 회사에의 기여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바람과 내가 성장하고 싶다는 기대감,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 때문에 회사의 성장에 내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부족했다. 때문에 빨리 퍼포먼스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에 스스로 위축되었고 적응에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는 것만 생각했었구나. 이제 잘하는 일을 통해 회사에 기여하는 것과의 조화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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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고 느낀 것에 대해 정리면서 반복적으로 떠오른 질문들이 있다.
- 기대한 것을 얻었는가
- 만족하는 것과 아쉬운 것은
-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의 가치가 충족되고 있는가
진짜 중요한 고민이 이 질문에서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