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업에 대한 고민
EP9. 갭이어(GAP YEAR) 프로젝트브런치의 bori's resume 스토리의 시작인 2019년까지를 회고하며 나에게 커리어란 삶 그 자체다.라는 다소 오글거리는 문장의 결론을 내렸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쫒아 열심히 일하며 성취감을 얻고 성장하는 하루와 일주일과 한 달이 모여 10년이 넘는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계획한 대로 노력하고 노력한 대로 결과가 따라주는 시간에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로 이직을 했지만, 기대와 달리 생각보다 적응에 긴 시간이 걸렸다. 노력도 하다가 포기도 했다가 현실과 타협도 했다가 다시 또 마음을 다잡고... 많은 노력과 감정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극복했구나 하는 순간이 왔다.
보통 이런 순간이면 일이 재미있고 신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처음으로 나의 일상에서 일이 분리가 되었고, 퇴근하면 회사와 일과 관련된 생각은 하기가 싫어졌다. 그토록 바라던 마케터가 되었는데 마케팅 레퍼런스를 찾는 일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할 생각에 벌써부터 우울해졌다.
회사일에 열정적인 직원들을 보면서 제 3자의 눈으로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그들에게 보이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나 열정이 나에게는 없었다. 도대체 왜일까 꽤 오래 여러 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일했었는데, 그때보다 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바라던 회사를 왔는데 왜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는 걸까
그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직하면서 회사를 선택할 때 놓친 나의 중요한 실수와 직결되었다.
1.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
스타트업에서의 마케팅 포지션이 최우선 기준이었고,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모빌리티 산업이나 이동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회사의 미션에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차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나 성향과도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저 앱 서비스 중 카테고리 킹인 회사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그렇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일에서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2. 조직과 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
조직문화와 하게 될 일에 대해 깊이 알아보지 않았다. 스타트업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해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나의 경력과 연관되는 어떤 일들을 하게 되겠거니 막연하게 예상했다. 나무 아래서 열매가 손으로 떨어져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입사 전, 구체적으로 진행하게 될 업무 리스트와 비중도 확인하고, 하루/일주일/한 달의 일상도 구체적으로 확인했었어야 했다.
이곳은 내가 일했던 조직보다 훨씬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고, 새로운 시도보다는 안전지향적인 방향으로 업무를 진행했기에 변화와 다이내믹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단조롭게 느껴졌다.
브랜딩 본질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여, 대규모 예산을 동반한 커다란 프로젝트만을 기대했기에 정작 정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아주 디테일한 수준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반복의 과정이 지치고 힘들었다. 문구와 단어, 조사하나까지 딥하게 파고들어 고민하면서 많이 빠르게 일하는 게 버거울 때도 있었다. 과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일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그렇게 꿈꾸던 일이었지만 재미가 없었고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3. 개인적인 성향과 취향
이전에 만족하고 있었어 스스로도 미처 알지 못했던 포인트다.
내가 기획하고 운영하는 브랜드의 페르소나가 나의 성향이나 취향과 비슷하여 일과 개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이 부분이 맞지 않았다. 주요 이용자인 20~30대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으며, 차나 모빌리티 산업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지금의 이 경험을 모두 인지한 상태로 다시 이직을 고민하던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까? 내가 놓친 실수는 보완하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같은 선택을 하게 될 것 같다. 콩깍지에 잠시 객관성을 잃는 연애의 시작과도 같았지만 다시 돌아가도 결국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었던 것처럼!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필요한 경험이었고, 일을 대하는 나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이었다.
앱 서비스와 디지털 마케팅의 경험, 스타트업이 스마트하게 일하는 방식(목적을 생각하며 일하고 많은 것을 오픈하고 공유하는 습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개선점을 찾아가는 자세, 빠른 호흡, 나에겐 새로웠던 다양한 업무 툴), 찐 밀레니얼들과 일하며 그들의 생각과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것까지
그리고 10년 동안 회사와 함께 성장해온 로열티 높은 직원들을 보면서 몰랐던 나를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그동안 크게 두 번의 커리어 전환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배움과 깨달음이 있었다. 기술적인 부분을 익히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며, 비즈니스의 한 사이클을 경험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숙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영역에서의 스킬이 장착되면 결국 어떤 영역이든 일하는 것(=업무의 본질)은 다 비슷하다는 것. 그래서 절대 쓸데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 어떤 경험도 시간낭비는 아니다.
그 과정에서 몸살을 하느라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 마저도 미지의 영역이 개척된 느낌이랄까. 누군가 같은 고민으로 괴로워해 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경험치가 쌓인 기분이다. 저항이 컸던 만큼 성장했을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이곳에 정을 주고 계속 일해보려는 다짐을 여러 번 했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럼 다시 이직을 해야 하나. 어떤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해야 할까.
하지만 더 이상 가고 싶은 회사가 없다. 어딜 가도 비슷할 것만 같다. 회사의 가치와 미션에 동의하면서 나의 취향과 일치하는 페르소나를 가진 그런 회사가 과연 있을까? 그런 회사에서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을 희망으로 품고 마냥 기다려야 하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 한켠을 자리하면서 연말연초를 매일 12시간 이상 일하게 되면서 지쳐갔다. 목적의식도 사라지고 매일 내가 소진되고 있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몸도 아프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친구가 제안했다.
좀 쉬어가는 건 어때?
월급의 노예가 족쇄를 끊어낼 수 있을까?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로 쉰다는 가정을 처음 해본다.